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기차는 달려가고 May 27. 2022

사진집, <나는 이스트런던에서...>

끄적끄적

 사진집 <나는 이스트런던에서 86 1/2 년을 살았다>    

조지프 마코비치 글, 마틴 어스본 사진,

이주민 옮김, 출판사 클.


# 이 사진집은  번호가 표기되지 않아,

이 글에도 쪽 번호 표시 없이 사진집의 글과 사진을 인용합니다.



우연히 도서관 서가에서 찾은 사진집이었다.

소설에 자주 등장하던 이스트런던이라는 지역 이름이 먼저 나의 호기심을 끌었다.


이스트런던에 스튜디오를 마련한 한 사진가가 창밖을 내려다본다.

때는 2007년 여름, 한낮.

사진가와 노인의 인연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비닐봉지를 손에 들고, 훨씬 큰 사이즈의 블레이즈를 벗어 어깨에 걸친 채, 천천히 발을 끌며 혹스턴 광장으로 걸어가서는, 네온 색 옷을 입고 햇볕을 쬐며 빈둥거리는 젊은이들과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는 광장의 사람들 속에서 대번에 눈에 띄어서, 나는 그가 길을 잃었나, 홈리스인가, 아니면 좀 정신이 이상한 사람인가 싶었다. 저 비닐봉지에는 분명히 술이 들어 있겠지? 나는 카메라를 들고 얼른 내려갔다. 그의 사진을 찍으면 공모전에 낼 수 있겠다는 심산으로.

  내 예상은 빗나갔다. 이 노인은 우리 젊은 뜨내기보다 이 지역에 더 깊게 뿌리를 두고 있었고, 우리 모두보다 더 멀쩡했다. 그는 80년 동안, 우리는 상상이나 해봤을 법한 문화적 격변기를 목격해왔다.... 그의 비닐봉지에는 그가 늘 가지고 다니던 것들이 들어 있었다. 오렌지주스 작은 팩 한 개. 나는 그가 광장에 서 있는 사진을 찍었다. 좋은 컷은 아니었다. 그는 나무토막처럼 경직되어서는 카메라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이걸로는 공모전에서 절대로 상을 받을 것 같지 않았다. 그의 이름은 조지프 마코비치였다.



 노인은,

1927년 1월 1일, 이스트런던의 올드 스트리트 교차로 바로 옆에서 태어나,

단 한 번도 영국을 떠난 적 없이 평생을 이곳에서 살아온 사람이었다.

코크니라 불리는 런던 서민들이 살아가는 동네 이스트런던 지역,

그들만의 독특한 억양과 단어들을 가진 어가 있을 정도로 짙은 지역적 특색을 가진 동네였다.


런던을 배경으로 하는 소설 속에서 이스트런던은,

밥벌이를 찾아 시골에서 올라온 촌뜨기들이 싸구려 방을 찾고 일거리를 구하며.

으슥하고 누추한 집들에는 경찰에 쫓기는 범죄자가 숨어든다.

고달픈 노동과 막막한 살림살이에 지친 사람들은 거리에서 싸우거나 내기를 하거나.

때로는 펍에서 맥주를 들이키며 피시 앤 칩스를 먹고.

칠지만 서로 사랑하고 도와가며 살아가는 삶의 터전이었다.

노인은 동네의 변화를 이렇게 말한다.

  

내가 어렸을 때는 모두가 코크니였지요. 늘 비슷비슷한 얼굴들만 마주치는 것 같았어요. 이제는 모두 섞여 있네요. 나는 그게 좋아요. 호주 사람, 미국 사람, 유대인, 흑인, 브라질 사람, 독일 사람들이 사방에 있어요.     



유난히 작고 마른 몸에, 카타르염을 앓으며.

여자를 사귄 적 없이 어머니를 모시고 살았던 노인은,

오랫동안 짐가방을 만드는 공장에서 리벳 박는 일을 했다.

세상사에 호기심이 많아서 도서관을 다니고,

커피숍에 들르며,

낯선 사람들과도 허물없이 이야기를 나누는 이 노인에 대해 사진가는,


조지프는 조용한 삶을 살았다. 하지만 그것은 풍요로운 삶이었다. 그는 세계를 여행하지 않았지만, 마음속에서 오래 여행을 했다. 그는 말년을 혼자 살았지만, 타인에게 깊은 관심이 있었다. 그는 약했다. 하지만 정말로 활기가 넘쳤다. 그에게서 배운 수많은 것들 중에서, 다른 어떤 것보다 이것 하나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다른 사람들을 있는 그대로 볼 것, 그가 매일매일 이스트런던을 어슬렁거리며 했던 것처럼, 낯선 사람을 맑은 눈으로 직접 만나려면, 우리 대부분이 갖지 못한, 하지만 우리 모두가 가지려고 노력해야 하는 일정 수준의 열린 마음이 필요하다.  



세상일에 울어봤자 소용없어요. 그렇지 않아요? 아무리 슬퍼해도 사람들은 알아주지 않아요. 가장 좋은 건 그냥 계속 걷는 겁니다.     


낡고 커다란 겉옷과 바지를 입고 역시 낡았지만 깔끔하게 손질된 구두를 신고 헐렁한 바지를 벨트로 묶은 이 노인은,

예의 바르고 친절한 자세를 강조한다.

속상할 때는 혼자 한없이 걸으면서 마음을 달랬겠구나, 싶은  이 노인은,

마음에 앙금 같은 건 남기지 않고 자신에게 허락된 지극히 적은 것을 긍정하면서 맑은 영혼으로 살아간다.


내가 가진 것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열쇠들이에요. 그리고 버스 카드, 그리고 벨트. 담배 한 개비나 1파운드 동전을 잃어버렸다면, 다시 채워 넣으면 돼요. 하지만 열쇠를 잃어버렸다면, 집 밖에 있어야 하잖아요. 그리고 버스 카드가 없으면 집에 갈 수도 없어요. 그리고 바지가 흘러내려도 버스에 태워주지 않을 거예요. 그러니까 이건 중요한 물건들이지요.


노인을 찍은 사진들과 노인의 말을 담은 책이 잘 팔리게 된 덕분에 사진가는 노인에게,


조지프에게 전화기 두 대, DVD 플레이어, 새 디지털 TV, 디지털 라디오, 코트 두 벌, 속옷 한 묶음, 겨울 양말 몇 켤레, 새 벨트, 그리고 결정적으로 그가 이스트런던을 오래 걸을 수 있게 해 준 클라크 신발 몇 켤레를 사줄 수 있게 되었다.



사진가를 만난 .

이야기를 나누고 사진을 찍은 뒤 노인의 육체는 급속히 무너져간다.

아니 어쩌면 무너져가는 육신을 겨우 지탱하고 있다가 자신을 세상에 보인 뒤 제 갈 길을 간 것이 아닐까?

그러니까 신이 있다면,

신은 착하게 살아온 그를 불러들이기 전에 이 순진무구한 존재를 세상에 보여주고 싶었는지 모르겠다.



 인생은 어렵다.

무엇이 잘 사는 것일까?


분명한 사실은 탐욕으로 이글거리면서 거짓과 모략으로 타인을 짓밟으며 황금의 탑을 쌓은 자들은 이 노인의 작은 삶을 비웃겠지만.

그들의 행선지는 분명히 지옥천국으로 갈라지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진가는 카메라의 렌즈로만 작업하지 않는다.

먼저 마음의 눈이 확실해야 함.

매거진의 이전글 성공의 방식, 실패의 요인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