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안함, 애쓰지 않아도 되는 이유

마음이 지나간 자리 20화

by 전태영

스무 번째 감정, 편안함

평온함은 외부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허락할 때 찾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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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 문경새재를 다녀왔다. 한겨울의 산은 말수가 적었다. 나뭇잎을 모두 내려놓은 은행나무 숲은 더 이상 무엇을 꾸미려 하지 않았고, 그 담백함이 오히려 마음을 느슨하게 만들었다. 얼어붙은 땅 위에 남은 낙엽을 밟을 때마다 낮고 잔잔한 소리가 났다. 그 소리는 생각을 자극하기보다는, 괜히 마음을 놓이게 했다. 그렇게 걷다 문득 고개를 들었을 때, 멀리 주흘산이 보였다.


가까이서 본 산은 웅장했지만, 위압적이지 않았다. 한겨울의 산은 힘을 주지 않고도 충분히 크고 단단했다. 그 모습 앞에 서 있으니, 굳이 애쓰지 않아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산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저 그 자리에 있을 뿐이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마음이 편안해진다. 웅장함 속의 과시 없음, 고요함 속의 여유, 그리고 묵묵함이 주는 신뢰. 편안함이란 어쩌면, 이렇게 설명하지 않아도 전해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일까. 나는 산을 오르면 늘 마음이 가라앉는다. 겨울 산길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은 많지 않지만, 그만큼 부담도 없다. 말을 건네지 않아도 충분하고, 인사를 하지 않아도 어색하지 않다. 각자 자신의 호흡으로 걷고, 각자의 속도로 쉰다. 그 거리감마저도 이상하게 편안하다. 정상에 오르면 바람은 차갑지만, 마음은 오히려 부드러워진다. 더 가지려는 마음도, 증명하려는 생각도 잠시 멈춘다. 아래를 내려다보며 무엇을 이루었는지를 세기보다, 지금 이 자리에 서 있는 나 자신을 그대로 받아들이게 된다. 높은 곳에서 내려다본다고 해서 우쭐해지기보다는, 괜히 힘을 빼게 되는 순간이다.


산은 늘 그 자리에 있다. 해가 바뀌어도, 계절이 깊어져도 달라지지 않는다. 그래서일까. 산을 오를 때마다 내 마음은 조금씩 편안해진다. 무언가를 잘 해내서가 아니라,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감각 덕분에.


가끔은 이렇게 한겨울의 산을 올라보자.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달라질 테니까.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편안해질 수 있다는 걸, 산은 늘 조용히 알려준다.

화, 금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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