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제영
합창단을 같이 하는 정진은 선생님이 아내가 운영하는 카페에 찾아왔다.
배우고 본받을 점이 많은 속이 꽉 찬, 요즘 보기 드문 신실한 친구다.
둘이서 통제영을 향해 길을 나섰다. 비록 날씨가 화창하지는 않았지만 걷는 거 만으로도 기분이 상쾌하고 마음이 가벼웠다.
통영을 살면서도 오랜만에 통제영에 가보았다.
여황산에서 불어오는 풍광과 사백여 년의 역사를 품은 통제영이 장엄하게 우리를 맞이했다.
복원된 통제영은 잘 정비되어 있었다. 세병문을 지나 가파른 계단을 올라 지과문을 통과하니 세병관의 모습이 드러냈다. 세병관의 세병은 당나라 시인 두보의 시 '세병마'에서 이름을 따온 것이다. '은하수를 끌어다 병기를 씻는다.' 은하수 물로 무기를 씻는 것은 전쟁을 준비하기 위함이 아니라, 전쟁을 영원히 끝내기 위한 것이다. 안속산의 난 때 포로가 되는 등 숱한 전쟁의 참회함을 겪었던 두보의 평화를 향한 간절한 열망이 담겨 있다.
설 명절 전이라 그런지 많은 관광객들이 통제영을 관람하고 있었다.
특히 어린 초등학생들이 부모와 함께 역사를 배우려는 모습들이 고무적이었다.
"세계적인 역사학자 E, H. 카는 명저 (역사란 무엇인가?)에서 과거의 빛에 비추어서 현재를 배운다는 것은 현재의 빛에 비추어서 과거를 배우는 것을 의미한다."라고 말한 바 있다.
역사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학습이 선행되지 않고서는 발전적인 미래 또한 있을 수 없다고 할 수 있다.
통제영이란 경상, 전라, 충청 삼도의 수군을 통솔하는 삼도수군통제사가 주둔하고 있던 조선 수군의 총본영 말한다. 여기에 설치된 통제영은 조선 선조 26년(1593) 8월에 창설되어 고종 32(1895) 7월에 해체될 때까지 약 300년간 존속했다. 일본군의 침략을 방어하는 최일선 기지로서의 역할을 수행했다.
통제사는 임진왜란 시기에 생겼다. 조선 수군의 통합전투지휘체제의 부재와 매끄럽지 못한 작전 수행능력을 보완할 목적으로 생긴 것으로, 일사불란한 지휘체제를 갖추고 일본군의 퇴로를 찬탄하기 위해서 취해진 조치였음을 알 수 있다.
최초의 통제사는 이순신 장군이셨다.
통제사의 위상은 대단했다. 무반 지방관직으로는 최고의 관직이다. 임직기관은 2년으로 규정하고 있었으나, 초대통제사인 이순신은 임진왜란의 와중이라 제한을 받지 않고 3년 9개월을 재임했다.
"가을 기운이 바다에 들어오니 나그네 회포가 어지럽다. 홀로 배 뜸 밑에 않았노라니 마음이 몹시 산란하다. 달빛은 뱃전에 비치고 정신은 맑아져서 잠을 이루지 못하는 사이에 어느덧 닭이 울었다." 난중 읽기
이순신 장군은 오직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뿐이셨다.
풍전등화 속에 있는 조선을 구하기 위해 온몸을 던진 이순신 장군의 고뇌를 잠시나마 느껴 보았다.
통제영 12 공방 장인들이 머물며 일하던 공방이 있다. 군수 물품을 만드는 곳이었지만, 차츰 생활품, 그 이후로는 공예품으로 바뀌었다.
조선시대 통제영 12 공방에서 만든 물건은 한양의 사대부는 물론 중국이나 일본에서도 인정하는 명품 중에 명품이었다. 통제영 폐영 후 장인들은 통영의 각 지역으로 흩어져 뛰어난 미적 감각과 장인정신을 끊임없이 꽃 피우는 문화예술의 토양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