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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저녁꽃 Oct 17. 2021

[아빠의 문장 #9] 전화선

의정부 신곡동 아파트에 거처를 정한 후, 쌀 한 가마니를 싣고 옛 직장 선배를 찾아가 인사를 드렸다. 경남 남해가 고향인 선배는 특유의 말투로 "오야 그래, 고생 많았쟈. 딴 생각 말고 사부작사부작 해보자"며 어깨를 두드려줬다.


소도 비빌 언덕이 있어야 한다는데 사람이야 말해 무엇하랴. 힘든 회사 일에도 항상 웃웃음 잃지 않는 선배는 내 인생의 등대나 다름 없다. 누구보다 일찍 출근하고 윗사람을 공경하고 아랫사람을 챙기는 그는 참으로 본받을 점이 많은 분이다. 


다시 안정적인 직장이 생기니 삶의 여유가 찾아왔다. 광화문까지 출근시간이 조금 걸리긴 했지만 즐거운 나날이었다. 아이들은 이제 5살, 4살이 되면서 말이 통하고 대화상대가 됐다. 옆 동에 사는 대학 친구 아들 둘과 우리 딸들은 하루 종일 같이 노느라 정신이 없었다.


한번은 옆집 수민이네 놀러간 큰 아이가 보석을 손에 쥐고 돌아왔다. 뭐냐고 물으니 장난감이라고 했다. 자세히 들여다 보니 결혼 패물인듯 했다. 아마 아이들끼리 무슨 놀이를 하다가 아무 생각 없이 가지고 온 것 같았다. 아내와 나는 깜짝 놀란 마음을 달래고 보석을 다시 되돌려줬다.


또 한번은 퇴근해서 집에 돌아와 보니 전화선이 잘려져 있었다. 둘째가 전화기를 장난감으로 알았는지 가위로 싹뚝 자른 것이다. "왜 그랬냐"고 물으니 둘째는 그냥 울기만 했다. 전화선 절단사건의 동기는 아직까지 정확히 알 길이 없다. 지금도 가끔 그때 일을 물어보긴 하는데, 이제는 그저 웃기만 한다. 참 미스테리다.



전화선


이모 이름이 화선이라서 그랬나

왜 잘랐지, 참말로 알 수가 없네

물어도 그냥 울기만 하더니

지금은 헤헤헤 웃기만 하네

가위 만이 알고 있는 그날의 진실



전화선 절단사건 이후 아내와 내가 웃으면서 놀리면 둘째는 울음을 터뜨렸다. 뭔가 말하지 못할 속내가 있었을 것이다. 소띠니까 무언가를 말하려다 이루지 못하고 되새김질을 하다 화풀이 대상을 찾았으리라. 아니면 유선전화 시대가 가고 무선전화 시대를 알리는 어떤 퍼포먼스였나. 그날의 진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00아, 오늘이 네 생일이다. 그날의 진실을 이제는 말할 수 있지 않겠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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