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진의 기억

by 기차는 달려가고

바닷가 정동진은 드라마 '모래시계'로 대중에게 널리 알려졌는데.

그보다 훨씬 전에도 드라마에 나온 적이 있었다.

아마 30년쯤 전이던가,

미스터리가 가미된 주말드라마에 정동진이 배경으로 나왔었다.

언뜻 스치면서 본 드라마 속의 특이한 지명과 파아란 바다가 강렬한 인상을 주어서,

드라마가 끝나고 나는 혼자 정동진을 찾아갔었다.

아마 강릉에 놀러 갔다가 정동진을 들렀겠지.



내가 보았던 정동진은 평범한 바닷가 마을이었다.

작은 기차역이 있고, 가게가 있고, 밭이 있고, 집들이 있는.

강릉에서 기차를 타고 바다를 옆에 두고 남쪽으로 몇 개 역을 지나 정동진 역에 닿았다.


마을은 조용했다.

80년 대에는 어디가 드라마에 나왔다고 해서 사람들이 몰리는 때가 아니었다.

촬영 팀이 휩쓸고 간 기억은 바닷가 모래밭에 그렸던 사랑의 표시처럼 파도에 지워지고.

마을은 고요히 제 발걸음으로 언제나와 같은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고요했다, 평범했다, 푸른 바다가 있었다,

말고는 내가 어디서 밥을 먹었는지?

언제 되돌아갔는지,

일정에 관한 기억이 없다.

두 가지 일만 머리에 남았다.



슬렁슬렁 마을을 구경했다.

여러 집들이 모여 있었고 그 사이에 골목이 있었다.

그리고 다시 밭, 공터, 집들.

번듯한 집도 있었지만 상당히 허름한,

기억되기에는 꼭 흙벽의 초가집 같은

-그 지붕이 슬레이트일 수도 있지만- 오두막도 있었다.


바닷가에는 철조망이 둘러쳐 있었다.

그리고 철조망 어느 지점에는 구멍이 뚫려 있어 마을 사람들이 그 출입구를 드나들며 모래밭에서 어망 손질 같은 일을 하고 있었다.

바다를 좀 더 가까이서 보기 위해 내가 다가가는 순간,

무장한 군인이 나타나 고함을 질렀다.

얼른 뒤로 후퇴.

바닷가로 갈 의도는 아니었습니다만.

낯선 젊은 여자가 바닷가 철조망으로 뚜벅뚜벅 다가오니 보초를 서던 군인들이 먼저 놀란 것 같았다.

그 시절 동해안은 거의 전구간 철조망을 치고 군부대가 경계하는 삼엄한 군사 지역이었다.



그 무렵 나는 여행을 가면 친구에게 엽서를 보내곤 했었다.

아마 동네에 우체국이 없었겠지.

엽서를 찾는 내게 농협에 가라고 했다.

농협 공판장? 그런 이름이 붙은 약간 큰 가게에서 여러 생필품을 팔고 있었다.

유니폼을 입은 여직원은 내게 엽서를 주면서 혼자 여행 온 거냐고 물었다.

마주 보고 잠깐 이야기를 나누었던 것 같다.


나보다 어려 보이던 이십 대 초반의 그녀는 내게 어디서 왔는지,

혼자 여행 다니면 무섭지 않은지 묻더니.

자기는 이 동네를 떠나 도시로 가고 싶다고.

늘 여기 있다 보니 바다가 좋은지도 모르겠다고,

동경을 가득 담은 눈으로 저쪽 허공을 바라보았다.



한참 뒤 정동진은 유명해졌고 번화해졌다.

내 기억과 딴판인 정동진의 현재 풍경을 사진으로 대할 때,

그때 농협 여직원을 떠올린다.

도시로 떠났을까?

아니면 그대로 정동진에 있다가 변화의 흐름에 올라탔을까?


젊음의 피는 우리를 뒤흔들어 어디론가 먼 곳으로 떠나게 한다.

돌아다니게 하고,

헤매게 하고,

탐험하게 한다.

비록 지쳐서 패잔병으로 돌아오게 되더라도.

일단 떠나자, 그게 청춘의 사명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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