환상 속의 그대
이제 와서 고백하자면 한때 내 꿈은 군인이었다. 그냥 막연한 꿈이 아니라 사관학교를 가기 위해 꽤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고 실행에 옮겼다. 각 사관학교들의 전형 과정과 신체 기준, 체력시험 기준을 확인한 후 지원한 곳은 '국군 간호사관학교'였다. 양안 시력 차이 때문에 다른 사관학교는 지원할 수 없었다. 필기시험에 합격하고 체력시험을 위해 야간 자율학습 쉬는 시간에 운동장을 뛰었고, 자기 전 팔 굽혀 펴기 연습을 했다. 면접까지 거쳐 수능을 치고 며칠 뒤, 합격 통보를 받았다. 신원조회를 위한 서류를 제출하고 입소날을 기다리다 결국 일반 대학 진학을 선택했다.
마지막에 마음을 바꾼 건 당시 담임선생님 때문이었다. 간호사관학교 지원을 위해서는 담임 선생님의 추천서가 필요했는데 내가 그 학교에 지원하는 것을 너무 싫어한 선생님은 추천서를 써주지 않겠다고 했을 정도였다. (결국 써주셨지만) 최종 합격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가지 말라고 설득에 공을 들이셨는데, 내가 완전히 다시 생각하도록 만든 선생님의 한 마디는 "네가 그 학교를 나와봐야 어차피 간호사고, 군의관 밑인 거야."라는 말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편견 가득한 말이지만, 사실 '간호사'라는 직업 자체에 크게 흥미가 있지는 않았던 터라 그 말이 크게 다가왔고 덕분에 지금 민간인의 삶을 살고 있다.
부모님은 아직도 그때 내가 했던 느닷없는 선택을 이해하지 못하신다. 나도 자세한 설명을 드리지 않는다. 사관학교를 가야겠다고 마음먹은 가장 큰 이유가 집에서 벗어나기 위해서였기 때문이다. 집안 형편상 사립대를 가기 어려웠던 상황에서 가장 강력한 대체재가 '사관학교'였다. 학비가 없는 정도가 아니라 품위유지비를 받으며 공부하고, 졸업 후 군인으로 바로 취직이 된다는 것은 얼마나 매력적인가. 심지어 정년을 채우면 나오는 군인 연금으로 노후까지 보장되니 입학 하나만으로 해결되는 문제가 너무 많았다.
IMF의 충격파가 온 국민의 멘털을 붕괴시킨 지 채 10년도 되지 않은 시기라 사관학교나 경찰대에 대한 관심이 높고 경쟁률도 높았던 시기였다. 육/해/공 3사는 전교에서 성적으로 꼭대기에 이름 꽤나 올린 학생들이 지원해야 합격 가능성이 높았다. 서울대 가고도 남을 성적인데 육사에 가거나 경찰대에 가는 경우가 꽤 많았다. '군대'라는 안정적인 직장을 청소년들도 자연스럽게 염두에 두고 진로의 하나로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은 병영국가에 살고 있는 얼마 되지 않는 장점 중 하나일까.
그리고 또 하나, 내가 사관학교에 관심을 가진 큰 이유는 생도들이 학교를 직접 방문해 진행한 입학설명회 때문이었다. 그때 태어나서 처음으로 사관생도를 봤다. 너저분한 주름 하나 없는 딱 떨어진 제복에 흐트러짐 없는 자세, 어떤 질문에도 막힘없이 술술 대답하는 자신감에 매료됐다. 나도 저 학교에 입학해 저 제복을 입으면 저런 멋진 사람이 될 거라는 착각에 사로잡혔다. 그날 이후로 인터넷에 사관학교를 검색하고 관련 자료들을 모으기 시작했던 것이다. 실제 합격까지 했으니 막연한 동경이면서 강력한 동경이기도 했다.
이루지 못한 꿈에 대한 미련은 대학 입학 후 서서히 옅어졌는데 그렇게 만들어준 사람들은 고맙게도 주변 남자 동기, 선후배, 직장 동료들이었다. 주변에 또래, 그것도 여자 학생들만 넘쳐나던 학창 시절과 달리 대학에선 남자들이 넘쳐났고 그들은 대부분 예비 군인이거나 한 때 군인이었던 사람들이었다. 그토록 선망하던 사관생도, 장교들도 'ROTC'라는 이름을 달고 내 주위에 포진해있었다. 나는 어느새 '저런 사람도 장교가 되는 나라에서 살고 있구나' 하며 개탄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환상 속의 그대는 현실 속의 그놈이었던 것이다.
결국 군인은 나의 운명이 아니었고 '군대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 운명이었던 모양이다. 내 성격에 군대 안 가길 천만다행임을 깨달은 지금도, 미디어 등에서 장교를 보면 '그때 사관학교를 가서 군인이 됐다면 어땠을까?' 하는, 안 가서 할 수 있는 낭만적인 생각을 하곤 한다.
군인이 아니었던 남자를 만나는 게 더 어려운 나라에서 살고 있지만 그래서 더욱, 참된 군인정신으로 무장된 진짜 군인들이 내가 짐작하는 것보다 많을 거라 믿는 사람 중 한 명 이기도 하다. 군인이 많으니까 좋은 군인도 비례해서 많을 거라는, 굉장히 순진한 발상이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현실은 다르다고 말한다 해도 나는 종교처럼 끝까지 믿음을 고수할 것이다. 군인들이 쿠데타로 정권을 차지하고, 자국민을 학살한 슬픈 역사 속에서도 우리는 지금 또다시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는 나라에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올바른 나라를 만들기 위해 노력한 국민들의 희생이 만든 것이지만, 무엇이 올바르게 나라를 지키는 길인지 알고 있는 참된 군인들이 많은 것도 이유 중 하나이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