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9~10.23
※ 이번 글은 아래 링크의 글과 바로 연결되는 이야기입니다.
https://brunch.co.kr/@fb1ddbe37b19479/9
멍냥토크회가 기획하고, 조합이 지원하는 마을공식 행사!! 빵빠라 방~~
시작은 경쾌하고 즐거웠다. 마을 사람들과 관계망을 형성하는 행사를 진행한다. 의도도 좋고, 의미도 있다. 나를 비롯한 임원들이 행사를 기획, 준비하며 공감한 게 이 행사가 일회성 이벤트로 끝나선 안된다는 점이었다.
이 시리즈 행사에는 확실한 목적이 있다. 아파트 내 반려인들이 서로의 존재를 알고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것이다. 만나면 인사를 하는 작은 관계가 시작되는 것. 타인에서 이웃이 되는 계기. 그래서 우리는 '서클'을 행사 앞단에 행사만큼 비중 있게 배치했다.
'서클'이란 회복적정의에서 배운 일종의 대화법이다. 회복적정의는 앞으로 나올 이야기에도 의미가 있고, 사회일반상식으로 알아두어 나쁠 것 없어 작년 초에 아파트카페에 내가 직접 작성한 후기 일부로 소개하겠다.
2023년 2월 1일에 아파트온라인카페에 작성
저는 작년 가을, 겨울 회복적 정의 수업을 들었습니다.
너무 듣고 싶었지만 최초 모집엔 주중 일과시간에 80시간을 들어야 해서 포기했습니다.
그래서 눈물을 머금고 나중에 주말반이 생긴다면 꼬옥~ 듣겠다 그랬습니다.
왜 이걸 이렇게 듣고 싶었을까요?
사실 전 잘 몰랐습니다. 다만 막연히 단어가 주는 그 느낌이 좋았습니다.
회복적 정의.... 뭔가 상처나 아픔이 회복될 거 같은 그런 느낌말이죠.
때때로 정의의 실현은 누군가에 대한 엄벌이나 처벌이 되는 게 현실입니다.
그것은 필요합니다. 하지만 가끔, 저렇게 벌을 내리면 정말 저 사람이 반성하나? 가해자가 저 벌을 받으면 피해 본 사람은 피해가 사라질까? 의문이 드는 일도 많았거든요.
행운인지 인연인지 몰라도 인원이 모자라 회복적 정의 주중 수업은 진행되지 못했습니다.
주말반으로 개설되었고 저는 무사히 수업을 들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수업을 들으면서 조합이 상당한 금액의 수업료를 지원한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아아... 이거 다 빚인데... 근데 뭐 일단 싸니까. ㅎㅎ)라는 저의 속마음을 미리 밝힙니다.
더불어 수업을 들은 사람은 갈등조정위원회의 위원으로 활동해야 한다는 내용도 있었습니다.
(위원 그까이거 뭐 해야 됨 하믄 되지!)라고 쉽게 생각했습니다. ㅎㅎ (이렇게 한 치 앞도 내다보지 못하는 모자란 사람입니다. 제가!)
저는 이 수업의 진행에 대해 어떤 형태로든 마을사람들과 소통하고 싶었습니다.
어떤 식이든 (지원받은 것에 대한) 페이백을 해야 하는데 그 페이백 중에 하나는 사람들에게 이런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라고 보고하는 것도 필요하다고 생각했거든요.
뭐 그런 의무감은 젖혀두더라도 저는 미주알고주알 이런 거 배운 얘기, 저런 데 놀러 간 얘기 듣는 거 좋아합니다. 제가 좋아하니까 남들도 좋아하지 않을까?라고 단순하게 생각해 적고 있습니다.
그래서 총 10명의 마을 주민이 모여 80시간에 이르는 대장정(!?)을 시작했습니다.
두 달 동안 주말 이틀을 온전히 바치는 나름의 강행군이었습니다. 하지만 재미도 있었어요. ㅎㅎ
회복적 정의의 기원(?)을 이야기형태로 간단히 들려드리겠습니다.
이 글은 누굴 공부시키려는 글도 아니고, 제가 복습하는 것도 아니라서
그냥 옛날 얘기하듯 편하게 전해드릴게요. (그래서 디테일은 다 틀릴 지도...)
몇십 년 전 캐나다의 교외지역에서 사건이 벌어집니다.
대충 미드 <위기의 주부들> 배경인 ‘위스테리아’ 같은 교외주택단지를 떠올려보세요. 거기서 지나치게 화사한 꽃이나 너무 힘준 정원을 좀 지우고, 평화로운 분위기만 더하시면 됩니다.
그런 조용한 동네에 사건이 발생합니다. 십 대 후반의 청소년 둘이 술에 취해서 한밤중에 남의 집에 침입해 물건을 부수고, 자동차 타이어를 펑크 내고, 잔디가 깔린 정원을 망쳐버립니다. 한두 집이 아니에요. 인접한 여러 집에 줄줄이 테러를 벌인 거죠.
이 사건은 엄청나다면 엄청나지만 별거 아니라면 별거 아닌 사건일 수 있습니다. 저 멀리서 보면 술이나 약에 취한 젊은이의 난동이 뭐 그렇게 특별하겠습니까? 물론 들여다보면 좀 다릅니다. 평화로운 교외지역에서 안온하게 살던 주민들에겐 그야말로 날벼락같은 일이죠.
멀쩡하던 현관 스테인드글라스가 박살 났는데 그걸 다 치우고 다시 설치하는 게 쉽겠습니까?
중요한 계약이 있는 날, 대중교통도 없는 동네에서 타이어와 사이드미러가 박살 나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면 얼마나 괴롭겠습니까?
남들이 볼 땐 평범한 도자기겠지만,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아들의 유품이라 소중히 간직해 왔는데 아침에 깨어보니 그게 완전히 박살 나 있어요. 무척 안타까운 일이죠.
보통은 경찰이 범인을 잡고 청소년임을 확인한 후 매뉴얼에 따라 재판을 받고 처벌을 받게 합니다. 소년원 같은데 보내는 거지요. 그런데 당시 사건을 벌인 십 대를 맡았던 보호관찰관은 다른 선택을 합니다. 왜냐하면 이런 일이 수없이 많이 반복되었지만, 피해를 입은 사람들의 아픔은 보듬어지지 않았고, 이런 짓을 한 아이들도 반성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계속 반복될 뿐이었죠. 그래서 그는 판사에게 부탁합니다. 형집행을 잠깐 미루고 피해를 입은 사람과 이 가해 청소년이 대면해서 이야기를 나누게 한 후 처분을 진행하자고요. 원래는 깐깐하고 바로바로 이런 아이들을 소년원에 보내는데 주저 없던 ‘매뉴얼대로’ 판사는 어째서인지 이번만은 순순히 그러자고 합니다. 이 판사는 당시 범인들 중 한 명의 형을 이전에 비슷한 일로 감옥에 보낸 적이 있는데, 그게 마음에 걸려서 그런 판단을 했을 수도 있습니다.
여하튼 이렇게 결정이 나서 보호관찰관은 아이들에게 피해자를 만나러 가자고 합니다. 당연히 아이들은 싫다고 펄쩍 뜁니다. 그냥 감옥에 보내라고. 그렇게 끝내자고. 그들은 자신들의 저지른 짓을 직면할 용기가 없습니다. 피해자를 볼 면목도 없고요. 볼 거라고 생각도 안 했습니다. 그냥 감옥에 가겠거니 했죠.
보호관찰관은 아이들을 데리고 대면에 동의한 피해자들의 집을 차례로 방문합니다. 놀랍게도 두어 집을 제외하고 모두들 피해자를 만나겠다고 합니다. 피해자들 모두 자신이 왜 이런 일을 당했으며, 누가 이런 짓을 했는지 궁금했거든요. 또한 이 일로 자신이 어떤 피해를 입었는지 피해자에게 말하고 싶어 했습니다.
피해자와 가해자가 만나고 양쪽 다 놀라게 됩니다. 피해자는 막연히 어둠 속의 늑대처럼 상상했던 가해자가 평범하고 수줍음 많은 십 대 소년이라는 사실에 놀랍니다. 가해자는 자신들이 저지른 짓이 단순히 물건을 부순 게 아니라 그들의 일상을 파괴했으며 고유한 삶의 궤적을 뒤흔들었다는 걸 알게 됩니다. 중요한 계약을 놓치고, 아들의 유품을 잃었으며, 안전하다고 믿었던 교외의 삶을 불안으로 가득하게 만들었으니까.
가해 청년들은 피해자들이 겪은 피해를 찬찬히 다 듣고서 깊이 뉘우치게 됩니다. 그리고 보호관찰관이 나서기도 전에 자신들이 어떻게 하면 이 피해를 조금이라도 복구할 수 있을지 알려달라고 합니다. 수많은 피해자 가정은 다양한 방법을 이야기합니다. 누군가는 진심 어린 사과로도 만족하고, 누군가는 피해금액을 요구합니다. 어떤 사람을 정원의 잔디를 한 달 동안 깎으라고 하고 누군가는 집안 청소를 하라고 합니다.
그렇게 피해자와 가해자가 협상을 통해 피해를 복구하려는 활동을 시작하게 됩니다.
이 과정의 에피소드 중엔 인상적인 장면도 많았어요.
가해청년들이 한낮에 땀을 뻘뻘 흘리며 피해자 정원의 잔디를 깎는데 집주인이 나와 BBQ를 해 고기와 시원한 음료수를 줍니다. 집주인은 채식주의자인데 고생하는 청소년들을 배려한 것이죠. 그 배려에는 양육환경이 좋지 못했던 그 청년들에 대한 안타까움도 있습니다. 집 정원에서 부모와 바비큐파티를 해보지 못한 그들이 이번 기회에 그런 기분을 맛보라는 배려인 거죠.
그렇게 피해가정은 나름의 방식으로 피해를 복구하게 됩니다. 완벽한 보상은 불가능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들의 삶에 침입한 괴한이 형체를 알 수 없는 괴물이 아니라, 불우한 환경을 가진 청소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자, 심각했던 마음속 불안을 떨쳐낼 수 있었다고 합니다.
또한 가해 청소년들 역시 자신들의 행위가 어떻게 사람들의 삶을 파괴하고, 나아가 공동체를 위태롭게 하는지 깨닫게 됩니다.
이러한 화해의 경험은 보호관찰관 아저씨의 내면을 크게 뒤흔들었고, 이후 우여곡절을 겪으며 지역공동체에 ‘회복적 정의’ 센터를 세우게 만듭니다.
뭐, 대충 이런 얘기입니다. 디테일은 틀린 게 많지만 대략의 흐름은 이러합니다.
위의 이야기는 매우 감동적입니다.
어쩌면 이상적인 공동체를 바라는 이들에 의해 약간의 MSG가 더해졌을지도 모르죠.
하지만 이야기로서 충분한 설득력을 가집니다. 만일 저런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사회전체의 갈등조정 비용을 낮추는 좋은 대안이 될 수 있을 겁니다.
그렇게 회복적 정의의 수업초반은 기원 이야기로 시작해 다양한 주변의 이야기로 뻗어나갔습니다. 실제 벌어졌던 우리 주변의 갈등들. 그러니까 학교폭력 내지는 동네 사람들 간의 다툼 같은 거 말이죠.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나? 과연 기존의 해결방식이 피해자의 마음을 보듬고 가해자의 재범을 멈추게 하고 있는가?
생각할 거리가 많았고, 여러 층위의 입장이 되어 진지하게 고민해 볼 수 있어 즐거웠습니다.
특히나 우리 수업원들끼리는 ‘빙의’라고 했는데 가해자, 피해자, 일반대중, 특수관계자 등등의 입장이 되어 자기 의견을 내세우고 토론했는데 즉흥극을 하는 것 같아 신선했습니다.
제가 언론의 주목을 받는 학폭사건 학교의 교장이 되니깐, 아주 그냥 어떻게든 사건을 축소 은폐하려고 기를 쓰게 되더라고요. 아주 자연스럽게. ㅎㅎ 그렇게 경험하고 나니, 아 그들이 그래서 그랬구나..라는 아하! 가 와서 좋았습니다.
이 이야기가 어떤 도움이 될지 모르겠지만, 제가 이전 글에서 밝혔듯, 이웃끼리 나누는 작은 소통이 되면 좋겠다 싶어 적어봅니다.
2023년 2월 18일에 아파트온라인카페에 작성
서클은 간략히 언급했었는데, 둥글게 둘러앉아 대화를 나누는 겁니다.
그렇다고 막 아무렇게나 하고 싶은 말 하는 건 아니고, 단순한 규칙이 있습니다.
◎ 토킹스틱을 가진 사람만 이야기를 할 수 있습니다.
◎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경청합니다.
◎ 서클은 처음부터 끝까지 유지되어야 합니다.
◎ 서클에서 나온 이야기는 비밀이 보장되어야 합니다.
‘토킹스틱’은 (손에 쥘 수 있는 물건이면) 무엇이든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상징을 담을 수 있다면 훨씬 좋습니다. 토킹스틱은 진행자가 가져오는데, 서클 시작 때 토킹스틱에 담긴 의미를 간단히 설명하고 시작하면 금상첨화랍니다.
제가 몸담은 동아리 멍냥토크회는 치실장난감에 고양이모양 브로치를 매달아 토킹스틱으로 삼았습니다. 강아지와 고양이를 함께 상징하는 물건이잖아요. 손에 쥔 감촉도 포근하고요.
다른 분이 진행한 서클에서 계절을 상징하는 나뭇가지를 가져와 토킹스틱으로 사용했는데 그 느낌은 정말 근사했습니다. 손에 가을을 쥐고 이야기를 나누니 멋질 수밖에요!
진행자는 질문을 던지고 토킹스틱을 왼쪽이나 오른쪽으로 일정하게 돌아가게 합니다. 토킹스틱을 받은 사람은 진행자의 질문에 자기 생각을 말하면 됩니다.
경청은 기본적인 대화 매너죠. 특히 의식적인 경청은 꼭 해보시길 권합니다. 평소 아무 생각 없이 목구멍으로 넘기던 짜장면을 꼭꼭 씹으며 무슨 맛인지 파악하고, 재료를 떠올려보는 것과 비슷합니다. 다른 사람의 말에 담긴 의미, 말의 맛, 그리고 화자의 마음까지 아스라하게 알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열심히 경청하다 보면 마음이 살짝 촉촉해져요.
서클의 유지란 건 다른 이들을 위한 배려입니다. 누가 한창 이야기 중인데 갑자기 화장실을 가거나, 전화를 받으면 집중력이 흩어집니다. 이런 행동이 서클의 흐름을 깰 수 있어 사전에 멤버들에게 부탁합니다. 미리 화장실 다녀오시고, 전화 등은 자제해 달라고요.
비밀유지는 서클이 편안하고 안전한 대화모임이 되기 위해 필요합니다. 그래서 진행자는 서클 시작할 때 여기서 나온 얘기는 바깥에 하지 말아 주십사 부탁합니다.
서클은 위의 규칙을 기본으로 해서 다양한 대화모임에 응용할 수 있습니다.
관계형성, 문제해결, 기억, 애도, 감정표현하기 등등등...
개인적으로 느낀 서클의 효능(이라고 쓰니 식당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장어의 효능, 능이버섯의 효능, 같은 안내판 같네요. ㅎㅎㅎ)을 알려드리고 싶은데 저에겐 좀 드라마틱하게 다가왔어요.
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214091751
개인적으로 ‘오만과 편견’ 수준으로 사랑에 빠지는 과정을 기가 멕힐 정도로 잘 표현한 소설이 위의 작품 ‘모리스’라고 생각합니다. 참고로 ‘모리스’는 ‘전망 좋은 방’, ‘하워즈 엔드’등으로 유명한 E. M 포스터의 소설로 제임스 아이보리 감독에 의해 영화화되었고 책과 영화 모두 좋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주인공 모리스가 과거 연인이었던 클라이브의 집에 묵을 때 그 집 하인인 하층계급 청년 스커더와 마주칩니다. 스커더의 어딘가 거슬리지만 딱 짚어 말할 수 없는 불손한 태도, 이유가 불분명한 잦은 마주침 등이 점진적으로 묘사되고, 마침내 보름달이 뜬 날 밤 금색 꽃가루를 머리에 뒤집어쓴 스커더와 정원에서 맞닥뜨리며, 모리스는 자신이 사랑에 젖어들었다는 걸 깨닫게 됩니다. 이야기의 배경처럼 보이던 인물이 서서히 자신을 드러내더니 갑작스럽게 입체적으로 튀어나와 주인공 눈앞에 나타나는데 그 묘사는 정말 감탄이 절로 나올 정도로 훌륭했습니다.
제가 왜 이런 얘길 하냐 하면 서클을 통해 위원 중 한 분이 그렇게 제 마음에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오해하실 것 같은데 사랑 고백 아닙니다;;;)
그분은 저와 같은 라인에 살아요. 몇 번 마주친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분의 외형만 얼핏 기억했습니다. 내 또래에 중키에 보통 체격, 안경을 꼈다. 그게 다예요.
솔직히 말해 그분은 이 아파트에서 생활하는 저라는 사람의 배경일뿐입니다.
다 그렇잖아요. 각자의 인생에서 주인공은 자기 자신이고 가족이나 친구는 중요한 조연이며 나머지는 그냥 배경... 그분은 저의 지축살이 배경이었습니다. 이 아파트에 저 말고 다른 사람이 살고 있다는, 영화 트루먼쇼의 주인공 곁을 지나가는 엑스트라....
그런데 그분이 회복적 정의 수업을 신청하셨더라고요? 1차로 관심이 갑니다.
오? 이런 쪽에 관심 있는 사람인 줄 전혀 몰랐네...
하지만 개인 일정으로 수업 초반에 참여를 못하셨어요. 그래서 그런가부다 했는데...
이후 출석하셔서 서클을 통해 그분을 조금씩 알게 됩니다.
자녀가 있고, 이놈들이 말을 너무 안 듣는데 어떡하면 말을 잘 듣게 할까? 어떡해야 적극적으로 집안일을 돕게 만들까? 고민하다가 회복적 정의 수업이 소기의 목적달성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하셨답니다.
웃음이 납니다. 아니! 그런 불순한 동기라니, 동시에 이해도 갑니다. 말 안 듣는 십 대 자녀를 바꾸고픈 건 선사시대 이래 인류가 계속해왔던 고민이니까요.
그분은 삼겹살이 소울푸드라고 했어요. 어릴 적 가족이 둘러앉아 구워 먹은 고소한 삼겹살의 추억이 가슴속 깊은 곳에 자리하고 있다고요. 그래서 자녀들에게 삼겹살을 사랑하게 만드는데 공을 많이 들이셨답니다. 아내분이 뒤처리 때문에 난감해했지만, 아이들이 좋다는데 어쩌겠습니까? 그리고 그렇게 접하다 보니 이제는 온 가족이 삼겹살을 다 좋아하게 되었고요.
듣기만 해도 마음 한구석이 따듯해지는 이야기입니다.
8주간의 수업이 끝날 무렵 저는 그분을 더 이상 제 배경으로 여길 수 없게 되었어요. 나와 같은 라인에 살고. 삼겹살을 좋아하고 자녀와 대화하려고 애쓰는 어떤 사람, 나처럼 해야 할 일, 하고 싶은 일이 있고, 제대로 살기 위해 고민하는 사람. 그분은 저에게 처음과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다가왔습니다.
마치 납작한 종이에서 입체적인 무언가가 튀어나온 것처럼 느껴졌는데, 이 감각, 이 느낌 어디서 본 거 같은데... 하다가 소설 모리스에서 주인공이 사랑에 빠지는 묘사랑 똑같잖아! 하는 깨달음이 왔습니다. ㅎㅎㅎ
그래서 저는 서클을 아주 좋아합니다.
기회가 되면 해보라고 사람들 만날 때마다 권합니다.
불편한 자리를 부드럽게 만들고, 내 앞에 있는 사람이 나와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존재임을 깨닫게 해 줍니다. 이렇게 관계가 형성되면 갈등은 다루기 수월해집니다.
서클은 관계를 형성하는데 효과적인 대화법이고 실천도 어렵지 않습니다.
이 글을 읽는 여러분들도 당장 일상에서 시도하실 수 있어요.
위의 후기글처럼 서클은 다양한 상황에서 사용된다. 낯선 사람들이 친목을 도모할 때, 소풍 떠난 반려동물을 애도할 때, 공동체나 소조직에 발생한 문제를 해결할 때 등등. 이때 회복적 정의 전문가는 서클의 성격에 맞는 기획서를 준비한다. 운 좋게도, 우리 멍냥토크회에는 나 말고도 회복적정의 교육을 받은 회원 GJ가 있었다. 서클기획자가 둘이나 있으니, 서로 힘을 합치면 10월부터 시작되는 모든 행사에 관계형성서클을 진행할 수 있다는 계산이 섰다. 나는 GJ에게 소통관이라는 이름으로 멍냥토크회 임원을 부탁했고, GJ의 수락으로 행사기획에 탄력이 붙었다. 그리하여 12월까지 진행하는 모든 행사의 앞단에 '참가자 인사나누기'라는 식전(?) 행사인 척하는, 관계형성서클이 1시간가량 들어가게 되었다.
행사를 기획했던 임원들은 의욕이 충만했다. 정치적 딜로 시작된 행사지만, 행사자체가 공동체에 이바지하는 부분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다른 반려동물 이웃과 인사하며 잘 지내고 싶었고, 마을을 위한 활동을 하게 된 데에 보람을 느꼈으며, 이러한 노력이 반려동물을 우리 공동체의 일원으로 인정받게 하는 첫 발걸음이라 여겼다. 행사가 크게 흥행 못해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이런 과정자체가 여기 공동체아파트에서 사는 추억이 될 거라 믿었기 때문이다.
돌이켜보면 복선은 충분했다. 나를 포함한 열 명의 마을 주민은 두 달간 주말을 반납하며 회복적정의 수업을 들었다. 이 과정을 수료하면 '갈등조정(소)위원회'의 위원이 되어 마을일을 하도록 되어있다. 조합의 공적기구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교육이 끝날 때까지 단 한 번도 상임이사 JW나 이사장 AY, 혹은 (갈등조정위원회의 상위 위원회인 약속위원회 위원장) 이사 JU가 와서 앞으로 잘 부탁한다는 의례적인 인사 한마디 없었다. 그래서 수업을 들은 대부분의 사람이 갈등조정(소)위원회가 약속위원회에 속한 위원회인 것도 몰랐고, 약속위원회 이사가 누군지도 몰랐다. 회복적정의 선생님을 첫 대면하는 순간부터 3급 자격증 시험을 치르고 수료식을 할 때까지 그랬다. 교육받는 주민 중엔 사무국 직원이 두 명이나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어디까지나 개인자격으로 온 것이지 직원으로 수업에 참가한 것이 아니었다. 이사장 AY나 상위위원회의 이사 JU는 바깥에 직업을 가졌으니 개인사정으로 못 온다 치더라도 조합 사무국에서 상근 하는 상임이사 JW는 어째서 한 번도 얼굴을 비추지 않았을까? 의문스러웠다. 지금 생각해 보니 이런 방치가 바로 우리 행사의 과정에서 일어날 일들의 복선이었다. 조합이 우리를 어찌 대할지 가늠할 수 있는.....
시간이 촉박했던 관계로 첫 번째 행사인 '반려동물 초상화 그리기 원데이 클래스'는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재빠르게, 하지만 꼼꼼하게 진행되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사무국은 슬금슬금 애초의 약속에서 벗어난 태도를 보이기 시작했다. 이 이야기는 나중에 이어서 해보겠다. 참으로 흥미진진한 반전이 연속하는, 아파트 공동체살이가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