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는(遊)신부의 사순절 ‘함께 걷는 어둠’
사순절 다섯 번째 주간 수요일, 걸으며 읽는 마가복음서 (31)
“. . . ‘선생님, 보십시오! 얼마나 굉장한 돌입니까! 얼마나 굉장한 건물들입니까!’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이 큰 건물들을 보고 있느냐? 여기에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질 것이다.’ . . . ‘우리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이런 일이 언제 일어나겠습니까? 또, 이런 일들이 이루어지려고 할 때에는, 무슨 징조가 있겠습니까?’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에게도 속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는 ‘내가 그리스도다’ 하면서, 많은 사람을 속일 것이다. . . .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여라. . . .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사람은 구원을 받을 것이다. . . . 그 때에 누가 너희에게 ‘보아라, 그리스도가 여기에 있다. 보아라, 그리스도가 저기에 있다’ 하더라도, 믿지 말아라.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예언자들이 일어나, 표징들과 기적들을 행하여 보여서, 할 수만 있으면 선택 받은 사람들을 홀리려 할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조심하여라. . . .” (마가복음서 13:127)
누가(who)? 언제(when)? 어디서(where)? 무엇을(what)? 어떻게(how)?
그런데 하나가 없습니다. 왜(why)가 없습니다.*
전쟁, 테러, 난민, 질병, 기아, 가난, 소외, 차별, 증오, 그리고 기후 위기, 식량 위기, 핵 위기. 그리고 세상의 종말과 인류의 종말.
그런데, 우리에게는 항상 그 왜(Why)가 없습니다. ‘왜’를 묻지 않습니다. ‘왜’에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왜’를 생각하지 않습니다. ‘왜’는 없다는 듯 말하고 행동합니다. ‘왜’ 없이 잘 삽니다.
‘왜’일까요?
늘상 그렇다는 듯, ‘왜’ 우리는 그 ‘왜’를 ‘왜’ 자꾸 뺄까요?
‘왜’ 그러는 걸까요?
“주님, 좀더 명확하게 말씀해 주십시오. 그 일어날 것이라 말씀하신 그 일들이 구체적으로 어떤 일들입니까? 그리고 정확하게 언제 어디서 일어나겠습니까? 그런 일들이 나타날 그 때에 무슨 징조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우리에게도 일어납니까? 그럼 누구에게 물어야 합니까? 우리가 누구를 찾아가야 합니까? 우리는 누구를 기다려야 합니까? ”
그런데, 여전히 그 ‘왜’가 없습니다. ‘왜’ 그런 일들이 일어나는지, ‘왜’ 그래야 하는지, 무엇 ‘때문’인지, 누구 ‘때문’인지, 그 ‘왜’가 여전히 빠져 있습니다.
우리는 늘 무엇이 부족합니다. 항상 그렇습니다. 내 눈으로 직접 보고 내 귀로 직접 들어야 합니다. 내 손에 확실하게 잡혀야 합니다. 그런데, 그래도 믿질 못합니다. 믿고 싶은 것만 믿습니다. 그리고는 말합니다. 믿지 못함이 내 탓은 아니다, 보다 명확하고 확실한 정보가 나는 필요하다, 기적과 징표가 필요하다, 그럼 믿겠다. 그런데, 그럼 정말 믿을까요?
그때를 위한 준비가 필요합니다. 그때를 대비해야 합니다. ‘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만 알면 된다 여깁니다. 그러면 대비를 잘 할 텐데 합니다. 그래서 말씀의 해석에 탁월하다는 사람을 찾고 여기 저기 교회를 찾아 다니고, 영이 충만하다 여러 사람들이 말하는 그 사람을 찾고, 어떤 기적이 일어난다는 곳을 찾고, 유력한 어떤 이의 강연을 찾고 더 좋은 책을 찾고 찾느라 동분서주합니다. 타고 온 차량 주차할 공간을 찾느라 바쁘고, 소문따라 풍문따라 또 다른 곳으로 가려고 다시 그 차량을 빼느라 또 바쁩니다. 이래저래 참 고생이 많습니다.
그러나,
“이 말 저 말 함부로 믿지 말고, 이 사람 저 사람 함부로 따라 다니지 말고, 이 때다 저 때다 하는 말에 혹하지 말고, 여기다 저기다 솔깃해 하지 말고, 너희는 조심하고 또 조심해라. 이미 나에게서 본 것, 들은 것, 배운 것 그것이면 족하니, 이제 그 본 것, 들은 것, 배운 것 그대로 살아라. 끝까지 견디고 나, 너의 주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 그리스도 예수를 살아라.
가난한 사람들, 힘 없고 배운 것 없고 가진 것 없는 사람들, 아프고 병들고 춥고 배고프고 목마르고 슬프고 외로운 사람들, 그들을 보면 나를 본 듯, 내가 온 듯 대해라. 내가 너희 안에 있다. 너희 가운데 있다. 스쳐 가는 듯 할 때도, 너희 문을 두드릴 때도, 먼 발치에 있을 때도, 그리고 너의 눈에 보이지 않을 때도 많을 테지만, 너희 중에 한 사람으로 있을 것이니, 자세히 보면 보일 것이니, 나를 찾아라, 보아라, 만나라. 나는 너희 가운데 있다. 너희 가운데 가장 작은 사람으로 있다.” (참조, 마태복음서 25:31-46)
아마도 우리는 숨어 계신 그 예수님을 찾는 수고를 하고 싶지 않은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에서 멈춘 채로, 그 왜는 외면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왜 그런 환란이 있는지, 왜 그런 환란이 꼭 와야 되는지, 왜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 하는지, 그 왜를 묻기 두렵고 또 그 왜에 답을 해야 하는 것에 부담을 느껴서 묻지 않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내 아버지께 복을 받은 사람들아, 와서, 창세 때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한 이 나라를 차지하여라. 너희는, 내가 주릴 때에 내게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나그네로 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병들어 있을 때에 돌보아 주었고, 감옥에 갇혀 있을 때에 찾아 주었다. . . . 너희가 여기 내 형제자매 가운데,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 . . .” (마태복음서 25:34-36, 40)
그 ‘왜’가 없는, 원칙 없는 제자들이 되진 말아야지 않을까 싶은 사순절입니다.
* 육하원칙 (five W's and one H , 六何原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