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24년 만에 친정에서 보내는 첫 추석
살다 보니 이런 날이 온다.
명절마다 700KM를 달렸다.
2001년 9월 2일 결혼을 한 뒤 한 번도 명절을 친정에서만 보낸 적이 없다. 시댁은 충남 부여, 친정은 강원도 정선이라 명절만 되면 시댁과 친정을 오가는 대장장에 오른다. 인천에서 시댁 부여까지, 시댁 부여에서 친정 정선까지, 친정 정선에서 인천 집까지 장장 700KM를 달려야 한다. 결혼을 했을 무렵엔 지금처럼 고속도로가 잘 닦여진 것도 아니어서 꼬불꼬불 산길을 돌고 돌아 정선으로 가다 보면 멀미가 심한 아들이 차에, 앉고 있는 내 어깨에 토를 여러 번 했고 자지러지게 우는 아이를 겨우 달래 가며 그 먼 거리를 다녔다. 차라도 막히면 남편은 "왜 이리 차가 막히냐, 왜 이리 머냐?"라며 짜증을 내기 일쑤였고 명절 때마다 시댁 눈치와 남편 눈치를 보며 친정에 어린 아들을 데리고 먼 길을 다니자니 힘들고 서러워서 눈물이 저절로 났다.
1년에 제사만 9번.
시댁에 예쁨 받는 며느리는 누구나 되고 싶은 법,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남편의 형, 즉 아주버님은 노총각이었고 막내인 남편과 내가 먼저 결혼을 했다. 결혼한 당시만 해도 시댁에 제사가 9번이었다. 아무것도 모르고 시집을 가 9번의 제사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놀라긴 했지만 최선을 다해서 열심히 며느리 노릇을 하리라 다짐했다. 그런데 사람이 살다 보면 예상치 못한 일이 생기기 마련이다. 평일에 제사가 있고 남편이 회사일로 바빠서 제사에 참석을 못 하게 되면 가시방석에 앉은 듯 불편하고 눈치가 보여 시어머니께 전화를 해 죄송하다는 말을 연신 했다. 당시 나는 대역죄인처럼 사과를 하고 또 했다. 내가 사과할 일이 맞나 싶었지만 어쨌든 나는 며느리니까 잘못한 거라 생각했다.
난 분명히 막내며느리다.
아주버님은 결혼할 생각이 없으시고 지금도 싱글로 시어머니와 함께 사신다. 분명 나는 막내며느리인데 아직까지도 싱글이신 아주버님 덕분에 막내며느리에서 맏며느리 역할을 해야 하는 상황이 됐다. 나는 형제가 없기 때문에 명절이 되면 늘 친정에서 나만 눈 빠지게 기다리는 부모님 생각에 마음이 아팠다. 시댁에서 제사를 지내고 뒷정리를 다 하고 친정에 갈 준비를 할 때면 시어머니께서는 매번 친정을 가야 하냐며 나를 서럽게 하셨다. 그래도 나는 가야 했다. 나도 나를 기다리는 부모님이 계시지 않나? 늘 눈치를 보고 서러운 소리를 들으면서 친정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 나도 모르게 서러워 눈물이 나곤 했다. 나를 기다리는 친정 부모님 집에 가는 것이 이토록 눈치 볼 일인가?
결혼 후 24년 만에 처음 친정에서 맞이하는 추석.
남편이 올해 2월에 3년 계획으로 중국에 주재원으로 갔다. 추석 연휴에 휴가를 오게 되면 이동하는데 시간도 너무 많이 걸리고 힘들 것 같아 10월 초에 휴가를 오기로 했다. 덕분에 나는 결혼 후 24년 만에 처음으로 시댁이 아닌 친정에서 추석을 지내게 됐다. 2015년 친정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시골에 홀로 계신 엄마가 이번 추석은 외롭게 지내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니 이제야 딸 노릇을 하는구나 싶어 미안하고 속상했다. 명절이라 차가 막혀 2시간 40분이 걸리는 거리를 5시간이 걸려 도착했다. 게다가 우산을 챙기는 걸 깜빡했는데 휴게소 근처만 가면 폭우가 쏟아지고 끝없이 줄지어 서 있는 차량들 때문에 휴게소 들리는 것을 포기하고 5시간을 쉬지 않고 달려 친정에 도착했다.
불면증도 사라지는 친정이란 곳
나는 불면증이 있다. 잠이 들기 어려워 약을 자주 먹어야 하는데 친정에만 오면 낮이고 밤이고 졸린다. 딱히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냥 졸리다. 아들은 할머니 돌침대를 차지하고 낮잠을 자고 엄마는 거실 소파에 누워 낮잠을 자고 있다. 나도 같이 누워 자고 싶지만 24년 만에 친정에서 보내는 추석에 대한 소회를 남기고 싶어 낮잠 대신 글을 쓴다. 아침밥을 먹고 엄마와 송편도 빚었다. 명절에는 친정아버지 제사를 지내지 않기로 엄마와 얘기를 했기 때문에 따로 제사 음식을 하지는 않고 맛있는 음식 몇 가지를 만들어 먹으며 아빠 흉도 보고 아빠를 그리워하기도 한다. 우리 아빠는 분명 제사상을 차리지 않았다고 야단치지 않을 거다. 쓸데없는 허례허식을 제일 싫어했던 분이었고 죽으면 꼭 화장해서 강에 뿌리고 제사도 지내지 말라고 생전에도 여러 번 얘기를 했었다. 슬퍼하다 보면 엄마도 나도 손자인 홍이도 아빠의 부재를 감당할 자신이 없기에 우리는 차라리 그리워하기로 결정했다.
"아빠! 우리 이렇게 지내도 괜찮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