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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교회사이 Apr 05. 2022

그만 그 가면 벗어
내려놓을 때도 되었는데

노는(遊)신부의 사순절 ‘함께 걷는 어둠’


사순절 다섯 번째 주간 화요일, 걸으며 읽는 마가복음서 (30)


“예수께서 가르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율법학자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은 예복을 입고 다니기를 좋아하고,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좋아하고,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에 앉기를 좋아하고, 잔치에서는 윗자리에 앉기를 좋아한다. 그들은 과부들의 가산을 삼키고, 남에게 보이려고 길게 기도한다. 이런 사람들이야말로 더 엄한 심판을 받을 것이다.’ 예수께서 헌금함 맞은 쪽에 앉아서, 무리가 어떻게 헌금함에 돈을 넣는가를 보고 계셨다. 많이 넣는 부자가 여럿 있었다. 그런데 가난한 과부 한 사람은 와서, 렙돈 두 닢 곧 한 고드란트를 넣었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곁에 불러 놓고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헌금함에 돈을 넣은 사람들 가운데, 이 가난한 과부가 어느 누구보다도 더 많이 넣었다. 모두 다 넉넉한 데서 얼마씩을 떼어 넣었지만, 이 과부는 가난한 가운데서 가진 것 모두 곧 자기 생활비 전부를 털어 넣었다.*’” (마가복음서 12:38-44) 


Roman Republican or Early Imperial Relief of a seated poet  with masks of New Comedy, 1st Century


언제까지 혼자 가면무도회일 수는 없는데, 이젠 그 가면 벗을 때도 되었는데, 이젠 내려놓을 때도 되었는데, 언제까지 가면을 쓰고 살 수는 없는데, 그만 자유할 때도 되었는데, 무도회도 끝나 신데렐라도 벌써 집으로 돌아갔는데, 연극이 끝난 후 그 뒷풀이 그 마저도 이젠 식어가는데. 그 가면 이젠 벗어 거기 내려놓고 그만 그 분장도 지우고, 그 불편한 옷 벗어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그 부은 발 그만 편한 신발로 갈아 신고, 이젠 맘 편히 몸 편히 살아야 하는데.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아! 위선자들아! 너희에게 화가 있다!” (마태복음서 23)


예수께서는 바리새파 사람들과 함께 율법학자들을 위선자들이라고 꾸짖으십니다. 위선자에 해당하는 그리스어는 ὑποκριτής 입니다. hypocrites는 연극배우(playactor)를 일컫는 말입니다. 

척 하는 사람, 보이는 것과 말하는 것의 다름, 말과 행위의 모순이 있는 사람입니다. 위선(僞善)입니다. 겉과 속이 사뭇 다릅니다. 가면을 쓴 사람입니다. 멀리서도 잘 보이는 사람입니다. 누구나 알아보고 알아주는 사람입니다. 사람들의 관심이 좋습니다. 박수와 갈채와 환호가 좋습니다. 정말 뭐나 된 듯도 싶고 정말 대단해진 듯도 싶고, 좋습니다. 점점 말도 동작도 커집니다. 멋지게 한껏 차린 나를 보아주는 것이 좋아지면 좋아질 수록, 남들이 잘한다 잘한다 할 수록, 존경한다 존경합니다 할 수록, 점점 말도 걸음걸이도 손발짓도 느릿느릿 반듯반듯 힘도 있어지고 위엄도 있어지고 고개는 조금 뻣뻣해지고 중저음의 말투도 듣기 그리 거슬리진 않습니다. 높은 자리, 좋은 자리는 비워져 있어 당연히 내 차지이니 서두를 필요도 뛸 이유도 없습니다. 나의 다소 늦음이 그리고 남들의 다소 기다림이 오히려 바람직하고 당연합니다. 




그러나 눈 먼 인도자들입니다. 자기들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고 하는 사람도 들어가지 못하게 합니다. 위선자들입니다. 회칠한 무덤입니다.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지만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온갖 더러운 것이 가득합니다. 아무리 좋은 선물 포장지로 겹겹이 싼다고 해도 스멀스멀 그 풍겨 나오는 냄새는 막을 수 없습니다. 그들로 인하여 의인과 악인의 다름이 모호해집니다. 


이젠 그 쓴 가면이 그냥 제 얼굴처럼 느껴집니다. 그 입고 있는 무대의상이 일상복이 되었습니다. 분장 없이는 어딜 나갈 수 없습니다. 분장을 한 그 위에 다시 분장을 하고 또 합니다. 무대 위와 아래의 구분이 없습니다. 극장 안과 밖의 구분이 없습니다. 이젠 자기가 누구인지도 잊었습니다. 여기가 어디인지도 잊었습니다. 낮이나 밤이나 긴 그림자를 끌고 다닙니다. 


제자들은 그들에게 넋을 놓고 있습니다. 저기 웅장하고 화려한 성전의 안뜰, 그 멋지게 차려 입고 오고가는 사람들의 인사를 받느라 정신이 없는 율법학자들, 저기 높은 자리에 앉아 저 아래를 쳐다보는 제사장들, 그 헌금함이 너무 작다고 큰 것으로 바꾸라고 눈치주는 부자들에게 그만 넋을 놓고 있습니다. 나도 언젠가는 저렇게 . . .  




“너희는 저들을 조심해라. 저들처럼 되지 않도록 조심해라. 저들을 따라 하지 말아라, 따라 가지 말아라.”


그런데 제자들은, 여기 어찌 할 바를 모르고 누가 볼까 싶어 두리번 두리번 이리저리 고개를 돌리고, 있는 것 없는 것 없이 명절날 먼길 오는 손자 손녀 사탕값까지 탈탈 털어 거기 놓인 커다란 헌금함에 넣습니다. 혹여 쨍그랑 그 민망한 소리가 날까 싶어, 무슨 다이나마이트 뇌관이라도 되는 양, 그래도 저건 너무한다 싶게 조심스레 그 동전 두 닢 구멍으로 밀어넣습니다. 그리곤 허둥지둥 제 갈길로 떠나는 그 필사적인 신심(信心)의 고개숙인 뒷모습은 제자들이 과연 보았을까요? 


저기 율법학자에겐 그 잎사귀 더 없이 무성한 열매없는 무화과나무는 그런대로 보기 좋고 쉬기 좋고, 세상 돌아가는 얘기와 성전 돌아가는 얘기 나누기에 그늘막으로 더 할 수 없이 좋습니다. 여기 부자에겐 무화과 열매 하나 쯤이야 하며 열매가 열렸는지 어떤지 관심 조차 없습니다. 

그러나 배가 고프셨던 예수님께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 가난한 과부에게도 그렇지 않습니다. 배 고픈 예수님, 그리고 이 가난한 과부에겐 잠시 잠깐의 쉬어 갈 그늘일 수는 있으나, 그것 보단 허기를 속여 줄 열매가 절실합니다. 그 가난함을 조금 덜어 줄 열매가 필요합니다. 장터에 내다 팔아 빵이라도 살 수 있을까 그게 더 중요합니다. 열매를 맺지 못하는 나무는 열매가 없는 나무는 나의 먹을 것 입을 것 잘 곳 걱정 덜어 줄 착한 나무일 수는 없습니다. 지금 예수살렘 성전이 그렇습니다. 


그 잎 무성한 무화과나무, 그 잎사귀 한 장이 저들의 부끄러움을 가릴만한 크기임에도 그 부끄러움을 모르니 그것이나마의 쓸모도 없어진 무화과나무입니다. 차라리 가릴 줄 알고 숨을 줄 알던 아담과 이브의 수오지심 (羞惡之心)이 필요합니다.  


photo by noneunshinboo


하지만 이 가난한 여인에게는 비록 장사치들의 소굴이 되어버린 이 성전이 여전히 소중합니다. 왜냐하면, 그 곳에 그 거룩한 성전에 하나님께서 계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 하나님이 이 여인의 존재의 중심, 그 성전이 이 여인의 삶의 중심이기 때문입니다. 마음과 정성과 뜻과 힘을 다하여 이 가난한 과부는 오직 그 중심을 향하고 있습니다. 삶의 곤고함과 고단함, 외로움과 소외감은 이 여인의 중심을 흩트리지 못하고, 오히려 더욱 온 존재가 그 중심으로 향하도록 만듭니다. 그것 만큼은 그 어느 누구도 빼앗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지금 여기 그 성전의 주인, 우리의 삶의 중심이 되시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여인을 보고 계십니다. 

그리고 이제 이 여인에게 새 성전이 되어 주십니다. 이 여인을 당신께서 머무시는 새 성전으로 삼으십니다. 

그리고 이제 이 가난한 여인은 새 성전의 앞뜰 그 열매 주렁주렁 열린 새 무화과나무가 되었습니다. 


지금, 율법학자와 부자, 아니면 이 가난한 여인 중에 누구의 하늘 창고가 비었고, 누구의 하늘 창고가 보물로 가득할까요?


사순절, 이 가난한 여인의 뒷모습을 떠올리며 걷습니다. 



* 이 가난한 과부의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헌금을 독려하거나 장려하거나, 헌금은 얼마나 해야 한다거나 하는 그런 뜻에서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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