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기념일
첫사랑이 바람에 일렁이는 파도처럼 떠오르는 아침이다.
밤새 불던 바람에 잠을 설쳤고, 부엌에서 밥솥이 울리는 소리에 눈을 떴다. 아직 이른 시간인데도 아내는 이미 일어나 아침을 준비하고 있었다.
아이 둘과 함께 살지만, 집에는 늘 우리 둘만의 시간이 흐른다. 서른 해를 함께 살았어도 맞춰 사는 일은 여전히 쉽지 않다. 잠드는 시간도 다르고, 좋아하는 것도 다르다. 다만 우리는 서로의 삶을 함부로 넘지 않는다. 그 거리가 쌓여, 생활은 오래 신어 발에 맞아버린 신발처럼 조용해졌다.
밥을 먹다 아내가 말했다.
“당신 하고 삼십 년을 살았는데 안 맞아도 너무 안 맞아.”
뜻밖의 말에 마음이 먼저 반응했다.
“내가 뭘 그렇게 잘못 살았다고 그래. 누구는 다 맞아서 사는 줄 알아?”
말을 남겨둔 채 방으로 들어갔다. 출근 준비를 마치고 나오는데 아내는 평소처럼 도시락을 내밀며 말했다.
“별 뜻 없이 한 말인데, 그렇게 화를 내면 어쩌냐.”
오늘이 결혼기념일이라는 말은 끝내 꺼내지 못했다. 마음에 남은 말을 그대로 둔 채 집을 나섰다.
회사 책상에 앉아 일을 하다 보니 오래전 한 얼굴이 떠올랐다.
지금의 아내이자, 서른 해 전 처음 알게 된 그 사람이었다.
그제야 ‘세월이 유수 같다’는 말이 내 이야기가 되었다.
군 복무를 마치고 돌아왔을 때, 나는 가진 것이 없었다. 학교도 기술도 계획도 없었다. 앞날이 막막하던 시절, 뜻하지 않게 교회 사택에서 몇몇 청년들과 함께 지내게 되었고, 미안한 마음에 청년 사역을 맡았다.
사택에는 점점 청년들이 모여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새벽기도를 마치고 돌아오니 사택 문 앞에 쌀 한 가마니가 놓여 있었다. 누가 두고 갔을까 한동안 생각했는데, 그 마음을 오래 붙들고 있을 필요가 없었다. 교회에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은 한 여 청년이 쌀집에 부탁해 새벽에 배달을 시켰다는 것을.
“청년들이 많다기에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어요.”
그 여 청년이 지금의 아내다.
그녀는 은행에 다니고 있었다. 말투는 단정했고, 빈손으로 오는 법이 없었다. 봄에는 프리지어를, 여름에는 빵과 빙수를, 가을에는 국화를, 겨울에는 호떡과 붕어빵을 들고 왔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그녀는 물건보다 먼저 마음을 두고 갔다.
연말에 청년들과 식사를 하고 계산서를 보았을 때, 나는 잠시 말을 잃었다. 적지 않은 금액이었지만 그녀는 아무렇지 않게 계산을 마쳤다. 그때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부잣집 아이들은 다르구나.
지금 돌아보면, 그 생각 속에는 그녀보다 먼저 작아졌던 나 자신이 있었다.
그것은 오해였다.
그녀는 자신을 위해서는 거의 쓰지 않았다.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은행 월급으로 오빠와 남동생의 학비를 대며 홀어머니를 부양하고 있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날, 나는 그녀를 처음 만나는 기분이 들었다.
“결혼은 언제쯤 하고 싶어요?”
“좋은 사람이 생기면요.”
조건은 많지 않았다. 성실하고, 신앙심이 좋으면 된다고 했다.
“좋은 사람이 있는데, 소개해 주고 싶네요.”
약속 장소에서 그녀는 이미 알고 있다는 듯 웃었다.
“그 사람이 당신이죠?”
그렇게 우리의 연애는 조용히 시작되었다.
결혼까지는 순탄하지 않았다. 돈도 직업도 없는 남자를 데려와 결혼하겠다는 딸을 쉽게 허락할 부모는 없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평생 책임지고 잘 살겠다며 삼 년을 설득해 허락을 받았다.
결혼 비용도, 신혼집도 아내가 마련했다. 가진 것 없는 집에 오로지 나 하나 믿고 시집을 왔다. 결혼 후 십 년 동안 시어머니와 시댁 형제, 조카들을 하늘나라로 떠나보내는 가슴 아픈 일이 많았다. 그럴 때마다 아내는 막내였지만 늘 맏며느리처럼 앞자리에 섰다.
나는 지금도 아내에게 빚을 지고 산다. 갚을 수 없어서 더 성실해지 수밖에 없는 빚이다. 그래서 하루하루를 책임감 있게 살아가려 한다. 서른 해째, 첫사랑의 곁에 서 있기 위해서다.
생각을 마치고 휴대폰을 들었다.
“오늘이 우리 서른 번째 결혼기념일이잖아. 데리러 갈게. 저녁 먹으러 가자.”
식당에서 아침 일을 사과했다. 그리고 말했다.
“삼십 년 동안 곁에 있어줘서 고마워. 앞으로의 삼십 년도 당신 곁에 있을게.”
“환갑이 다 돼 가는 사람이 지키지 못할 소리는 또 한다.”
아내는 그렇게 말하며 눈을 흘겼다.
12월 7일, 통영에는 그날도 눈이 내렸다.
서른 해 전, 우리의 결혼을 축복하듯 내리던 눈이다.
돌이켜 보니 그 눈이 첫사랑의 시작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설렘이 아니라, 시간을 함께 견디겠다는 마음으로 다가와 어느새 첫사랑이 되어버린 사람.
서른 해째, 나는 지금도 그 사랑 안에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