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는(遊)신부의 사순절 ‘함께 걷는 어둠’
사순절 다섯 번째 주간 월요일, 걸으며 읽는 마가복음서 (29)
“ . . . ‘모든 계명 가운데서 가장 으뜸되는 것은 어느 것입니까?’ 예수께서 대답하였다.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우리 하나님이신 주님은 오직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뜻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여, 너의 하나님이신 주님을 사랑하여라.’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여라.’ 이 계명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그러자 율법학자가 예수께 말하였다. ‘선생님, 옳은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그 밖에 다른 이는 없다고 하신 그 말씀은 옳습니다. 또 마음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자기 몸같이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와 희생제보다 더 낫습니다.’ 예수께서는, 그가 슬기롭게 대답하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하나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 . . .” (마가복음서 12:28-34)
“거의 다 왔어요.”
숨은 이미 턱 밑을 넘어 코를 지나 거진 눈썹까지 차올라 이제 그만 됐다 하고, 등에 놓인 배낭은 이제 그만 내려가자 저 아래 도토리묵에 시원한 냉 막걸리 기다린다 내게 말을 걸고, 그러게 비싸더라도 가볍고 편한 등산화를 사라니까 후회가 내 두발에 매달려 못가게 잡고, 오르는 길에 주워들었던 나무 지팡이는 이 길은 나의 길 아니다 벌써 제 길로 떠나 내 빈 손에는 땀만 가득이고, 도대체 누가 거기 산이 있어 오른다 그랬는지,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지 굳이 내가 올라야 산이고 내가 따라 흘러야 물인 것은 아닌데.
이 삼복 더위에 지리산 종주는 굳이 왜 하겠다고 따라 나섰는지 엄마 말씀 들을 것을 불효자는 후회막급입니다. 굳이 종주까진 뭔 필요가 있냐고 에베레스트 오를 것도 아닌데 그냥 저 아래서 다이렉트 당일 코스로 천왕봉이나 찍고 내려가면 될 것을. 내 다시는 오나 함 봐라, 그래서 봤더니 그 다음 해에도 똑같이 투덜투덜 다시 찾았던 지리산 종주길.
“이제 거의 다왔어요! 조금만 더 가면 되니까, 힘 내세요!”
툭 그 말 던지고 내려가는 사람 불러 세워, ‘정말이요? 그 말 책임질 수 있으세요? 얼마나 남았는데요, 정확히 몇 미터 몇 센티가 남았는데요?’ 그 힘 내란 말 한마디에 없던 힘이 날 것 같으면 벌써 거기 정상 찍고 저 밑에서 콧노래 절로일 텐데, 그 힘 내라 말만 제발 하지 말고, 손에 들고 있는 그 먹다 남은 오이라도 주던가, 배낭 속 감춰 둔 초코파이라도 하나 던져 주던가, 사실 그런 마음도 들었던 지리산 종주길. 거의 다 왔다고, 조금만 더 가면 된다고, 그 말에 ‘네, 감사합니다’ 대꾸할 힘도 없는데, 그나마 대꾸를 원할 정도로 야박하지는 않은지 나의 어떤 반응을 기다리지는 않고 자기들도 사실 시간도 없고 해서 그저 씨익 하고 지나쳐 내려가는 저 홀가분하다는 듯 없던 축지법으로 길 서두르는 하산길의 사람들.
“거의 다 와 간다”
정상찍고 내려가는 사람들과 거기 아직 오르지 못한 사람들을 정확히 가르고 나누는 이 한마디, 산의 정상 부근에서, 그리고 그 말하는 입장과 그 듣는 입장에 따라 달라도 너무 다른 그래서 정상이 꽤 가까운 혹은 꽤 먼 어디쯤에서 흔히 듣는 말.
사실 나는 들어본 적은 많으나 해본 기억은 없습니다. 너무 지치고 힘들어 헉헉 거리며, 억지 힘 쥐어짜며 저어기 정상은 커녕 땅만 줄곧 쳐다보며 오르막길을 오르는 사람에게 펄펄 날 듯 내리막길에 들어선 사람이 딱히 제 돈도 제 힘도 들어가지 않는, 자기의 친절함과 배려심을 보여주는 그냥의 속빈 인사처럼 보일까 싶어, 혹은 난 이제 술술 내려가는데 당신은 끙끙 참 고생이 많다, 뭐 그런 심정에서 나오는 듯 싶기도 하고. 그래서 어떻게 생각하면 만족감에 조금은 뻐기고 싶기도 하고, 약간은 위로와 용기도 주면서 동시에 슬며시 약도 올리고 싶기도 하고, 혹시 그런 여러 심정이 얽혀 그러는 것은 아닐까 해서 입니다. 물론, 철저한 저만의 속좁은 생각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사실 정상에 다 온 것도 아니고, 거기서부터가 제일 힘이 드는 것이 또한 사실인데, 그래서 거기서 돌아가는 이들도 적지 않은데 괜히 부담을 주는 것은 아닌지, 게다가 지금 힘이 드는 게 뻔히 눈에 보이는데 찰나의 그저 스침만 있는 내가 막무가내로 당신은 더 힘을 내야 한다고, 그래야 한다고, 안 그럴거면 왜 여기까지 왔냐고, 무례한 듯 보이고 해서 입니다.
“여기서 멀지 않습니다. 거의 다 왔습니다.”
그러나, 이말이 조금 위로와 위안을 주는 것도 사실이고, 그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마저 오를 힘을 주는 것 역시 숨길 수 없는 사실입니다. 또한 지금 나는 제대로 길을 가고 있는지, 정말 옳은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인지, 그것을 확인시켜 주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래 영 다른 길은 아니었다, 영 틀린 길로 올라 온 것은 아니었다, 계속 이 방향으로 가면 되겠구나, 그런 안도감도 줍니다. 나 혼자 가는 길, 나 혼자만 힘든 길, 힘들게 오르는 길은 아니었구나, 그런 위로도 얻습니다.
그래! 내가 길은 제대로 알고 있었구나, 옳게 알았구나, 잘 그래도 여기까지는 왔구나, 하는 뿌듯함에 잘했다, 잘해내고 있다, 스스로를 토닥이게도 합니다. 지금까지 올라온 것처럼 계속 가자, 그럼 저들처럼 한결 편해진 얼굴로 내려갈 때가 있겠지, 그런 소망도 다시 생기고 그런 의지도 생겨납니다. 그래서 또 힘을 내 오를 수 있습니다.
“너는 하나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
예수께서 하신 이 말씀은 그러나 하산길 그 홀가분함에서 나오는 누구의 인사치례가 아닙니다. 친절과 배려에서 툭 던지는 인사말이 아닙니다. 지금 그 산을 오르는 그 길을 같이 오르고 계신 동행자 예수께서 나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멈추자는 말씀이 아닙니다. 이제 충분하니 그만 내려가도 된다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넌 거기 정상에는 오르지 못하니 내려가라 그 말씀도 아닙니다. 너의 길은 영 틀린 길이다, 넌 영 틀린 길로 올라왔다, 그런 말씀도 아닙니다.
“너는 그 길은 잘 알고 있구나, 그 옳은 길을 아는 것이 중요한데, 네가 제대로 듣고 보고 그래서 알아 여기까지 잘 왔구나, 그 길이 옳은 길이라는 것을 믿고 여기까지 잘 왔구나.
그런데, 아직 아니다. NOT YET.
아직 거기 정상은 아니다. 그러나 멀리 있지는 않다. 그 서 있는 처지와 입장에 따라 다른 것은 내 잘 안다. 누구에게는 굳이 엎어지지 않아도 코 앞인 듯 싶은데, 나에게는 언감생심 너무 먼 듯 싶고. 누구는 남의 집 생일에도 당연한 듯 받아 내 목에 거는 진주목걸인 듯 싶은데, 나는 쇼윈도 안 눈부신 보석 목걸이를 보며 티파니에서 아침을 맞는 오드리 햅번의 꿈일 뿐이고. 그래 그럴 수 있다. 그렇게 여겨질 수 있다.
그러나 정말은 그리고 사실은, 하나님의 나라는 네가 생각하는 것 보다 그리 멀지 않으니, ‘같이’ 힘 내자!
거기 아는 것에 멈추면, 거기 다 왔다 여기고 멈추면, 힘겹다 멈추면, 이만하면 됐다 멈추면, 그냥 여기를 하나님의 나라로 알고 살면 됐지 멈추면, 그 하나님의 나라는 오히려 더욱 너에게 멀어지니 그러다 아예 없게 되니, 멈추지 말고 나와 함께 끝까지 가자. 끝까지 내가 너와 함께 갈 것이니, 나는 지금 하산길이 아니라 너와 계속하는 등산길이니, 같이 가자. 너도 그리고 너도 그리고 너도 우리 다 함께 가자. 너는 하나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
“선생님, 옳은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고, 그 밖에 다른 이는 없다고 하신 그 말씀은 정말 옳습니다. 또 마음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그리고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와 희생제 그 어떤 것보다 더 낫습니다.”
이 말을 하는 사람은 율법학자입니다. 신학자라고 보아도 신학 교수라고 보아도 됩니다. 정말 종교 엘리트입니다. 그러니 오죽 잘 알겠습니까? 존경도 받습니다. 반듯합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고 하십니다. 칭찬입니다. 하지만, ‘아직은 거기에 있지 않다, 거기에 도착하지 않았다, 멀리 있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이젠 엎어지는 일만 남았다, 코만 거기에 닿으면 된다는 정도는 아니다, 다 오진 않았다, 아직은 아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이제 시작인지 모른다, 잘 아는 것으로는 말씀을 좋아하는 것만으로는 되지 않는다, 아직 아니다’, 그러십니다.
아는 사람이 좋아하는 사람을 넘어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내가 아는 것을 넘어서야 합니다. 나의 입으로 너를 좋아한다 말하는 것을 넘어서야 합니다. 너를 아는 것을 넘고, 내가 너를 좋아하는 것을 넘어, 내가 너를 사랑하는 것까지 가야 합니다. 아는 것을 실천하는 것, 좋아함을 나의 손과 발로 행(行)하는 것, 그래서 나의 마음과 정성과 뜻을 다하여 너를 사랑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천왕봉, 그 산의 정상에 오르는 것은 지식인에게 물어 아는 것, 그 산 밑 멀리서 바라보는 것, 그 근방 멀리서 카메라에 담는 것, 하산하는 사람들에게서 들은 몇 푼 귀동냥으로 그래 이 정도면 됐다 하고 훌훌 털고 내려와 나 올라갔다 하는 것이 아닙니다.
“네가 하나님의 나라에서 멀지 않다.”
이 말씀은 아는 사람,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라 하시는 말씀과 다르지 않습니다.
산을 보는 사람, 산에 대해 말하는 사람, 산을 아는 사람, 그리고 산을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라, 산을 사랑하는 사람, 그래서 산을 오르는 사람이 되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 산을 지금 주님께서 나와 함께 올라가신다 하십니다.
아직은 하산의 때가 아닙니다. 저기 정상이 멀지 않습니다. 거의 다 왔습니다.
사순절은 그 산행(山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