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에게 보내는 두번째 편지
맞아. 시간이 훌쩍지난 나의 과거를 돌아본다는 건 나의 초심을 마주할 수 있는 거더라. 딸이 아빠의 초임 시절에 대해 물어봐주고, 궁금하다 해줘서 덕분에 나의 첫 시작을 돌아볼 수 있었어.
하나씩 돌이켜 생각하다보니 첫 수업을 했던 순간까지 돌아보게 되었는데, 이번엔 그 때의 추억을 나눠줄게.
나는 어떤 모습으로 어떤 마음으로 수업을 했을까?
지금 생각해 보니 아빠의 첫 수업은 교사라는 직업이 나한테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에 잠시 혼란을 겪을 때였어. 아빠가 원래 교대보다 경영학 쪽으로 가길 원했던 거 알아? 고등학교 때까지만해도 소심한 성격에 누군가 앞에 나선다는 걸 두려워했는데도 불구하고 친구들 사이에서는 항상 리더로 활동을 했어. 거기에 공부까지 잘하는. 그래서 대학교 원서 낼 때 경영학 쪽으로 대학을 선택했던거야. 그런데 할아버지가 동네 사랑방에 가서 알게된 마을 초등학교 교장 선생님하고 친구였는데 아들이 공부도 좀 한다고 하니 "교대를 가면 돈이 안든다"는 말을 듣고 온거야. 아빠가 고3이 될 때까지만해도 '교대'는 내 꿈 어디에도 없던 곳이었거든? 그런데 아빠가 장남이기도 했기 때문에 집안의 경제적인 이유를 아예 모른척 할 수가 없더라. 아빠가 공부를 정말 잘해서 담임 선생님도 교대가기 너무 아깝다고. 그 당시 경희대학교, 외국어대학교, 경북대학교 등등 일곱개 원서를 썼었는데 여기에 가지 않을거면 차라리 재수를 하라고 권하셨어. 그땐 지금처럼 인터넷으로 원서를 접수하던 게 아니라 담임선생님이 원서를 써주면 그 대학교에 직접 가서 마감 시간인 오후 6시까지 제출을 해야했거든. 그런데 정말 원서를 내기 싫어서 교대 앞 까지 가서 6시에 마감인데 5시 50분에 냈어. 그 원서도 담임 선생님이 아닌 옆 반 3학년 10반 선생님이 원서를 써줬지.
그렇게 교대를 나오고, 선생님이 되었으니 아빠가 얼마나 혼란스러웠을지 예상이 조금 가려나. 그래도 첫 수업은 내 마음 속에 있는 혼란스러움 보다는 용기를 내서 한 수업이라 보람은 느꼈던 것 같아. 그 당시 아빠의 첫 수업 모습이 담긴 귀한 사진을 보여줄게. 칠판이 보이고 40여명의 학생들이 오밀조밀 앉아서 수업하는 모습이야. 아이들 모습 봐봐. 수업에 집중하는 거 보이지. (아빠가 그래도 수업을 제대로 한 거 같아 뿌듯하네) 이 때는 예체능 교과 전담 교사도 따로 없어서 아빠가 음악 수업도 했었거든? 음악에 재능이 별로 없는 나였기에 음악 수업 시간만 되면 부담이 되었어. 오르간으로 해당 곡을 연주를 하고 아이들이 따라 부르기를 했는데 자꾸만 중간에 연주가 틀리는 거야. 교사가 시범을 보이는 걸 범주, 범창이라고 하는데 이 역시 자신이 없었어. 다른 교과보다도 몇 배의 교재연구와 준비를 해서 겨우 범창을 하고 범주를 했지. 매번 음악 수업시간만 되면 진땀을 뺀 경험이 있어.
그래도 아빠는 초임 시절 잠시 빼고는 후회한 적이 한번도 없어.
어설픈 범주와 범창에도 큰 소리로 따라 불러주는 아이들이 있었고, 경영학과는 못 갔지만 한 반을 이끄는 담임 선생님으로 나름의 경영도 해왔다고 생각해. 좋은 수업이 무엇인지, 좋은 반은 어떻게 하면 이끌어갈 수 있는지에 대한 고민도 치열하게 하면서 말이야.
교사라는 직업을 포기하고 싶었던 교대 합격 후, 초임 발령 받은 후. 두 번의 경우를 돌이켜 생각해보면 너무 아찔해. 지금의 내 모습은 딱 교직이 천직이라는 것.
너무 감사한 일이지.
지금도 그 마음은 변함없어.
언젠가 누가 이런 질문을 하더구나.
하루 중 언제 기분이 가장 좋았습니까?
수업 준비를 열심히 해서 1시간 수업을 참 잘했다는 느낌이 왔을 때라고 대답한 적이 있어. 수업을 마치고 나올 때 아이들이 환하게 웃는 모습을 보면 '아 내가 정말 수업을 잘 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거든. 그럴 땐 나도 모르게 기분이 좋더라. 사진 속 초임 때 제자들이 나이 50세가 되었는데 지금도 가끔 제자들한테 연락이 오면 너무 행복하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