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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저녁꽃 Oct 27. 2021

[아빠의 문장 #16] 거꾸로

희망으로 맞이한 새천년 첫해가 저물어가고 있었다. 그해 6월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이 있었다. 자유로를 지나는 차 속에서 남과 북이 만나는 소식을 듣고 감격했다. 자유로를 타고 곧장 올라가면 통일의 길이 나올 것만 같았다.


아이들은 그림 동화책에 빠져서 나름대로 열심히 글자를 익히고 있었다. 벽면에는 가나다라마바사가 적힌 커다란 종이와 동물과 나무가 그려진 그림들로 빼곡히 채워졌다. 


재미난 것은 아이들은 문자를 통해 글을 익히는 게 아니라, 그림을 통해 문자를 배워간다. 예를 들어 '아빠'라는 단어가 나오면 그림 속 아빠와 실제 아빠를 번갈아보면서 맞는지 확인하려고 한다. 또 문자에 대한 이해가 완벽하지 않기 때문에 '대충' 문장을 때려잡기도 한다.


이를테면 "다람쥐가 챗바퀴 속을 빙글빙글 돌아요. 어쩌고 저쩌고 ~~해요."라는 문장처럼 접미사가 ~요로 끝나면 나머지 문장들도 전부 ~요로 읽는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이건 글자를 읽는 건지, 그림을 읽는 건지 모르는 사태가 발생한다. 한번은 퇴근해서 문을 열고 들어갔더니 둘째가 열심히 그림동화책을 읽고 있었다. 작은 손가락으로 집어가며 열성적으로 읽기에 속으로 감탄했다.


'아니 이제 갓 세살 짜리가 스스로 한글을 터득하다니.. 흐음, 그 아빠의 그 딸이야' 하면서 가만히 다가갔더니, 글쎄 책을 거꾸로 들고 읽고 있는 것이 아닌가. 


'뭐지, 이 아이의 눈에는 반사렌즈가 달려있는 것인가'


알고 보니 그 이후부터 둘째 아이는 모든 사물을 반대로 바라보는 경향이 생겼다. 거꾸로 책을 읽는 것 뿐만 아니라 반듯이 놓인 신발도 왼발과 오른발을 바꿔 신곤 했다. 


한번은 호기심에 신발을 아예 오른쪽과 왼쪽을 바꿔놓아 봤다. 밖에 나가면서 자세히 관찰을 했더니, 그대로 신어버리는 것이었다. 


'아하, 반듯한 것보다 뭔가 어긋나게 신는 것이 이 아이한테는 더 편한가 보구나'


큰 깨달음을 얻었다. 그 이후로도 아이는 신발을 똑바로 신지 않고 왼발 오른발을 바꿔 신었다. 왜 그랬는지는 아직까지 확인되지 않았다.



거꾸로


그림책에 그려진 물컵을 뒤집어 보고

물이 쏟아지는지 확인해보고 싶은 사람

신발 방향을 바꿔 신어 봄으로써

궤도를 이탈하려는 중력을 실험하고 싶었던 사람

세상이 다 오른쪽이 옳은 쪽이라고 해도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

봅슬레이 선수처럼 처음엔 좌충우돌하다가 

속력이 붙을수록 평형감각을 유지할 수 있는 사람

그래서 타인의 실수에도 너그러운 사람

너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었던 게로구나





내 손으로 품은 자식이지만 때로는 그 속을 모르는 경우가 많다. 신발 거꾸로 신기는 결국 초등학교에 들어갈 때까지 이어졌다. 그런 걸 보면 아빠를 닮은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단정하긴 어렵다. 아무튼 내 자식 심사도 잘 모르는데 어이 타인의 속내를 안다고 할 수 있을까. 그림책을 태연하게 거꾸로 읽던 아이는 현재 미술을 전공했다. 나중에 '거꾸로 갤러리' 이런 거 차리면 좀 괜찮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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