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암 치료는 총 여섯 차수로 진행되었다.
1차는 4주, 이후 2차부터 6차까지는 각각 8주씩이었다. 3차와 5차가 같고, 4차와 6차가 같은 항암이었다. 특히 3차와 5차는 비교적 수월했지만, 2차, 4차, 6차는 말 그대로 지옥이었다.
독성이 워낙 강해 아이가 버텨주는 것만으로도 기적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특히, 2차 항암 내내 아이는 거의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겨우 목숨이 붙어 있을 만큼의 식사만 했다.
밥은 도무지 받지 않아 입에도 못 댔고, 그나마 누룽지와 흰 우유는 먹었다.
매 끼니마다 새로 누룽지를 끓이거나, 여의치 않으면 유기농 누룽지로 대신했다. 그렇게라도 먹어주니 얼마나 고마웠는지 모른다.
몸무게는 눈에 띄게 빠졌고, 나중에는 엉덩이 살마저 없어졌다. 아이를 바라보는 자체가 고문이었다.
항암을 시작하면 곧바로 머리카락이 빠지는 아이들도 있었지만, 셋째는 4차부터 빠지기 시작했다.
누적된 항암이 눈썹과 속눈썹까지 휩쓸고 가면서 얼굴빛은 핏기없이 창백해졌고,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그때 알았다. 눈썹 하나, 속눈썹 하나가 얼굴에 얼마나 큰 영향을 주는지를.
세상에 당연한 것은 없었다. 아이의 고통을 지켜보며, 잃고 나서야 비로소 감사함을 알았다.
2차 항암부터는, 특별한 변수가 없는 한 한 차수의 항암이 끝날 때마다 골수검사를 했다. 피할 수 없는 검사였다. 그 어려운 걸 백혈병 진단 전부터 치료 종결까지, 무려 3년 4개월 동안 수차례나 받았다. 게다가 비보험이라 경제적 부담도 컸다.
2019년 5월 7일 화요일, 4차 항암이 끝나고 골수검사를 위해 새벽같이 집을 나섰다.
새벽 3시부터 금식을 시작했고, 병원 도착 후 바로 채혈을 했다.
오전 7시 10분 전이었다. 9시가 다 되어 채혈 결과가 나왔다. 절대 호중구 수치(ANC)가 170이었다.
500 아래면 감염 위험이 매우 커 골수검사를 진행할 수 없다. 결국 검사 일정이 미뤄졌다.
5월 13일, 수치는 330. 아직도 부족했다.
5월 16일, 드디어 510이 나왔다. 백혈구 수치는 여전히 낮았지만, 더는 미룰 수 없어 검사를 진행했다.
골수검사 후 깨어나 5차 첫 번째 항암이 시작되었고 9일간의 꿀같은 휴식도 주어졌다.
다행히 그 시기 아이의 컨디션은 아주 좋았다.
그동안 못해본 드라이브도 가고, 산책도 하고, 외식도 할 수 있었다.
소소한 하루하루가 봄소풍처럼 소중하고 감사했다.
항암 치료는 정해진 스케줄을 지키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항암제는 주기적으로 투여되어야 남은 암세포를 반복적으로 공격할 수 있고, 누적 효과가 발생하며, 내성도 예방할 수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건, 환자의 상태다.
호중구 수치가 낮거나 부작용이 심하면, 스케줄을 조정해야 한다.
5월 27일, 5차 두 번째 항암을 위해 병원에 갔다.
충분히 쉰 덕분에 컨디션이 최고였다.
백혈구 수치는 살짝 낮았지만, 절대 호중구 수치는 850으로 안정적이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외래 대기실, 셋째의 이름이 떴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진료실 앞 간호사에게 이유를 물었지만 “그냥 조금만 더 기다려 주세요”라는 말뿐이었다.
점점 걱정이 커졌고, 결국 대기실에 우리만 남겨졌다. 그제서야 셋째 이름이 불렸다.
진료실 문을 열자, 주치의 옆에 낯선 사람이 보였다. 그리고 들은 말은, 상상도 못한 것이었다.
5월 16일 골수검사 결과 백혈병 세포가 13%로 뛰었다는 것이다.
완전관해 이후 백혈병 세포가 5% 이상이면 재발로 본다고 했다. 하지만 아이의 컨디션은 쉬는 내내 계속 좋았다.
열도 없었고, 어떠한 재발 증상도 없었다.
믿을 수 없었다.
그런데 교수님은 단호하게 말했다.
“지금 당장 입원해 이식 절차를 밟지 않으면, 애 죽어요.”
차마 입 밖에 낼 수 없는 말을 들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곧이곧대로 믿고 시키는 대로 할 수 없었다.
“입원하지 않겠습니다.”
두려웠지만, 내 아이를 위해 용기를 냈다.
『환자혁명』 조한경 의사의 말이 떠올랐다.
“환자가 주체가 되어 중심에 서지 않으면 그 어떤 병도 고칠 수 없다.”
이 말을 늘 가슴에 새기고 있었기에, 당당하게 내 의사를 밝힐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해도 무섭고 아찔하다. 다시 같은 상황이 온다면 그때처럼 또 용기를 낼 수 있을까?
아는 게 여전히 많지 않다. 전문 지식으로 의사와 맞설 수도 없다.
그렇지만 이식을 위한 입원은 무슨 일이 있어도 막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픈 아이를 돌보면서 무균실에 들어갈 일은 절대로 만들지 않겠다는 게 내 원칙이었다. 병원 입장에서 이식은 최선의 선택이라 하지만 환자입장에서는 최후의 선택일 수도 있다.
입원하는 것은 늪에 빠지는 거라 생각했다. 그다음은 되돌릴 수 없으니까.
그래서 더더욱 막아야 했다.
그게 내 아이를 지키는 나만의 방법이었다.
입원을 계속 거부하자, 교수님은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셋째를 입원 1순위로 지정하셨다.
그리고 다음 날 외래에서 다시 골수검사를 하자고 했다. 그렇게만 정하고 진료실을 나와버렸다.
택시 안에서 간신히 참았던 눈물과 콧물을 쏟아냈다.
나는 아이에게 무리가 되는 걸 알면서도, 골수검사를 선택했다.
재발이 아님을 밝힐 수 있는 건 그게 최선이었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치료 스케줄을 관리하는 전문간호사 선생님께 전화를 걸었다.
그동안 열 한 번 안 났고, 몸 상태도 좋았다며 다시 검토해달라고 정중히 부탁드렸다.
선생님은 악성세포일 가능성이 높다며, 곧 증상이 나타날 거라고 했다.
모든 게 무너져 내리는 기분이었다.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무작정 여기저기에 연락을 해 셋째의 상태를 알리고 도움을 요청했다. 그때 같은 병을 앓는 아이 엄마와 통화를 하다 실마리를 찾았다.
인터넷 카페에서 본 적이 있다며 알려준 그 단어. ‘헤마토곤’.
백혈병 세포와 혼동되는, 회복 중에 나타날 수 있는 세포라고 했다.
순간 이거다, 싶었다.
나는 간호사 선생님께 다시 전화를 걸어, 혹시 헤마토곤일 수도 있으니 한 번만 더 검토해달라고 간곡히 부탁했다.
그러자 선생님은 수치가 13%라서 재발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난 재차 말씀드렸다.
무슨 일이 있어도 재발은 막아야 했다.
포기할 수 없었다.
곧바로 인터넷을 뒤져 헤마토곤에 대해 파고들었다.
헤마토곤(Hematogone)은 백혈구가 되기 전의, 일종의 ‘아기 세포’다.
시간이 지나면서 면역을 담당하는 B세포로 자란다.
이 세포는 성장기 아이들, 혹은 항암 치료 후 회복 중인 사람들에게 흔히 나타난다.
그런데 문제는, 이 헤마토곤이 급성 림프모구성 백혈병(ALL) 세포와 형태가 매우 흡사하다는 것.
겉으로는 구분이 거의 불가능해서, 정밀검사를 거쳐야만 확실하게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셋째는, 정말로 회복 중이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셋째의 몸을 믿었다. 헤마토곤이기를 간절히, 정말 간절히 바랐다.
6월 10일 – 결정적 반전의 날
5월 28일에 했던 검사는 여전히 비슷했지만, 6월 4일에 한 검사에서는 수치가 2.8%로 확 떨어져 있었다.
검사 수치는 명확했다.
병원도 더는 부정할 수 없었다.
아이는 재발한 게 아니었다. 확실히 회복 중이었다.
항암이 중단된 상태에서, 오히려 수치가 좋아지고 있었다. 6월 3일 채혈 결과, 백혈구 8,400, 절대 호중구 수치 5,780. 이외 모든 수치도 정상이었다.
한 달 가까이 아무 약도 쓰지 않은 채 몸이 스스로 회복하고 있었고, 교수님도 “헤마토곤 증가로만 보인다”고 하셨다.
만약 그때 순순히 입원했더라면, 진짜 늪에 빠졌을지도 모른다.
나는 내 아이를 지켜냈다. 그리고 그 경험은, 나를 더 단단하게 만들었다.
아이의 몸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은 엄마다.
나는 내 아이의 몸을 믿었다.
두려움 대신, 믿음을 선택했다. 그리고 그 믿음이 우리를 살려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