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무무 Apr 29. 2024

신문지국, 일미식당 딸 숙이.

소중한 가족


4살 무렵 영월 장릉에서 찍은 가족사진.


신문지국집 딸 숙이.

우리 아빠는 강원도 정선군 예미리 조선일보, 한국일보 신문지국 지국장이었다. 쉽게 말해 조선일보와 한국일보를 지역에 파는 대리점을 한 셈이다. 어릴 적부터 우리 집에는 산처럼 신문이 쌓여 있었고 신동아 같은 두꺼운 월간지들이 아빠의 책장을 가득 메우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동화책이나 소설책보다 신문과 월간지를 읽으며 지냈다. 아빠는 서울 본사로 한 달에 한 번씩 출장을 다녀왔고 집에 올 때는 꼭 바나나 두 다발을 사 왔다. 한 다발은 내 것, 또 한 다발은 남동생 것.

당시에는 바나나가 귀했기 때문에 아빠가 서울 출장을 가는 날은 아빠보다도 바나나를 기다렸던 기억이 난다. 아빠는 신문지국장도 했지만 한국일보 지역 기자일도 하셨다. 신문 한 귀퉁이에 실렸던 아빠의 기사를 보며 우리 아빠 정말 대단한 사람이구나 자랑스러운 마음도 생겼다.

나는 아빠에 대한 좋은 기억이 많다. 아빠와 함께 신문을 읽고 토론도 하고 뉴스를 보며 얘기도 많이 나누었다. 귀찮을 만도 했을 텐데 늘 친절하게 설명해 주던 아빠의 표정이 생각나 주책스럽게 눈물이 자주 난다.

그 친절했던 아빠는 지금 내 곁이 아닌 하늘에 계시기 때문에...

늘 사회와 정치에 관심이 많고 시민기자로 일하게 된 것도 어린 시절 꿈이 기자였던 것도 자연스럽게 접했던 신문과 잡지 그리고 무엇보다도 아빠와의 즐거웠던 토론 때문이다.


일미식당 딸 숙이.

내가 철이 들고 난 뒤 엄마는 나를 붙잡고 자주 얘기 하셨다. "돈도 안 되는 신문지국은 왜 저렇게 계속하는지 모르겠다." 당시는 내가 어릴 때라 열심히 일하는 아빠, 신문에 기사도 나오는 자랑스러운 아빠를 엄마는 왜 저렇게 못마땅하게 생각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결혼을 하고 나서야 나는 엄마를 이해하게 됐다. 힘들게 식당을 하며 생계를 책임지며 살았던 여자로서의 엄마가 얼마나 힘들고 아빠가 원망스러웠을지 말이다. 아빠가 전혀 엄마를 도와주지 않은 것도 아니지만 손님들이 와서 한잔씩 주는 술을 마시고 술이 약한 아빠가 곯아떨어지면 남은 일은 오로지 엄마 몫이었고 중학생이던 나는 엄마를 도와 설거지를 하기도 했다. 그랬으니 엄마 입장에서는 쌓여 있는 신문다발들이 원수 같았을 것이다. 내가 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엄마는 식당일을 계속했고 돈도 제법 벌었지만 내 중학교 졸업과 동시에 힘든 식당일을 접었다.


술주정뱅이 큰아버지.

우리 아빠는 둘째 아들이다. 하지만 할머니는 우리 집에서 같이 살았다. 큰아버지가 술주정뱅이였기 때문에 큰엄마는 막내를 데리고 도망을 갔고 나머지 사촌 오빠 2명은 우리 집에 떠 맡긴 채.

큰아버지는 사춘기에 친구를 잘 못 사귀어서 그때부터 망나니였다고 한다. 결혼을 하면 정신을 차릴까 할머니는 일찍 장가를 보냈지만 역시나 가정은 파탄 났다. 큰아버지는 일을 하루 하면  한 달 월급은 미리 가불 해서 당겨 술값으로 탕진했다. 술을 마시고 사람을 때리면 합의금은 아빠가 내주고. 엄밀히 말하면 엄마가 식당 해서 번 돈으로 합의금을 매번 마련해 주니 엄마가 얼마나 속이 문드러졌을까? 술만 취하면 동네가 떠나가라 욕하고 소리 지르고 사람 때려서 경찰서 잡혀가고. 게다가 자식은 5명을 낳아놓고 막내는 큰엄마가 데리고 도망가고 남은 조카 4명을 부모님이 혼수 해서 다 결혼을 시켰으니 민폐도 이런 민폐가 없다. 엄마가 가끔 그런다. "니 네 큰아버지 해준 합의금만 모았어도 이렇게는 안 산다. 큰아버지 편만 들고 돈만 있으면 큰아들한테 몰래 가져다준 할머니가 너무 밉다"라고. 그런 큰아버지는 결국 간암으로 죽었다. 우리 아빠보다 더 오래 살았다.

하늘은 참 무심하다.

 

아빠가 취직을 했다.

아빠에겐 정계에 힘 꽤나 쓰는 정치인 형님이 한 분 계셨다. 가정 형편이 어려워 중학교도 졸업 못 한 아빠를 늘 안타까워하며 챙겨주신 분이시다. 당시 그분은 한국일보 기자 출신 국회의원이셨다. 그분이 아빠한테 "네가 살면서 힘들 때 딱 3가지 부탁은 들어줄 테니 언제든 말해라."라고. (이런 걸 백 또는 낙하산이라고 한다. 지금은 해서는 안 될 일이지만 당시엔 흔했나 보다) 아빠는 첫 번째 기회를 동생인 작은 아버지를 위해 썼다. 작은 아버지를 공무원으로 취직시켰다. 그리고 두 번째는 아빠가 공기업에 취직을 했다. 두 자식을 대학 보낼 형편이 안 됐기 때문에 대학 학비를 전액 지원해 주는 공기업 경비로 취직을 했다. 덕분에 나는 지방 사립대를 졸업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정치인 형님이 암으로 돌아가시게 되면서 세 번째로 내 취직을 부탁하려고 했던 기회는 사라졌다. 하지만 아빠는 가방 끈 짧은 아빠의 총기를 인정해 주고 자신의 대화상대로 자신의 친동생처럼 챙겨주던 형님이 돌아가셔서 정말 슬퍼하셨다. 아빠는 IMF로 인해 명예퇴직을 강요받고 버티다가 결국엔 사표를 쓰셨다. 학연 지연도 없기에 퇴직 후에는 산불지킴이 공공근로를 하셨다. 돌아가시는 순간까지 가장의 역할을 하기 위해 한 푼이라도 벌겠다고 일하러 나가셨다가 결국엔 길바닥에서 심장마비로 외롭게 혼자 돌아가신 거다. 그 순간은 상상만으로도 괴롭다. 내가 맛있는 거 한 번 덜 먹고 용돈이라도 더 보내 드렸러야 했는데라는 자책이 수시로 든다.






작가의 이전글 보고 싶은 이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