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를 보다 문득 내 삶의 한 부분이 선명하게 스치는 순간이 있습니다. 최근 넷플릭스 드라마 <당신의 맛> 속 '춘승이'라는 인물이 제게는 그랬습니다. 유명 국밥집 아들이지만 가업을 잇는 대신 자신만의 막걸리를 빚고 싶어 하던, 주인공 곁에서 극을 더 풍성하게 만들었던 '조연' 말입니다.
우리는 늘 삶이라는 무대의 주인공이 되길 꿈꿉니다.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화려한 역할에 익숙해져 있죠. 저 역시 그랬습니다. 특히 부모가 되고 나서는 더더욱, 아이의 삶이라는 무대마저 제가 연출하고 싶은 욕심을 냈습니다. 아이가 실패하지 않도록, 더 반짝이는 길을 갈 수 있도록 제가 주인공이 되어 멋진 무대를 꾸며주려 했습니다. 밥 먹는 습관부터 시작해 앞으로 아이가 마주할 모든 길을 미리 닦아주고 싶었습니다.
그러다 한 권의 책에서 발이 묶이고 말았습니다.
누구나 어디에서든 주연이 되려고 합니다. 그러나 소중한 사람을 위해 기꺼이 조연이 되어줄 때 우리는 비로소 귀한 사람을 가슴에 품을 수 있게 됩니다.
<살아갈 날들을 위한 괴테의 시>, 김종원
망치로 머리를 맞은 듯한 충격이었습니다. 저는 아이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아이의 인생 무대에서 주인공 역할을 탐내고 있었던 겁니다. 아이가 스스로 빛을 내도록 돕는 조연이 아니라, 제 방식대로 아이를 이끌어가는 주연 말입니다.
자녀를 키우는 모든 부모님의 마음은 같을 겁니다. 내 아이가 세상 누구보다 행복하고 빛나기를 바라는 마음. 그래서 더 쉬운 길로 이끌어주려 애쓰지만, 그 노력이 아이 스스로 빛날 기회를 빼앗는 그림자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은 쉽게 잊습니다.
아무리 가까운 지인이라고 해도, 말로는 응원한다고 하지만 주인공의 자리까지 타인에게 양보하진 않습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응원은 공허하죠. 자신은 조금도 양보하지 않은 상태로, 상대방이 더 힘을 내서 알아서 하라는 식이기 때문입니다.
<살아갈 날들을 위한 괴테의 시>, 김종원
우리는 아이에게 "널 믿는다", "할 수 있다"고 말하면서 얼마나 많은 자유를 허락했을까요. 실패가 두려워 아이의 날개를 붙잡고 있지는 않았나요. '알아서 잘하라'는 말은 진정한 믿음이 아닐지 모릅니다. 아이의 잠재력을 진심으로 믿는다면, 아이가 스스로 주인공이 되어 무대를 채워나갈 수 있도록 묵묵히 뒤에서 박수쳐주는 것. 그것이 진짜 '조연' 부모의 역할이 아닐까요.
사랑하는 아이를 위해 '조연'이 된다는 것은 아이의 삶에서 멀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가장 가까이에서 아이의 성장을 돕는 든든한 지지자가 되는 일입니다. 아이의 이야기에 진심으로 귀 기울이고, 아이가 스스로 선택하고 책임질 기회를 주는 것입니다. 설령 그 선택이 조금 서툴고 불안해 보여도 믿고 기다려주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상대방이 정말 소중하다면 조금 용기를 내보세요. 자신의 이익은 조금도 생각하지 않고 마치 날아가는 새의 날개를 든든히 받쳐주는 바람처럼, 상대의 성장을 위한 조연이 되는 것입니다.
<살아갈 날들을 위한 괴테의 시>, 김종원
새가 더 높이 날기 위해 바람이 필요하듯, 아이가 더 큰 꿈을 펼치기 위해서는 부모라는 바람이 필요합니다. 바람은 새의 비행을 대신하지 않습니다. 그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자신의 힘으로 날아오를 수 있도록 힘을 실어줄 뿐입니다.
우리 아이들은 이미 각자의 무대에서 유일한 주인공입니다. 부모의 역할은 새로운 주인공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아이가 가진 빛을 온전히 발할 수 있도록 돕는 것입니다. 주인공 자리를 양보하는 것은 패배가 아닙니다. 내가 빛나는 것보다 더 소중한 존재가 빛나도록 돕는 일, 그것이야말로 세상 가장 깊은 사랑의 표현일 겁니다.
오늘, 아이의 가장 헌신적인 조연이자 가장 믿음직한 팬이 되어주기로 다짐해봅니다. 부모의 따뜻한 지지라는 바람을 타고, 아이는 세상 가장 멋진 주인공으로 성장해나갈 것입니다.
사랑하는 누군가를 위해 기꺼이 주인공의 자리를 양보하고 자신은 조연으로 사는 것.
<살아갈 날들을 위한 괴테의 시>, 김종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