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에서 한 일주일인가, 아주 바빴던 적이 있었다.
밀라노와 피렌체를 오가며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서울을 떠날 때부터 기분은 바닥이었다.
슬픔을 느낄 만한 일이 있었는데,
그로 인해 나의 한계를 알았다고 할까.
상상과 달리 실제 내가 받아들일 수 있는 현실적인 역량이 상당히 협소하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되었다.
하여간 이탈리아에서 나는 무척 바쁘게 지냈는데 의욕이 있어서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만나야 했던 사람들은 나와 너무나 다른 타입이어서
서로 헛웃음으로 어색한 분위기를 가렸다.
건강 상태도 좋지 않았다.
피로하고 무기력했다.
여행의 목적이 삐그덕거리는 느낌을 받았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분명하게는 몰랐었다.
피렌체를 떠나 파리에 왔다.
일정을 짤 때 이탈리아에서 돌아오는 길에 파리에 사흘 동안 머물기로 했었다.
그때야 일을 잘 마치고 홀가분하게 파리 여행을 즐길 줄 알았겠지.
피로에 더해 내가 제대로 한 건가, 개운치 않은 기분이 있었다.
이렇게 간단히 처리할 일이 아닐 텐데 뭔가 놓친 것이 아닐까, 싶었지만.
곰곰이 따질 기력이 없었다.
침울하고 허탈한 기분으로,
비행기를 타고 공항에서 짐을 찾고 호텔로 오는 지루한 시간을 지나면서 몸 상태는 점점 나빠졌다.
예약해둔 파리 시내 호텔에 도착했을 때는 거의 빈사 지경.
방에 들어오자 겉옷을 벗고 침대에 누웠고 그대로 잠 속으로 빠져들어갔다.
잠깐 정신이 들었을 때는 캄캄한 밤이었고 굉장히 추웠다.
방에 들어오면서 틀었던 CNN 방송에서는 왕, 왕, 왕, 다급한 소음이 반복되고 있었다.
의식이 분명하지 않아 여전히 주변이 확실히 분별되지 않았던 나는,
그저 이불을 돌돌 말고 몸을 웅크리면서
아아, 왜 이렇게 춥지?
TV 소리가 시끄럽구나, 하면서 다시 잠의 우물 속으로.
추워서 다시 깼다.
추워.
아까보다는 의식이 좀 명료해져서
어둠 속에서 가만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창문이 열려 있었다.
늦은 가을의 찬 공기가 방으로 사정없이 밀려들고 있었다.
CNN 방송에서는 여전히 같은 뉴스를 반복해서 내보내는 중이었다.
짧은 영상이 되풀이되고 있었다.
어, 이스라엘의 라빈 총리가 피격되었다고?
이불을 더 돌돌 말고 몸을 더 웅크렸다.
몸을 일으켜 몇 걸음 거리의 창문을 닫아 찬 공기를 막을 생각도,
시끄럽다면서 TV를 끌 의욕도 없이 나는 다시 비몽사몽으로 혼미한 의식 속으로 빠져 들었다.
완전히 정신이 들었을 때는 늦은 오후였다.
고개를 털고 방을 둘러보았다.
가까이 있는 TV를 먼저 끄고,
몸을 일으켜 창가로 갔다.
창밖으로 파리 번화가가 펼쳐져 있었다.
호텔 방 아래로 다닥다닥 붉은 지붕들,
반듯반듯 구획된 거리에는 누런 석조 건물들.
곧게 뻗은 길에, 가로수는 이파리들을 떨구고.
가을 하늘은 파랬다.
좋은 계절이었다.
한참을 창가에서 바깥을 바라보았다.
따듯하게 샤워를 하고 나오니까 추워하면서 웅크리고 잔 몸이 풀리는 느낌이었다.
가을의 파리는 어두워져 있었다.
하루 넘게 아무것도 먹지 않은 배에서 허기가 느껴졌다.
나는 호텔을 나가 근방에 있던 take-out 중국음식점과 kiosk를 들러 음식과 음료수를 사서 방으로 돌아왔다.
CNN에서 전해주는 라빈 총리 피살 뉴스를 보면서 천천히 저녁을 먹었다.
다음날, 이른 오후에 호텔에서 공항 가는 버스에 올라야 했던 나는 제법 가뿐해진 몸으로,
아침에 호텔을 나와 개선문까지 걸었다.
아마 공원도 좀 걸었겠지.
날씨가 좋았다.
거리에는 사람들이 많았다.
관광객들이 줄을 선 사치품 가게들을 지나
백화점에 들어가 관심이 가지 않는 물건들을 대충 훑어보았다.
뭐라도 사야 할 것 같은 기분에 똑같은 잠옷을 흰색과 검은색.
색깔만 다르게 두 개를 샀다.
파리에서 하필이면 미국 브랜드 제품이라니.
거리를 헤매다가 맛있을 것 같은 스테이크 집을 찾아 들어갔다.
이른 점심시간이어서 그런지 관록이 보이는 고풍스러운 가게에는 손님이 없었는데.
짙게 화장한, 검정 옷으로 큰 체격을 감싼 여주인이 직접 가져다주는 음식을 받았다.
작은 고기 덩어리, 굵은 감자튀김에 빵, 머스터드.
딱 그렇게만 놓인 점심 식사는 상당히 만족스러웠다.
맛있게 먹었다는 내 인사에 여주인은 큰 몸을 흔들면서 굵은 주름이 펴지도록 활짝 웃었다.
그때 나는 세상에 발을 못 붙이고 둥둥 떠서 현실인지 꿈속인지를 벙벙 돌아다녔고.
지금도 여전히 어디에 내 두 발을 디뎌야 할지 모른다.
라빈 총리 피격으로 도무지 날짜를 잊을 수 없는 그 가을 파리에서 나는,
잠에 빠져서 이틀을 보내고 햇빛이 쏟아지는 한 나절을 보냈던 파리에서.
슬픔이 가시지 않는 기분으로,
이브 몽땅의 노래 '고엽' 같은 늦은 가을의 파리 번화가를 멍하니 떠돌아다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