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에 많이 다녔다.
여행을 자주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절에 가게 되었다.
우리나라의 유적지도 상당수가 절이고,
또 볼 만한 경관에는 거의 사찰이 있지 않나.
아름다운 절을 많이 보았다.
절집 자체에도 아름다움이 있지만 절이 안겨있는 풍광이, 계절이 참 아름답다.
종종, 절에는 감각이 남달랐던 스님들의 자취가 남아있다.
절이 풍경에 담겨있던 지금까지의 긴 시간 동안,
세속의 다툼을 떠나 더 깊은 것, 더 높은 차원에 헌신했던 분들이 계셨을 테니.
아름다운 절에서, 그 좋은 풍경을 사랑하며
끝없이 존재를 닦았던 그윽한 마음이,
절 곳곳에 아름다운 형상으로 아로새겨져 있다.
살아가면서 크고 작은 어려움을 겪는다.
생계를 이어가는 일은 늘 걱정이고 인간관계는 버겁다.
밥을 구하고, 자식을 키워내고, 사람들과 부대끼는 하루하루.
인간사의 모든 것이 도무지 쉬운 게 없지.
아침에 해가 떠오르고, 살랑살랑 바람이 불어오고, 나무가 잎을 틔우고, 꽃이 피어나는.
고개를 들면 아름다움이 당신을 둘러싸고 있지만.
마음이 지옥인 데야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살아가는 것의 무서움을 알고 근심과 두려움에 짓눌려,
작고 작은 '이 몸', 크고 큰 당신께 의탁합니다.
나의 힘만으로는 세상이 살아지지 않습니다.
어느 순간, 그렇게 항복해버린다.
절에는,
오랫동안 사람들이 간구한 절절한 기도가 켜켜이 쌓여있다.
발길이 들어선 뜰에,
손을 모았던 석탑에,
몸을 낮췄던 대웅전에,
눈물이 흘렀던 산신각에,
절실한 갈구가 강물처럼 흘렀던 부처님이 새겨진 바위 앞에서.
할머니의 할머니, 그 할머니의 할머니도 산길을 걸어 절을 올리며 간곡했던 기도가.
울먹울먹 무겁게 내려앉아 있다.
기쁘고 즐거울 때야 굳이 절을 찾지 않지.
산해진미에 비단옷으로 재미나게 살았다.
모든 길이 막히고, 눈앞에서 문이 닫힐 때.
비로소 고통을 알고 절망을 배운다.
슬픔과 막막함은 나를 흔들고
도무지 빛이 안 보이는 암흑 속에서.
외로운 발길은 터벅터벅, 풋풋한 봄날.
나무가 있고 풀이 자라는 산으로 향하지.
당신에게 엎드려 제발 살려달라, 흐느끼는 것이다.
요새는 도시에 바쁜 사람들이 모여 사니,
일부러 산에 있는 절을 찾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도시에 절이 지어지더니 규모가 매우 커졌다.
시멘트로 범벅을 한 서울의 매우 큰 절 중 하나에 친척이 어머니와 나를 불렀다.
외환위기로 집안에 우환이 들어온 얼마 뒤였다.
불교에 이해가 없었던 우리 모녀는 아무 준비 없이,
편한 옷차림 말고는 빈손으로 친척을 따라나섰다.
마음 한구석으로는 귀찮기도 했지만,
우리를 위해 삼천배를 하겠다는데 모른다, 할 수는 없었다.
절에서 절을 해보지 않았던 우리 모녀는 띄엄띄엄 백 번, 이백 번쯤이나 절을 올리고 더는 못하겠다, 손을 놓았다.
공간이 넓긴 했는데 수백 명은 되어 보이는 사람들이 밤새 절을 올리고 있었다.
아무 말 없이, 묵묵히.
수건으로 땀을 닦으며 그저 절만 하고 있었다.
낯설었다.
그런데 몇 시간을 보고 있자니 마음에 잔잔한 울림이 일었다.
초등학생쯤 되어 보이는 두 아이와 부모가 밤새 절을 올리고 있었다.
무엇을 위해 간절히 절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분명히 몸을 납작 낮춰 수없이 절을 올리는 부모를 보고,
자신도 밤새 절을 해본 경험이 아이들의 마음에 남기는 흔적은 있을 것이었다.
결코 나쁘지는 않을.
그리고 한참 뒤 나는 성북동 길상사에서 있었던 삼천배 행사에 혼자 참가했다.
젊은이들이 주로 참석했던 그 행사에 나는 불경도, 기도문도 모르니.
벙어리처럼 침묵한 채 헉헉 숨을 몰아쉬면서 절을 몇 번 따라 하다가는.
쉬는 시간마다 간식은 꼬박꼬박 챙겨 먹으면서.
다 합해도 삼백 배도 절을 못한 밤이었는데.
그래도 시간을 마치니 마음에 흡족함이 고였었다.
행사를 마치고 날이 밝기 전 스님들이 절 마당을 도는,
새벽 예불을 시작하는 모습을 뒤로하고 나는 절을 떠났다.
캄캄한 성북동 길을 걸어 내려오면서 삼천 배의 의미란,
금으로 도금한 불상에 절을 하라는 건 아닐 것이다.
절은,
나의 몸을 낮추어 불쑥불쑥 튀어 오르려는 경솔함과 우쭐거림을 경계하고.
기대보다는 좌절이 많고,
희망보다는 실망이 짙으며,
성취보다는 자포자기하기 쉬운 세상살이에서.
그래도 힘을 내어 다시 몸을 일으켜보자는 따스한 다독임이 아닐까,
하는 나름대로의 생각이 들었다.
다시 밤새워 간절하게 절을 해보고 싶다.
위태한 세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