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의 문장들(2004, 김연수)

말하기와 글쓰기는 치유하는 행위다.

by 파스카

공감이 아니라 체감이다.


청춘은 들고양이처럼 재빨리 지나가고, 그 그림자는 오래도록 영혼에 그늘을 드리운다.


p31

집이 있어 아이들은 떠날 수 있고, 어미 새가 있어 어린 새들은 날갯짓을 배운다.

내가 바다를 건너는 수고를 한 번이라도 했다면, 그건 아버지가 이미 바다를 건너왔기 때문이다.


p33

내가 삶이라는 건 직선의 단순한 길이 아니라 곡석의 복잡한 길을 걷는다는 사실을 깨닫는 그때다. 그게 사랑이든 복권 당첨이든, 심지어는 12시 가까울 무렵 버스를 기다리는 일이든 그 즉시 내 손에 들어오는 것은 하나도 없다.


p38

'상실의 시대'에는 '죽음은 삶의 대극으로서가 아니라 그 일부로서 존재해 있다'라는


p42

어린 시절이 지나고 옛일이 그리워져 자주 돌아보는 나이가 되면 삶에 여백이 얼마나 많은지 비로소 알게 된다.


p45

그 즈음 창 밖을 내다보면 뭔가 지나가는 게 언뜻언뜻 눈에 보였다. 바람이라고 생각하겠지만, 그건 덧없이 흘러가는 세월이었다.


p49

낯설어진 고향 거리를 걸어갈 때면 유령의 형상으로 보이는 이들이 있다. 그 사람들은 모두 어디로 간 것일까? 다른 어떤 동물도 죽을 줄 아는 길로 걸어가지 않는데, 왜 사람만은 그게 자기를 파멸시키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스스로 눈을 찌르는 것일까?


p53

사이에 있는 것들, 쉽게 바뀌는 것들, 덧없이 사라지는 것들이 여전히 내 마음을 잡아 끈다.

마음을 잡아 끄는 그 절실함을 문장으로 옮기는 일. 쓸데없다고 핀잔준다 해도 내 쓸모란 바로 거기에 있는 걸 어떡하나.


p59

로이를 국제적인 작가로 만든 '작은 것들의 신'이다. 로이는 이 소설 한권으로 영국 최고의 문학상인 <부커상>을 수상하고 전세계 22개국에서 번역되는 큰 행운을 누렸지만, 인터뷰에서 자신만을 위해 쓴 소설이란은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


p60

키친 테이블 노블이라는 게 있다면, 세상의 모든 키친 테이블 노블은 애잔하기 그지없다. 어떤 경우에도 그 소설은 전적으로 자신을 위해 씌어지는 소설이기 때문이다.


p62

나는 두번 다시 키친 테이블 노블 같은 것은 쓰지 못했다. 세상의 모든 키친 테이블 노블이, 그리고 그런 소설을 쓰는 사람이 애잔한 까닭은 첫사랑을 닮았기 때문이다.


p66

그저 '나는 지금 소설을 쓰고 있다' 그 문장뿐이었다. 그리고 그때까지 살아오면서 받았던 모든 상처는 치유됐다.


p68

'벽'이란 병이 될 정도로 어떤 대상에 빠져 사는 것, 그게 사람이 마땅히 할 일이라면 내가 문학을 하는 이유는 역시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다.

나는 왜 문학을 하는가? 그때 내 존재가 가장 빛이 나기 때문이다.


p69

나는 완전히 소진될 때까지 글을 쓸 수 있다. 이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다. 1968년 프랑스에서 학생운동이 극에 달했던 시절, 바리케이드 안쪽에 씌어진 여러 낙서 중에 'Ten Days of Happiness'라는 글귀가 있었다고 한다. 열흘 동안의 행복. 그 정도면 충분하다.


p75

우린 그저 철책을 사이에 두고 웃을 뿐이었다. 눈보라가 쏟아져 금강산의 '금'자도 보지 못했지만, 나는 그 아이들의 웃음을 봤다.


p78

사회인. 이 말은 이제 내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어울려야만 살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뜻했다. 1995년 여름의 일이었다. 그러나 여전히 나는 사람들과 어울리는 방법을 알지 못했다.


p80

그대는 보지 못하는가

황하의 물이 하늘에서 내려와서

흘러서 바다로 가서는 다시 돌아오지 못하는 것을

그대는 보지 못하는가

높다란 마루에서 거울을 보고 백박을 슬퍼하는 것을

아침에 푸른 실 같던 머리가 저녁에 눈처럼 된 것을


p84

하늘이 나 같은 재질을 냈다면 반드시 쓸 곳이 있으리라

천냥 돈은 다 써버려도 다시 생기는 것을

양을 삶고 소를 잡아서 우선 즐기자

한꺼번에 삼 백 잔은 마셔야 된다


p85

'君不見'이라는 그 세마디는 결국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이 보이지 않느냐는 말이었다.


p89

매미소리가 천지를 울리다가 문득 멈춘 상태. 그 찰나적인 상태가 바로 견딜 수 없는 삶의 여백이자, 죽음의 적막이니까.


p92

시간흔 흘러가고 슬픔은 오랫동안 지속된다.


p96

세상에 똑같이 생긴 돌이 없듯이 같은 유형의 사람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우리는 저마다 자신의 유형일 뿐입니다. 우리가 다른 누군가의 삶을 살아갈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여 있는 것입니다.


p97

우리 삶이란 눈 구경하기 힘든 남쪽 지방에 내리는 폭설 같은 것. 누구도 삶의 날씨를 예보하지 못합니다.

세월이 흐르고 나면 우리는 아마 다른 유형의 인간으로 바뀔 것입니다. 서로 멀리, 우리는 살아갈 것입니다.


p100

액자 안에는 '소년은 내일은 또 다르리라 생각하고 살았답니다'였던가 '봄 가을 없이 밤마다 돋는 달도 예전엔 미처 몰았어요'였던가


p106

누구에게나, 무슨 일이거나 처음 마음이 있다고 생각한다. 갓 태어난 아이의 눈과 귀처럼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을 아무런 조건 없이 받아들이는 시간이 있다.


p100

자신이 어설프게만 느껴진다면 밥 딜런의 말처럼 '소리를 키우도록'. 때로는 단순히 소리를 키우는 것만으로도 역사적인 음반에 참여한 역사적인 키보디스트가 탄생하기도 하니 말이다.


p119

서른 살 너머까지 살아 있을 줄 알았더라면 스무살 그 즈음에 삶을 대하는 태도는 뭔가 달랐을 것이다.


p123

단 하루가 지난 일이라도 지나간 일은 이제 우리의 것도, 살아 있는 것도 아니다. 시간을 되돌린다고 하더라도 그 눈빛을 다시 만날 수 없다.


p130

누군가가 나도 잡아갔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곳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겨울은 영원히 계속될 것만 같았다. 그해 겨울, 우리는 겨울이라는 곳에 살고 있다고 생각했다.


p132

꽃시절이 모두 지나고 나면 봄빛이 사라졌음을 알게 된다. 천만 조각 흩날리고 낙화도 바닥나면 우리가 살았던 곳이 과연 어디였는지 깨닫게 된다. 청춘은 그렇게 한두 조각 꽃잎을 떨구면서 가버렸다.


p139

윤리 시간에 배웠듯이 측은해서가 아니라 관음보살 자신의 몸이 너무 아프기 때문에 흘리는 눈물이었다. 마음에서 비롯한 게 아니라 몸에서 비롯한 눈물이었다.


p141

예술이란 결국 마음이 통하는 게 아니라 몸이 통하는 것이라는 걸 깨닫던 그때의 일들이 어제인 듯 또렸하다.


p142

청춘은 그런 것이었다. 뜻하지 않게 찾아왔다가는 그 빛도 아직 사라지지 않았는데, 느닷없이 떠나버렸다.


p157

삶의 길은 올라갔다가 내려오기도 하고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가기도 한다. 하지만 그 어떤 경우라도 상심에 이러면 안된다. 슬프되 상심에 이러지 말자. 잘 살아보자.


p164

인생이란 취하고 또 취해 자고 일어났는데도 아직 해가 지지 않는 여름날 같은 것. 꿈꾸다 깨어나면 또 여기, 한 발자국도 벗어날 수 없는 곳.


p191

사랑하는 것은 쉽다. 그것이 사라질 때를 상상할 수 있다면.

그 모든 것들이 곧 사라질 텐데,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p194

스승이라고 부를 만한 사람들이 우리 삶에 존재하는 뜻은 우리 같은 사람들도 이 세상을 더 밝고 멀리 보라는 까닭이다.


p195

내가 배운 가장 소중한 것은 내가 어떤 사람일 수 있는지 알게 된 일이다. 내 안에는 많은 빛이 숨어 있다는 것, 어디까지나 지금의 나란 그 빛의 극히 일부만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 일이다.


p199

왜냐하면 나 혼자 힘으로 이겨내는 방법밖에는 그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p202

어둠을 똑바로 바라보지 않으면 그 어둠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 제 몸으로 어둠을 지나오지 않으면 그 어둠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 어둡고 어두울 정도로 가장 깊은 어둠을 겪지 않으면 그 어둠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 그건 중학교 2학년생에게는 너무 가혹한 수업이었지만, 또 내 평생 잊히지 않는 수업이기도 했다.


p207

봄빛이 짙어지면 이슬이 무거워지는구나. 그렇구나.

이슬이 무거워 난초 이파리 지그시 고개를 수그리는 구나.

누구도 그걸 막을 사람은 없구나. ... 울어도 좋고 서러워해도 좋지만,

다시 돌아가겠다고 말해서는 안되는 게 삶이로구나.


p219

보지 않으면 보고 싶었고 만나면 즐거웠다. 이런 걸 사랑이라고 하는 것일까? 하지만 거기에는 대단히 중요한 뭔가가 결여돼 있는 듯 보였다. 지금 생각하면 만나면 만날수록 괴로워지는 어떤 것, 괴로우면 괴로울수록 감미로워지는 어떤 것, 대일밴드의 얇은 천에 피가 배어드는 것을 느끼면서도 스케이트를 지칠수밖에 없는 어떤 마음, 그런 마음이 없다면 사랑이라고 부를 수 없는 게 아닌가는 생각이 든다.


p 224

어떻게 무엇으로 바뀌든 바뀌어 간다는 것, 그게 바로 인생이다.


p229

가장 낮은 곳에 이르렀을 때, 산 봉우리는 가장 높게 보이는 법이다. 그리고 삼나무 높은 우듬지까지 올라가본 까마귀, 다시는 뜰로 내려앉지 않는 법이다. 지금이 겨울이라면, 당신의 마음마저도 겨울이라면 그 겨울을 온전히 누리기를. 이제는 높이 올라갈 수 있을 테니까.


p236

깨달음은 언제나 착하다.


p242

봄빛이 짙어지면 이슬이 무거워지는 구나. 그렇구나. 이슬이 무거워 난초 이파리 지그시 고개를 수그리는구나. 누구도 그걸 막을 사람은 없구나. 삶이란 그런 것이구나. 그래서 어른들은 돌아가시고 아이들은 자라는구나. 다시 돌아갈 수 없으니까 온 곳을 하염없이 쳐다보는 것이구나. 울어도 좋고, 서러워해도 좋지만, 다시 돌아가겠다고 말해서는 안되는 게 삶이로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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