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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이년생 꼰대 Oct 05. 2021

이런 Z

 요즘 기사 제목에 심심찮게 등장시키는 ‘Z세대’란 말이 자못 별로다. 

 도쿄 올림픽 열풍에 관해 <결과보다 과정을 중시하는 Z세대의 힘>이라니. 그 Z로서 눈썹이 팍 나이키 문양으로 일그러진다. 이번 배구와 축구는 8강까진 나란한 환호를 받았지만 종국에 환호가 코트장으로 기운 건 4강과 8강의 무게 차였다. 숫제 <이야기를 중시하는 Z세대>라 쓰면 반은 옳은 소리겠다. 이야기는 전개만큼 결말, 때론 엉킨 전개를 쾌도난마 하는 결말이다. 경기력이 부진해도 꾹꾹 올라 금메달을 걸면 당장 환호성 지름은 역시 이야기라서다. 그러나 이것이 비단 우리 Z세대만의 특징은 아니기에 반쪽짜리 기술이다. 금메달 셀카와 장문의 소감이 업로드되는 SNS에 관해선 우리의 전문이겠으나 8시 뉴스가 익숙한 기성에게 흘러드는 이야기와 그들의 열광도 분명 있었을 테니 말이다. 기실 이야기에 열광함은 세대나 국적의 현상은 아니요, 오늘의 정보 쓰나미에 침수된 호모사피엔스라면 당연한 보임이다.      


 뿐더러 요즘의 기사는 불공정에 분노함이 Z세대의 특징이라 보고한다. 그간 우리만 공정과 정의를 금과옥조로 봐온 듯해 빈정이 상하고 그것의 가치가 깎여 보여 역시 그닥인 기술이다. 행복은 좋아요, 슬픔은 슬퍼요, 불공정은 불량이야요. 이는 모두 연령 불문에 부친 앎 아닌가? 다만, 오늘의 불공정이 사람을 뽑는 일에 비일비재라 대입과 취직이 관문인 우리가 당장에 큰 분노를 표할 따름이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이 분노도 우리 Z세대의 전유물은 아니다. 이는 앞에도 있었고 뒤에도 있을 청년의 감정이다. 어쩌다 우리는 오늘의 청년이 되었을 뿐이다.     


 요 얼마 전엔 고집하던 구버전 인터넷 포털을 신버전으로 끝내 전환했다. 아침의 신문보다 종일의 인터넷 포털은 우리 Z세대가 남녀를 서로 혐오해야 그것이 응당 우리의 성질인 듯 기사를 공작함에 “아이고 두야” 끌끌대다 못해 첫 화면에 기사가 보이지 않는 신버전으로 대피해버렸다. 

 눈썹에 나이키 문양을 오래간 짓게 하는 건 무엇보다 Z세대의 젠더갈등 기사다. 글에서 우리가 예사 벌인다는 그 갈등을 나는 겪지도 목도치도 못했으니 내 발이 좁은 탓도 있으려나 이 발이 우리 세대의 평균이 아니라고도 차마 부정 못 하겠다. 언제부턴가 기사 제목에 버젓이 적혀 불쾌감마저 두 눈에 익숙해진 ‘한남’, ‘꼴페미’ 등의 용어를 식사 자리에서 성토하는 친구는 있다. 하지만 그런 그도 귀여움은 지난 만남에서 이성 친구가 합류하자 일순간 쑥맥이 되어 꼴엔 뛰어가 식당 문을 열고 우리가 착석도 전에 물을 따르는 웨이터 행태를 부린 걸 내 두 눈 선히 기억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가 이성이 없는 자리에서 이성을 잃고 내뱉는 불유쾌한 용어를 나로서는 오른귀로 꾸역 삼키고 왼귀로 꾸웩 토하며 속으로 외칠 수밖에 없다. 

 “네 머릿속에는 마군이 가득 찼구나!”

 12년 남녀공학의 확신을 얹어, 우리 남녀는 대체로 잘 지내왔고 대체로 잘 지낼 것이다. 코로나로 대학교에 나가지 못함에도 어떤 경로인지 기어코 선남선녀를 이룬 친구의 소식이 인스타그램에 보인다. 비대면 나라도, 인터넷 나라도 남녀가 창조하는 저 소국을 멸망케 할 순 없다는 당연한 사실을 당연치 않게 깨닫곤 덜하는 고까움이다. 그러니까 나에게 Z세대의 젠더 갈등은 마군의 용어처럼 한 귀로 먹고 한 귀로 뱉을 수준의 가벼움에 지나지 않는다. 허나 폭거를 당하지 못했다고 우리나라에 조폭이 없다는 단정은 아니니 우리 세대의 젠더갈등이 어디선 심히 벌어지겠으나 그것은 골목 싸움에 지나지 않는다. 골목 싸움을 거리에 퍼트림은 기사의 순기능이지만 벌써 우리가 고교 때부터 별 정당성을 못 느껴 참전 거부해왔음에도 골목 싸움을 Z세대의 거국적 싸움으로 대서(大書)해 최면을 걺은 분명 오늘의 기사만 저지르는 잘못이요, 역기능이올시다.     


 여기까지 쓰고 뒤돌아 읽으니 다분히 ‘이런 정치적인 Z가—’ 소리나 듣겠다. 정치 뺀 ‘이런 Z가—’ 소릴 듣고자 나의 별스런 취향을 밝힌다. 우리 세대가 <프로듀스 101>에 마음이라지만 나는 걸그룹보다 여배우, K팝보다 8090 가요에 평소 두는 마음이다. 무슨 이런 Z가—. 이는 유년 시절 내린 취향의 뿌리에서 청춘이 피었기 때문이다. 

 초등의 방학이 되면 나 홀로 집에서 저녁까지 지내야 했다. 거북이 등에 오른 시간이었다. 때는 어머니가 ‘교육 강화’ 미명하에 기계국과의 쇄국 정책을 선언해 티비를 없앴고 컴퓨터를 잠금했으며 나는 6학년 때까지 휴대전화를 가지지 못했다. 그 초등 아이에게 소일거리란 아침의 신문과 다달이 쌓여 탑을 이룬 여성 패션 잡지, 그리고 붐박스만한 라디오뿐이었다. 

 신문과 여성 패션 잡지에 걸스데이나 에이핑크가 보도되진 않는다. 대신 잡지는 여배우를 찍었다. 영화제가 있던 달의 호는 나에겐 또래가 가진 걸그룹 브로마이드와 동등하거나 그 너머의 가치였다. 지금도 기억의 땅을 파고 내려가 유년의 뿌리를 캐면 걸그룹은 찾을 수 없고, 순백 드레스 차림으로 레드카펫에 서서 오른손을 흔들던 천사의 내림, 이민정이 번히 보이는 것이다. 남편분보다 먼저 사심을 품은 나였으니 중학교에 가 뒤늦게 결혼 소식을 알았을 땐 비로소 또래가 느낀 포미닛 해체의 슬픔을 시음할 수 있었다. 하여튼 스물이 되어도 여전히 K팝에 친숙을 못 가지는 데엔 화면의 걸그룹 대신 지면의 여배우에 잔뜩 사심을 품던 이런 유년의 시간 때문이라. 그리고 그때 만난 또 하나의 세상 때문이라. 

 여성 패션 잡지를 탐독할 때 다가온 적막은 막 달리려는 시간을 질질 늘이는 또 다른 변수였다. 그 적막을 무찌를 수 있는 건 오로지 DJ뿐이었다. 어머니는 교육과 상관관계를 못 떠올렸는지 유일하게 라디오국과 통상은 허가했다. 방학 때면 라디오 선을 꽂고 빼는 일은 영겁의 시간 속 첫 일과와 마지막 일과가 되었고 자연스레 나는 알게 되었다. 15cm 안테나에서 핀 그 나라는 중년의 사상, 감정, 추억 따위로 축조된 어른 제국이라는 것을. 그곳에서 걸스데이, 에이핑크, 인피니티, 엑소는 이방인이었다. 사연자가 신청하는 곡이란 자두의 <김밥>, 주주클럽의 <나는 나>, 룰라의 <날개 없는 천사>, 이문세의 <가을이 오면> <옛사랑>을 떠올리는 <소녀>, 최호섭의 <세월이 가면>, 이상은의 <담다디>, 죄다 8090 가요였다. 유독 봄방학엔 조용필의 <단발머리>, 여름방학엔 변진섭의 <새들처럼>과 듀스의 <여름 안에서>, 겨울방학엔 김현식의 <내 사랑 내 곁에>, 그리고 이들 따지지 않고 비 오는 날엔 그의 <비처럼 음악처럼>을 선곡하는 것이 그 나라 헌법이었다. 

 본래 취향이란 신축을 마친 빌딩처럼 텅 비어있다. 살면서 채우는 것인데 반나절의 라디오 세상이 내 음악의 방에다 8090 가요를 꽉꽉 세 들이고 있던 걸 초등의 나로선 알지 못했다. 그 까닭에 잡지 탓과 더불어 자라서도 K팝은 입추의 여지가 없던 것이다. 전국노래자랑에 나와 소개하길 조부모님 아래서 유년을 보내 트로트 청년이 되었다는 그가 나는 진심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평생 트로트를 취향에서 내쫓을 수 없을 것이다. 유년에 세 들인 취향은 다른 시기의 취향과 달리 얼마간 지나면 떠나는 것이 아니라 인생과 동거하며 마치 뿌리처럼 이파리 같은 훗날에 지속적인 영향을 올려준다는 건 작년 고3 때 자각한 일이었다. 여학우 무리가 책상 위 노트북을 포위하고 있길래 나도 들여다보곤 “이하늬 아니야?” 말했다가 “뭔 소리야. 제니인데. 아, 진짜.” 회초리 대신 눈초리로 집단 린치를 당한 사건, 가창 시험에서 C등급을 받도록 나를 무아지경의 흥으로 이끈 선곡이 임재범의 <이 밤이 지나면>이었다는 사건, 이 모두 잡지와 라디오를 지척에 둔 꼬마가 10년 전부터 방 안에서 끔찍이도 굴린 스노우볼이었네!     


 여하간 도쿄올림픽 기사부터 유년의 이야기까지 두서없이 진술한 건 세대의 취향을 빗긴 이런 Z도 있다는 자진신고이다. 주위를 둘러보니 더한 Z도 많다. J팝을 덕질하기도, 군부대를 덕질하기도 한다. 네가 나를 보듯, 내가 너를 보듯, 이해 안 되는 우리다. 그래서, 바람직해서, 좋다.

 세대의 특징을 규정할 시 위험은 그 특징을 빗긴 세대원이 느낄 무소속감과 자아 부정에 있다. Z세대란 말이 자못 별로인 소이다. 세대를 정하되 출생연도만이지 성격과 취향까지 집단적으로 재단해선 안 된다. 정 특징이라면 ‘Z세대는 모두가 이상한 개인인지라 한 집단으로 보기엔 여간 공통 특징이 없다는 것이 그 세대의 유일한 특징이다’ 씀이 좋겠다. 제일은 그 주어에 Baby Boom, X, Y, M, Alpha 하는 모든 세대를 추가하는 것이다. 세대보다 개인의 정립이 존중받는다면 더이상의 세대 담론은 색연필 세트의 색깔을 묻는 질문만큼 무명무실됨이 번연하다. 저학년 때 일이다. 선생님이 다문화 가정을 물건에 비유해 보라니깐 내가 “그들은 색연필이요!” 외치고 칭찬을 받았다. 이젠 지난 답안지요, 지난 교육이다. 색연필은 그들이 아니고 우리들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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