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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 내 이름 세글자로 세상에 서는 것

아빠에게 보내는 열 한 번째 답장

by 전태영

아빠, 정신없이 흘러간 1월을 보내고 나니 어느새 2월이 되었어. 새해가 시작될 때만 해도 막연하기만 했던 계획들이 이제 하나씩 구체화되면서 무언가 제대로 해봐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돼. 하고 싶은 것도 많고, 때로는 불안하기도 하지만, 아빠의 응원 덕분에 용기를 내어 한 걸음씩 나아가려고 해.


작년 한 해는 회사를 나와 프리랜서로 살아가면서 프로젝트를 맡아 프로그램을 제작했잖아. 소속된 회사 없이 PD로서 프로그램을 제작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많았어. 지금까지는 회사에 소속된 직원이었으니 회사의 이름값 덕분에 섭외도 되고, 연출도 하고, 제작도 할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생각했거든. 그래서 처음엔 서서히 몰려오는 불안감에 선뜻 내 프로그램에 나와달라고 섭외를 제안하기도 어려웠어.


“지금은 어디에서 일하세요?”

이 질문이 날아올까 봐 무서웠어. 멋진 방송사도 많고, 잘나가는 제작사도 많은데 그중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았다는 사실이 혼자 두려웠나 봐. 하지만 용기를 내어 처음 연락한 소속사 담당자는 너무나 반갑게 인사해 주시더라.


“오! PD님! 요즘은 어떤 프로그램 하세요?”

내가 어디 소속인지보다도 내가 새롭게 만드는 프로그램이 어떤 기획 의도를 가지고 있는지, 촬영 시간은 얼마나 소요되는지, 업로드 날짜는 언제쯤 가능한지를 물어보시더라고. 지레 겁먹은 내 자신이 부끄러울 정도로 담당자분들은 내가 만드는 ‘프로그램’ 그 자체에 관심을 가져주셨어. 그제야 알았어. 내가 속한 회사가 중요한 게 아니라 내가 만들어내는 프로그램이 어떤 의미를 담아내는지가 훨씬 중요하구나. 그리고 새롭게 깨달은 또 하나! PD로 살면서 9년 동안 만들어왔던 많은 콘텐츠들은 시간 속에 사라지는 게 아니라 나 자신의 이야기로 차곡차곡 쌓이고 있었구나 하는 것. 회사에서 기획부터 섭외, 현장 진행, 촬영, 연출, 편집, 업로드까지 모든 과정을 혼자 진행해야 할 때는 눈물이 찔끔 날 정도로 힘들기도 했거든. 그런데 그런 힘든 시간들이 모두 쌓여서 회사 밖 세상에서 프로그램을 제작할 때 어떤 과정을 마주해도 해낼 수 있겠더라! 섭외? 해보지 뭐! 촬영? 그때 이렇게 했으니 이번엔 카메라 몇 대 필요하겠네! 편집은 이런 식으로 구성하면 좋겠어! 경험이 없었다면 막연했을 일들을 뚝딱 해낼 때의 쾌감은 정말 최고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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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 이제 아빠도 한 발 한 발 교직 생활을 정리하는 길을 걸어갈 텐데, 그 과정 속에서 내가 느꼈던 감정들을 느낄 거라고 생각해. ‘선생님’, ‘교감선생님’, ‘교장선생님’, ‘장학사님’, ‘교육장님’. 아빠 이름 세 글자 뒤에 붙었던 많은 호칭들 없이 세상에 나왔을 때, 어떤 일을 할 수 있을까 걱정되기도 할 거야. 하지만 아빠의 지난 세월은 아빠 이름 뒤에 붙었던 호칭들과는 상관없이 삶 속에 차곡차곡 쌓여있고, 어떤 일을 하든 그 이야기는 힘이 있을 거라고 믿어.


나는 올해에는 정말 새로운 도전을 많이 해보고 싶어. 9년 동안의 제작 경험을 잘 살려서 아이들의 진로에 대한 콘텐츠도 만들어보고 싶고, 기존에 하던 프로그램을 회사 밖에서도 제작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어. 내가 가진 경험과 배움을 더 넓은 곳에서 활용하면서, 더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해보고 싶어. 그리고 그 과정 속에서 아빠와 쌓아가는 이야기들도 세상에 많이 꺼내놓을 거야. 두려움도 있지만, 기대가 더 커.


아빠가 늘 곁에서 믿어주고, 격려해 주는 게 나한테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알고 있어? 때로는 아무렇지도 않게 건네는 짧은 말 한마디가 큰 용기가 되고, 어떤 날은 아빠의 조언이 길을 잃지 않게 방향을 잡아주기도 해. 늘 아빠에게 받은 사랑에 보답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바쁜 일상 속에서 표현이 부족했던 것 같아. 조금은 미안한 마음이 들어. 아빠, 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줘서 고마워. 내가 더 좋은 사람이 되고, 꿈을 이룰 수 있도록 응원해 주는 아빠 덕분에 용기를 낼 수 있어. 앞으로도 자주 응원해 줘. 그리고 나도 아빠가 하고 싶은 일들에 대해 더 많이 듣고, 함께 응원하는 딸이 될게.


P.S. 나는 하고 싶은 것들이 생기면 다이어리에 마인드맵을 그리고, 줄기를 쳐서 정리를 해. 그러면서 생각을 정리하고, 해야 할 일들을 우선순위에 맞춰 계획하는 게 습관이 됐어. 아빠는 어떻게 할 일들을 정리하고, 계획을 세우는지 궁금해. 나처럼 다이어리에 적는지, 아니면 또 다른 방식이 있는지 궁금해. 아빠만의 노하우가 있으면 알려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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