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개 시의원이 떠듭니다] - 둘
시의원 업무 중 적성에 맞는 분야를 찾은 것 같다. 시민보좌관. 지난 선거에서 국회의원 보좌관을 했던 경험을 살려 ‘안성시민의 보좌관이 되겠습니다’ 라는 슬로건을 썼는데, 실제로 그렇게 돼 가는 것 같다. 말이란 게 무섭다. 우주는 말하면 그대로 현실화하는 무시무시한 힘이 있다.
민원이 들어와서 좌충우돌하며 해결해보려고 성심껏 노력했다. 수시로 집행부와 통화하고 관련 조례도 만들어보고 관련된 단체나 사람을 소개시켜주는 등으로... 또 진척이 있으면 즉각 민원인에게 보고를 올렸다. 일 년쯤 지나니 모 의원이 그나마 민원 잘 들어주더라는 소문이 났는지 찾는 분들이 늘었다. 전화로 들어오는 민원에, 방문 민원에, 타 지역민 민원까지... 지역 행사장 한 바퀴 제대로 돌면 민원 열 개쯤 받는 건 순식간이다. ‘소문난 맛집’이 돼가는 중이다.
기초의원은 쪽수가 많아서 의원 중에서는 시민이 제일 흔히 접할 수 있는 이들이다. 말하자면 시민 가장 가까이에 있는 권력인 셈. 권력을 부여했으면 잘 이용함이 마땅하다. 부하직원이나 보좌관쯤으로 여기고 잘 부리셔야 한다. 사람 부리는 게 일의 성패를 좌우하기도 하지 않는가. 쓸모를 찾아 일하게 만드는 게 시민의 일이다.
물론 민원은 해결되는 것보다 안 되는 게 더 많다. 의원에게 오는 민원은 하다하다 안 돼서 최후에 오는 민원이라는 얘기도 있다. 그런 악성민원도 많지만 실제로 뛰어보니 해결할 수 있는 것도 생각보다 많았다. ‘의원’이라는 직함이 큰 무기가 된다. 마음만 먹으면 일반인이 몇 달 노력해도 안 되는 일이 단 며칠 만에 해결되기도 한다. 참고로 민원을 성격상 분류해보면 첫째, 공동체를 위한 예산 투입을 전제로 하는 사업성 민원, 둘째 개인이 행정절차에서 장애를 만나 발생하는 민원, 마지막으로 사회적 갈등이 발생해 제기되는 민원 등이 있겠다.
어떤 민원이든 해결되면 스스로 기쁘다. 민원을 넣으신 당사자도 좋겠지만, 시의원으로서 존재감이 생긴 것이니 보람이 쏠쏠하다. 특히 예산을 수반하는 민원이 해결되면 어깨에 힘도 들어간다. 물론 잠시 들어가야 하지만... 정치적인 싸움에 힘을 보태거나, 행사장에 얼굴 내미는 일에 비하면 이는 얼마나 건강한 업무인가.
민원을 넣는 분들은 정황상 약자인 경우가 많다. 이곳저곳에 호소를 하다 기댈 곳이 없어서 결국 의원실 문을 두드리는 것이다. 그런 분들은 가만히 얘기 들어주고 고개 끄덕이는 것만으로도 위안을 받기도 한다. 물론 약자가 일반시민이 아니라 공무원일 경우도 있다. 비상식적인 요구로 폭주하는 민원인 앞에서는 공무원이 약자다. 그럴 때면 당연히 공무원을 보호해야 한다. 어쨌든 문제가 있는 곳에서 시의원이라는 직위를 이용해 문제해결에 나서면, 그럴 때 시의원은 진정 시민의 하나밖에 없는 권력, 비빌 언덕이 된다. 약자, 시민권력의 탄생이다.
어제도 민원을 하나 해결했다. 시민들과 시 집행부의 만남을 주선해 현장에서 의견을 조율했다. 시가 해줄 수 있는 부분이 어디까지인지 확인하고, 현장에서 약속을 받아내고, 할 수 없는 부분에 대해서는 시민의 이해를 구했다. 서로 목소리가 높아지는가 싶던 현장이 몇 십 분의 대화로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끝났다. 역지사지의 마음으로 소통하면 안 될 게 없다. 돌아오는 길, 기분이 좋았다. 38번 국도는 시원하게 뚫려 있었고 얼음컵에 담긴 커피는 향기로웠다.
그 멋진 드라이브 길에 아이디어 하나 떠올렸다. 행복해지는 비결 하나 발견한 듯해 공개한다.
1일 1선업(善業) 행하기. 하루에 하나씩 세상을 위해, 타인을 위해 좋은 일 하기. 좋은 일이 어렵다면 하루에 한 번씩 세상을 향해 친절 베풀기.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닌 듯하다. 누군가의 이야기를 마음을 다해 들어주는 것만도 하루치는 되지 않겠는가? 물론 이것을 가능하게 하려면 세상에 대한 믿음, 삶에 대한 긍정이 전제돼야 할 것이다. 지금 우리에겐 서로에 대한 호의와 친절이 긴밀히 요구된다. 칼부림 같은 건 대한민국에 어울리지 않는다. 인류애, 공동체, 사람에 대한 믿음을 포기할 순 없다. 실상 세상을 위하고, 타인을 위한 선업이라 했지만 어쩌면 자신을 위해 가장 좋은 일일지도 모른다. 나를 사랑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것이니... 그런 면에서 시의원이라는 직업, 선업을 행하기 맞춤하다.
선업은 매우 힘이 강하다고 한다. 우리가 상상하는 이상으로... 믿거나 말거나... 하지만 믿는 자에게는 그런 세상이 열린다. 1일 1선업이면 내가 바라보는 세상이 달라질 것이다. 우리의 세계는 각자가 바라보는 모양으로 창조될 수밖에 없다. 그러니 내가 바라보는 세상이 달라지면 그것이 곧 우리가 흔히 불가능하다고 여기는 ‘세계의 변화’이지 않을까... 이 가장 기본적인 사실을 깨닫는데 반세기가 걸렸다. 이제 살아온 날보다 살 날이 짧을 테지만 지금이라도 깨달았으니 하루 하나씩 해보겠다. 끝은 미약할지라도 과정이 좋지 않겠는가. 매일매일, 끌과 망치로 돌의 한 모퉁이를 다듬어 삶에 탑 하나 쌓는다 여기면 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