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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빛나는 윤별경 Oct 15. 2024

꼴통년(?)이 온다


"꼴통년이 온단다"


옆집에서 전화를 받고 온 엄마는

헐떡헐떡거리며, 대문을 박차고

신고 있던 고무신을 발로 차서

벗어던지며,

"집 치우자" 하신다.

엄마의 말 한마디에 우리

초 비상이 된다.

엄마도 버거워하는 엄마동생다.


오빠군대있을때 이모와 찍은사진


우리 이모는 외갓집의 꼴통이었다.

외할아버지는 항상 한복에

상투 틀고, 흰 수염 가지런히

빗질하시고, 서예와 시조

창소도 잘하신 분이셨다.


종갓집 맏어른이셔서 환경이

그렇게 만들어졌을 것이다.

맏이인 엄마와 이모. 외삼촌두분.

그중에 이모는 돌연변이였다.

60년대에 미니스커트를 입고

다니셨으며, 쌍꺼풀 수술도 하셨다.

춤과 노래도 뛰어난 이모는

미 8 군부대공연다녔었다.


외할아버지께서 아시고는

끌려내려 오기 전까지는

이모의 생활은 화려하였다.


외할아버지께서는

이모를 시집을 보내려 했으나,

이모는 싫다며

몇 번이나 퇴짜를 았다.


노처녀로 늙어가게 될까 봐

아버지께서 후배군인을 소개해

주었고, 두 사람은 마음에 들어

약혼날까지 받게 되었다.


약혼 앞두고 있었던 어느 날

이모는 그 남자가 아이까지 있는

유부남인걸 알게 되었고,

그 원망은 제대로 알아보지 못한

아버지에게 돌아가 난리를 쳐댔다.


아버지께서 잘못한 건

틀림없 일이다

아버진 몇번이나 이모에게

사과를 하셨지만, 이모는 끝끝내

아버지의 말을 무시하였고,

본인에게 말을 하지말라고

엄포를 놓았다.


죽는 날까지 이모는 아버지와

화해 아들이지 않았다.

이모에겐 그 일이 엄청난

상처였을까?

이모는 결혼을 하지않았다.


우리는 이모를 이해하기도

하였지만, 지독한 고집의

 성을 가진 이모였다.


이모는 깔끔했으며, 음식솜씨도

좋았고, 모든 센스가 뛰어났다.

대구에서 음식점을 셨는데

솜씨도 좋았지만 장사수완도

뛰어났던 이모는 게매출이

승승장구였고, 큰 돈을 벌었다.


년에 한번씩 더운 직원에게

모든 걸 맡겨놓고 우리 집에

정도 쉬러 왔었다.

아마도 군이셨던 아버지의

부재가 편안할수 있었을 것이다.

아버진 일년에 두.세번 집에

오셨기 때문이다.


우리 집 온 이모는

집을 발칵 뒤집어 놓는다.

부엌과 옷장을 다 뒤집어

깔끔하게 정리해 주고,

매번 씻고 쓸고 닦으며

잔소리까지 포함해서

매일 시끄러운 집이 된다.


내가 처음으로 기억하는

이모는 6살 때였다.

방안에 큰 빨간 고무다라이

물을 받아 엄마와 이모가 나에게

그 통에 들어가라고 했다.

뜨거운 물이 싫어 울고 있으니,


"이노무 가나. 가나가 깨끗하게

지내야지. 온 동네 놀다가 꼬질해가

어디 잘라카노 빨리 씻자"


이모의 호통소리에 잔뜩 겁을 먹고

1시간 넘게 이모에게 몸을 맡겼다.

그 어린애가 1시간 넘게 나올

때는 있었을까?

얼마나 세게 미는지. 아프다

말도 하지 못하고, 울지도 못한

나는 기절하다시피 해서

라이에서 구출되었다.

이모는 나에게 충격과 공포였다.


이모 동네할머니들과

자주 어울리며 10원짜리 화투를

치기도 하였다.

돈을 잃게 되면 집에 와서

온갖 신경질을 부

마당에있는 세수대야는

화풀이 상대였다.


어느 날 작은언니 듣다가

"이모가나. 짜증 낼 거면

집에 가라. 인자 우리집 오지 마라"


이모는 프라이팬 들고

언니 때릴려고 달려나가고

언니는 멀리 도망가곤했다.

언니는 핸드볼선수기에,

달리기를 잘하여 잡을수가

없어 이모는 씩씩거리며 왔고

언니는 깜깜한밤이되어 집에

돌아오게 되었다.

작은언니이모서로

으르렁 거리며 매번 부딪혔다.


하지만 이모가 무언가 틀어져서

밥을 지않고, 문을 잠가버리면

달래서 밥 먹게 하는 사람

작은 언니였다.




외할아버돌아가신 날.

1980년 12월 31일이었다.

78세로 돌아가셨는데,

눈이 엄청 왔었다.

절대 울지 않을 것 같은 이모는

통곡을 하며 울어다.

이모우는 모습 처음 보았다.

그때 나는 깨달았다.

아! 이모 울 수도 있구나.


발인 전 마지막 날

이모는 팝송 틀어놓고,

와인 마시며 할아버지 영정 앞에서

대가족 모인 어른들 앞에서

춤을 추었다.


작은 외할아버지들, 외할머니들

혼내셨지만 "아버지 호상인데

마지막날 즐겨야지요."

오빠를 불러서 오빠랑 같이

춤을 추었다. 가족들도 웃으며

외할버지 마지막을 보내드렸다.

그리

이모는 우리곁을 떠났다.

이모의 행방을 아무도 몰랐다.


20년 훨씬 지나고 나서야 이모는

 어느 요양원에 계신다고 했다.

이모랑 작은언닌 껴안고

엄청 울었다. 이모는 자궁암이라는

진단을 받고 모든 걸 정리하고,

아무에게 이야기하지 않고

혼자 입원수술하였고

조용히 요양원으로 오셨단다.


모은 재산은 80년대 당시

2억 넘는 돈을 암센터에 기증하고

자기가 요양원 있을 돈 3천만 원을

주고 계셨고했다.

이모성격이 워낙 깔끔하여

가족들에게도 추한 모습을

보여주기 싫었던 것이다.

우리가 찾아간다고 해도

절대로 못 오게 하시더니

몇 번의 요구에 언니랑 내가

갔던 거였다.


이모는 엄마보다 5년 전

82세에 돌아가셨다.

이모는 자기 장례비용까지

요양원 관계자에게 남겨주고

가셨고, 남은 돈 이천만 원은

외삼촌과 엄마의 바으로

요양원에 기부하되었다.


이모는 본인성격대로 깔끔하게

이 세상을 사셨으며, 정리잘 된

삶으로 이모다운 엔딩이었다.


이모가 있는 추모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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