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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화. 전쟁에서 피어난 겨울 코트

'옷을 입는 여자'

by 소재수집가
KakaoTalk_20251127_204005468.jpg 2025.11.27_옷을 입는 여자


패션의 역사에서 중요한 변화를 일으킨 두 축이 있다. 하나는 산업혁명이고, 다른 하나는 전쟁이다. 산업혁명은 대량생산을 가능하게 하면서 의복의 민주화를 이루었고, 일상적이고 활동적인 스타일을 확산시켰으며, 기성복을 일상복으로 자리 잡게 만들었다. 옷감 자체가 귀하던 시절에는 의복이 곧 부와 계급을 가르는 시각적 기호였고, 솜씨 좋은 쿠튀리에(coutre)가 제작한 고급 맞춤복이 패션의 거의 전부였다. 하지만 산업혁명 이후 옷감과 의복의 생산 속도는 비약적으로 빨라졌고, 이전에는 상상할 수 없던 가격과 규모의 기성복 시장이 형성되었다.


여기에 전쟁은 또 다른 차원의 변화를 더했다. 특히 전장에 나가야 했던 군인들의 옷은 생존을 위해 기능 그 자체에 집중했고, 효율적인 실루엣과 실질적인 디테일을 중심으로 설계되었다. 가령 군인에게 주머니는 장식이 아닌 생존과 직결되는 장치였다. 이 필요성은 작은 식량과 전투 물품을 수납할 수 있는 카고 포켓과 카고 팬츠를 만들었고, 혹한 속에서도 두꺼운 장갑을 낀 채 물건을 쉽게 넣고 뺄 수 있도록 고안된 머프 포켓, 그리고 장식을 최소화한 실용적 외투 등 전쟁 특유의 '기능적 디자인 언어'를 발전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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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적인 예가 더플코트(duffle coat)와 피 코트(pea coat)다. 이 두 코트는 혹독한 바람과 비, 해무 속에서도 견딜 수 있도록 설계된 군용 외투였으며, 주로 울(wool)을 축융 해 만든 단단한 멜톤(melton) 소재가 사용되었다. 멜톤은 보온성과 방풍성이 뛰어나 해군과 병사들에게 반드시 필요한 생존용 직물이었다.


울 섬유는 그 두께와 길이에 따라 크게 두껍고 짧은 섬유를 이용한 방모(woolen)와 가늘고 긴 소모(worsted)로 나뉜다. 일반적으로 외투는 두텁고 보온성이 뛰어난 방모가 사용되며, 멜톤 역시 대표적인 방모로 만든 소재이다.


그런데 이런 울로 만든 코트들은 오늘날만큼이나 값비싼 옷이었다. 당시 군대에서 병사들의 외투는 대부분 부대에서 공동 보급 형태로 지급되었고, 전쟁이 끝난 뒤 개인이 민간으로 가져오는 일은 현실적으로 쉽지 않았다. 개인 지급률이 높고 값이 저렴한 치노 팬츠가 전후 대량의 재고와 함께 자연스럽게 민간으로 퍼져나간 것과 달리, 울 외투는 재고 자체가 적었고, 제작 비용 역시 높아 개인이 소지한 채 전역하기 어려웠다.


그 결과 더플코트와 피 코트 같은 울 소재의 외투들은 전쟁 직후 곧바로 패션 아이템으로 자리 잡지 못하고, 민간에서 유행으로 확산되기까지 훨씬 더 긴 시간이 필요했다. 여기에 또 하나의 이유가 있다. 어쩌면 이 이유가 더 컸을지도 모르겠다. 더플코트와 피 코트는 장교의 옷이 아니라 병사들과 해군 하사관이 입던 실전복이었다는 점이다. 전쟁 기간 동안 지쳐버린 대중에게 장교 계급이 가진 귀족적 우아함은 매력적인 이미지였지만, 실용성과 노동, 군사적 규율의 성격을 강하게 띤 작업복은 상대적으로 덜 매력적일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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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에서 탄생한 이 울 코트들은 1950년대에 학생과 지식인 층을 중심으로 천천히 자리 잡기 시작했고, 1960년대에 이르러 본격적으로 유행하기 시작했다. 1960년대는 청년문화가 폭발적으로 확장하던 시기로 젊은 세대는 기성세대의 옷차림을 답습하기보다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옷을 해석하며 새로운 정체성을 만들어가던 시대였다. 이때 더플코트와 피 코트 같은 군용 외투는 값이 비교적 저렴했고, 실용적이며, 기존의 정장 중심 패션과는 전혀 다른 실루엣을 지녔다는 점에서 청년들에게 매력적인 선택지가 되었다. 무엇보다 군대와 전쟁이라는 억압적 상징을 벗겨내고, 기능적, 실용적 외투를 자신들의 일상과 스타일 속에 새롭게 정착시키는 방식은 1960년대 청년문화가 지향하던 '나만의 옷을 입는 방식'과 정확히 맞물렸다.


다소 투박해 보이는 두툼한 멜톤 소재의 코트.

코트라는 옷이 전쟁에서 창조된 것은 아니지만, 그 형태와 디테일, 소재와 기능성을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입는 방식으로 재편하고, 더 나아가 사회 전반으로 확산시키는 데 전쟁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사실은 부정하기 어렵다. 내가 입는 코트도 형태는 다르지만, '코트'라는 자체만으로 전쟁이 촉매처럼 작동한 긴 역사는 분명 깃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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