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자락에 사는 지인이 감 농사를 지었다고 작년에 이어 올해도 대봉감을 보내왔다. 감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너무나도 고맙고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모든 과일을 좋아하지만 특히 유별나게 감을 더 좋아한다. 홍시를 너무 잘 먹는 나를 두고 아내는 밥보다 홍시를 더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놀릴 정도다. 나훈아 "홍시" 노래 가사에 보면 "생각이 난다. 홍시가 열리면 울 엄마가 생각이 난다."라는 가사가 나온다. 그렇다, 노랫말처럼 감을 볼 때마다 나는 울 엄마가 생각이 난다. 어머니도 무척이나 홍시를 좋아하셨다. 다른 과일은 싫어하셨지만 유독 홍시만은 잘 잡수셨다. 나 역시도 어머니를 닮아서 홍시를 좋아하는 게 아닌가 싶다.
몇 번을 얘기해도 어머니 얘기만 나오면 눈물이 난다. 남편 없이 혈혈단신으로 자식 9명과 어떻게 험한 세상을 살아냈는지 가히 상상이 되지 않는다. 철들고 효도할만하니 어머니는 이 세상에 안 계시니 이 기막힌 슬픈 사연을 어디에 하소연 한단 말인가? 어머니가 좋아하시는 홍시를 아랫목에 두고 힘들고 어렵게 살아낸 세월 위로라도 해드리고 싶지만, 허공에 외치듯 글로만 표현할 수 없는 현실이 안타깝다. 평생 일만 하고 사셨던 우리 어머니 손톱 밑은 항상 시커멓게 흙이 끼어 있었다. 그때는 왜 손톱 밑에 흙이 끼어 있는지 몰랐던 철부지 자식이었다. 새벽부터 해질 때까지 밭에 엎드려 있어야 했던 고단한 삶, 돌과 풀이 흙보다 더 많은 밭에서 손톱이 닳고 불어 터지도록 자식들을 사랑한 어머니.
어릴 땐 어머니가 대단하게 와닿지 않았다. 생각하면 돈은 어디에서 났을까? 어떻게 그 많은 자식들을 먹이고 입히고 가르쳤을까? 아버지는 자식들 결혼 한 명 시키지 않고 돌아가셨다. 철부지 자식들을 데리고 살아내야만 했던 삶, 속앓이를 어디에도 말할 수 없던 기나긴 여정, 모진 인생이었다. 어머니는 당연히 그렇게 자식들을 위해서 사는 삶인지 알았다. 어머니가 일하시던 그 밭과 들에 그 고향집에 영원히 계실 줄 알았는데... 세월이 갈수록 그리움은 더욱더 깊어가고 어머니가 그립고 보고 싶다. 세월이 아무리 변해도 두고두고 기억해야 하는 것들이 있다면 어머니의 사랑이 아닐까 싶다. 어머니가 살아생전 늘 이런 말씀을 하곤 하셨다. 당신께서 글을 쓸 줄 알면 당신의 일생을 글로 써 남기고 싶다고... 고생하고 살아온 세월을 이루 말할 수가 없다며 기억에서 사라지는 것들에 대한아쉬움이 있었다. 어쩌면 그 말씀 때문에 현재 글을 쓰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속해 있는 탁구클럽이 있다. 우리 클럽에서 제일 나이 많은 형님 집에서 회원들이 식사초대를 받은 적이 있었다. 식사가 끝나는 말미에 형님께서 노래를 한 곡 했다. "이연실의 찔레꽃" 노래였다. 가사는 이렇다. "엄마 일 가는 길에 하얀 찔레꽃. 찔레꽃 하얀 잎은 맛도 좋지. 배고픈 날 가만히 따먹었다오. 엄마 엄마 부르며 따먹었다오.... (중략) 노래를 듣는 내내 회원들의 콧등과 눈시울은 모두 붉어지고, 어느새 훌쩍훌쩍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엄마라는 존재는 어느 누구라도 똑같은 감정과 정서를 느끼는 게 아닐까. 생각만 해도 가슴이 저려오고, 보고 싶고, 목소리라도 듣고 싶은 간절함이 있다. 비로소 어머니를 이해하는 나이가 되니 어머니의 삶에 대한 깊은 찬미를 불러일으킨다.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이해가 아니라, 감성으로 말이다.
침대에 누워 대소변을 받아내도 살아계셨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리움은 사무쳐 메아리가 되어 가슴에 자꾸만 울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