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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서현 Feb 16. 2024

쓰임의 존재

당신은 더 좋은 곳으로 가고 있나요.


“나이를 먹고도 계속 무명이면 어떻게 할래?”

내게는 가장 아프고 꽤 쓰린 질문이다.

친구들의 대학 졸업식이 있던 오늘,

나는 이런 상황을 몇 번씩 맞닥뜨릴 줄 알았겠나.

어렸을 적 나는 나이가 들면 저절로 뭐라도 될 줄 알았다.

순탄하게 자신이 원하는 길을 걸어가고, 무난한 학창 시절과 사회생활을 원했다.

결국 ‘나’라는 존재를 잃어버린 채 방황하기를 몇 년, 이제 누가 나를 대체해 줄 사람이 없다는 걸 알았다.

스무 살 중반이 되도록 흔들리는 사람이 되려고 그토록 힘들었나? 꽤 억울했지만 스스로를 자책했고,

나라는 사람을 어떻게 해서라도 하루빨리 증명해 보이고 싶어 불안하고 초조했다.


가장 좋아하는 유튜버이자 그림작가인 이연 님의 책에 나온 문장이 눈에 띄었다.

“무명을 즐겨라.”

“이 말은, 언젠가는 내가 작가가 된다는 것을 암시하는 주문인 동시에 지금 내가 자유의 몸이라는 의미이기도 했다.

이 문장을 읽은 후 나는 아무렇게나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나는 무명이니까, 사고를 쳐도 아무도 모르겠지.

급작스럽게 유튜브 채널이 커진 하룻밤 사이에 나는 무명을 잃었다.

영원할 것 같아도 언젠가 떠날 녀석이었던 거다.

여러분, 남들이 나를 모른다는 일은 나쁜 게 아니다. 그것은 곧 자유를 의미한다.

유명해진 이가 가장 그립게 추억할 시절이 무명이다.

‘아무도 너를 몰라. 그래도 괜찮니?’라는 이 미운 질문에 다시 한번 힘주어 대답하자.

몹시, 충분히 괜찮다고. “



이제야 오랫동안 내가 생각했던 프로젝트를 하나 둘 준비 중이다.

희미하고 흐렷했던 일들을 막상 시작하려니 두려움보단 책임감이 앞선다.

과연 내가 잘하고 있는지 끊임없이 되묻겠지만

나의 걱정보단 실천하는 실행력이 더 클 때 일을 치를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유도 없고 목적도 없다면 답이 안 나오겠지만,

되려 답답하다 못해 갈 길이 보이지 않을 때

어디로 갈지 몰라 머리를 싸매며 헤매고 있을 때 마인드맵을 그려보라고 했다.

‘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왜’

육하원칙에 따라 마인드맵을 그리다 보면 조그만 실마리를 찾지 않을까.​

무엇이든 시작할 용기와 그걸 실현하고자 하는 약간의 돈을 벌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그 돈의 가치가 무엇이든 나를 발전시킬 수 있는 계기가 되고,

결코 그 이상의 것을 실천할 수 있다면 당장 고민하지 말고 Go. 이게 나의 생각의 결괏값이다.

그 종잣돈으로 도화지에 그림을 그려 내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 파악했다.

어느 정도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정도는 알아야 결과물이 나오지 않을까?

여행할 때, 스스로 무언가를 이룰 때, 계획하고 결정해서 과정의 값을 치를 때.

내가 나를 알아가는 과정에서 ‘나’에 대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순간임을 느낀다.

쓰임의 존재는 순간의 선택들이 모여 이뤄진다는 것과, 도전해 볼 용기.

모든지 헛된 배움은 없다고 했으니 무엇이든 배울 점이 있다고 본다.

시작이 두렵고 망설이기 어려웠던 내가 결정을 내리는 것도, 아직은 서툴고 낯설다.

시간과 과정이 어떻게 흘러갈지 몰라 불확실하다.

어디가 나올지 예상 가능한 길과, 길을 헤맬 수도 있는 초행길.

“익숙하고 잘하는 A로 갈까요? 두렵고 떨리지만 하고 싶은 일인 B로 갈까요? “라는 질문에

“당연히 B로 가야죠. 나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어 플러스될 수 있는 기회인데!

잃는 것보다 얻는 게 더 많을 거예요. 적극적으로 B를 추천하고 싶어요.”라는 추천사와 함께.



안정권에 들면 떠나고 싶고,

떠나다가 좀처럼 방황하면 안정된 곳에 정착하고 싶어 주변을 뱅뱅 도는 사람 같았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마음들과 조각들을 한 곳에 모아두고 싶은데 그럴 시간은 없고

내게 주어진 시간 안에서 다른 생각 말고 열심히 충실할 수밖에 없던 날들.

“나는 지나간 과거보다 다가올 미래를 걱정해.”라고 했지만

사실 일어나지 않을 일을 편하게 맡기지 않는  내 마음이 가끔은 야속하기도 했다.

불확실하다고 느끼던 그 상황들이 눈앞에 나타났을 때 덜 당황하고 싶었다고.


결국 나는 창작자나 개인사업자가 체질에 맞았던 걸까?

치열하게 고민하고 싸운 흔적들을 한데 모아놓고 보니 나라는 사람이 조금은 보였다.

이걸 어떻게, 다른 취향으로 모여 세상 앞에 냉정하고 처절하게 내던져졌을 때

굴하지 않은 자존감과 자신감, 그런 나를 돌볼 줄 아는 포용력,

그를 비롯한 수많은 내면의 불안함을 이겨내고 다시 도전할 용기 등은 어디서 나오는지에 대해 고민하는 밤이 지났다.


물론 무언가를 이루고자 하는 마음이 걱정을 뛰어넘을 순간이 온다는 건 안다.

100% 걱정만으로 되는 게 아닌, 가다 보면 길이 나올 거라는 희망을 가지고 시작하는 것.

​“모든 걸 완벽하게 하려고 하지 마. 가다 보면 길은 저절로 넓혀질 거야. 시작하기 전 네 생각과 다르게.”

아는 것과 모르는 것 사이의 방황들.


어떤 이는 나에게 자신하냐고 물었고

어떤 이는 시작해보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며

용기가 나면 주저하지 말고 일단 저지르고 봐야 한다고 했다.

선택지는 정해졌고 주사위는 던져졌다.

이제 잘할 수 있을까보다 잘해야 한다는 생각뿐이다.

무엇보다 지금의 초심을 잃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는 과연 무엇이 될 수 있을까?

나는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나의 한계를 넘어 끝없이 발전을 위해 노력할 때 ‘나 자신’이 되어간다고 생각한다.


많이 성장하게 된 원동력은 나 자신으로부터 있다.


우리의 생각의 쓰임대로.

쓰임의 존재대로 쓰일 순간들 / 사물들 / 사람들 속에서.




봉준호 감독의 이야기로 돌아가,

그의 누나 봉지희 교수 인터뷰에 따르면

어린 시절 봉준호는 공부를 굉장히 잘하고 리더십도 있었지만,

조용하고 말수가 없었고 느렸고 특별히 끼가 있다거나 튀지는 않았다고 한다.

누나가 보았듯 모든 천재들이 어릴 때부터 대단하게 두각을 드러내지는 않는다.

우리에게는 트로피를 든 미소만 보이지만

그가 무대 뒤에서 흘린 많은 눈물은 보이지 않는다.

그의 진짜 재능은 흔들리지 않는 것이 아니라,

흔들리면서도 흔들려가며 자신의 일을 하는 데 있다.

강사의 말처럼, 그는 울면서 '하는'이다.

'울기만' 하는 이가 아니라.



어쩌면 재능이란 영재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좋아하는 일로 돈을 못 벌 것 같으면 해야 하는 일로 돈을 벌어서라도

좋아하는 일을 놓지 않는 꾸준함에 깃드는지도 모른다.

뒷골목에서 헤매고만 있는 것 같아 비참해지는 순간이 자주 오겠지만 울며불며하다 보면

생각 못한 순간 언저리에라도 도착할지 모른다.

그러다 또 언젠가는, 그 대단한 재능의 비결이 뭐냐고 물어오는 후배가 생겨날 수도 있는 것이고.

그러니까 결국 애매한 나를 견디는 법은, 엉엉 통곡할지언정 일단 목적지 근처라도 가서 맴도는 데 있다.​

정문정 <더 좋은 곳으로 가자> / (2021)




내가 겪은 바에 의하면 멋진 일은 대개 두려움을 동반한다.

우리가 두려워하는 그 여정은 험난하다.

그럴 때는 이 사실 하나만 기억하면 된다.

내가 지금 굉장히 멋진 일을 하고 있구나.

이 사실을 계속 떠올려야 한다.

우리는 싸워보지도 않고 많은 일들을 포기한다.

이를테면 내게 고민 상담을 요청하는 글들 중에서

미술 때문에 가난해졌다고 말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대부분 ‘가난해질 것 같다’라고 말한다. 차라리 겪어봐야 한다.


나는 실제로 부족한 돈과 불투명한 미래와 어중간한 재능과 무명까지 다 겪어봤다.

하지만 겪은 후에야 싸울 면역을 갖추게 되었다.

처음에는 누구나 진다.

그러니 이길 때까지 싸우고 샛길을 찾는 수밖에 없다.

그게 이기는 방법이다.


나는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 이런 생각도 했다.

‘또 내 자서전의 에피소드가 풍부해지고 있구나.’

참 얼토당토않은 이야기지만 그런 마음들이 꽤나 도움이 된다.

그러니까 우리가 그림을 그려서 가난해지든, 시작이 늦었다고 삿대질을 받든, 남들에게 치여서 아등바등 살아가든..

나는 당신이 일단 그림을 시작했으면 좋겠다.

이연, <겁내지 않고 그림 그리는 법> (2021)

나를 힘이 나게 했던 문장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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