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열정 한 스푼
내가 서울에서 자취를 시작한 후, 나의 자취방에서 나 말고 다른 누군가를 위해 요리를 한 것은 총 다섯 번이다. 한 번은 엄마, 그리고 네 번은 친구들을 위해서 요리를 했다. 요즘 들어 부쩍 요리에 자신감이 생겨, 친구들에게 "내가 밥 해줄게~ 놀러 와~"라고 말하고 다니는 중이다.
나의 작은 레스토랑인 일명 "류스토랑"에 손님이 오기 대략 일주일 전부터 두 개의 실험실이 풀가동된다. 하나는 물리적인 공간인 나의 작고 소중한 부엌,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상상의 나라, 나의 머릿속이다. 내가 매일같이 해 먹는 요리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이 된다. 나에게 직접 얘기는 하지 않지만 내심 기대를 하고 있을 나의 애정하는 손님들을 위해 특별하고 건강한 요리를 만들고 싶다. 나는 정말이지 '잘' 하고 싶은 열정으로 가득 채워진다.
류스토랑의 손님맞이 프로젝트는 대략 1주일 정도가 걸린다. 식당이라고 하기에는 작은 규모이지만 나름 체계적인 과정이 있다.
첫 번째, 채소 mbti:
손님에게 싫어하는 음식이나 알레르기가 있는 음식 등, 내가 요리하면서 쓰지 말아야 할 재료가 있는지 묻는다. 그럴 때면 거의 항상 고수나 셀러리는 고정으로 나왔다. 물론, 알레르기가 있는 음식으로가 아니라 싫어하는 음식으로 말이다. 이 대답을 들으면 조금은 아쉽기도 하고 물어본 것이 후회되기도 했다. '아.. 내가 진짜 맛있게 만들어서 나의 손님이 고수랑 셀러리를 좋아하게 만들어볼까?' 하는 꽤나 재미나고 짓궂은 생각을 하기도 한다. (그런데 내가 만든 고수 크림, 셀러리 페스토가 정말 엄청난데..ㅎㅎ) 아직까지 그래본 적은 없다.
두 번째, 메뉴 선정:
가장 오랜 시간이 걸리고, 또 흥미진진함이 끝이 없는 과정이다. 요즘 제철을 맞이하여 내가 자주 해 먹고 있는 재료와 그 시기에 내가 푹 빠져있는 레시피를 우선으로 메뉴를 구상한다. 하지만, 셰프 류는 그날만큼은 더욱 특별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새로운 것이 필요하다! 그래서 메뉴에 대한 아이디어를 얻기 위해 주로 다음과 같이 3가지 정도를 이용한다.
1. 시도 때도 없이 구글이나 인스타그램에 검색한다. 검색을 할 때면 주로 영어로 검색하는데, 나름 그 이유가 있다. 한글로 검색하면 우리가 어릴 때부터 자주 보아서 친근한 요리들이 나온다. 예를 들어 '가지 요리'라고 검색하면 가지 조림, 가지 무침 그리고 가지 구이 등을 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eggplant recipes'라고 검색하면 처음 보는 요리들이 많다. 가지 무사카, 가지 카레, 가지 파스타, 가지 후무스, 그리고 이름도 없는 생전 처음 보는 요리까지. 살면서 아직 맛본 적이 없는 그런 요리들이 참 많다. 생각의 틀을 벗어나고프며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요리를 만들고 싶은 나에게 아주 최적이다. 호기심을 마구 자극하고 상상력을 최대로 끌어올린다! 이렇게 인터넷으로 세계 방방곡곡의 요리를 구경하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른다.
2. 또한, 얼마 전부터 구독하고 있는 뉴욕 타임스의 쿠킹 페이지도 자주 참고한다. 그 음식과 관련된 기자들의 재치 있는 이야기를 접할 수 있고 레시피가 쉽고 간단하게 정리되어 있다.
3. 마지막으로, 이 시기에 나의 밥 친구는 비건 레시피를 알려주는 외국 유튜브 채널들이다. 기대하지 않고 우연히 본 영상에서 아이디어를 얻을 때가 가끔 있으며, 소소한 요리 기술 같은 것을 배울 수 있다. 사실, 요리 관련 영상을 보는 것 자체가 나에게 큰 힐링이기에 보기도 한다. 내가 주로 보는 채널은 Alexandra Andersson, Mina Rome, Pick up Limes, Rainbow Plant life 그리고 Jamie oliver 등이 있다.
나는 이처럼 주로 외국 자료들을 많이 참고한다. 영어나 프랑스어 공부가 자동으로 된다! 물론, 요리 관련 어휘나 단어에 한정되기는 하지만 말이다. :) 아무튼 이야말로 일거양득 아니겠는가!
이렇게 여러 매체에서 열심히 찾다 보면 몇몇 이미지들이 내 머릿속에 들어온다. 딱 마음에 드는 구체적인 레시피를 그대로 따라 하는 일은 거의 없다. 그 이미지들을 콜라주해서 "Ryu's Version"으로 재탄생시키는 것이다!
세 번째, 연습과 최종 결정:
드디어 본격적인 실험의 시작이다. 말 그대로 상상을 현실로 만드는 가장 재미있는 과정이다. 부엌이라는 실험실은 '계획 변경'이 수없이 반복되는 곳이다. 중간에 맛을 보다가 생각했던 것과 달라서 변경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은 그저 갑자기 그 양념이 쓰고 싶어 져서, 갑자기 그 야채가 먹고 싶어 져서, 갑자기 그 조합이 궁금해져서 등 온통 '갑자기'로 가득하다. 그리고 그 '갑자기' 떠오른 궁금증을 즉시 해결할 수 있는 공간이기에, 나에게 부엌은 대기 줄이 없는 맛집 거리인 것이다. (놀이동산이라고 쓰려다가, 나는 놀이동산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 때문에 적절한 비유라 생각이 들지 않았다. 언제나 나에게 최고는 맛있는 것들인가 보다.. ) 그렇게 나에게 최종 합격한 요리가 나올 때까지 나의 실험실은 불이 꺼지지 않는다!
네 번째, 당일 오전:
류스토랑은 점심에만 오픈한다. 대개는 당일 아침 9시쯤부터 준비를 한다. 미리 만들어 두어야 하는 소스가 있으면 만들고, 야채들을 손질해 둔다. 물론, 페스토나 디저트에 쓰이는 크림과 같이 반나절 정도 숙성을 하면 풍미가 더 좋아지는 것은 그 전날 만든다. 손님이 12시에 방문한다고 하면, 10시 반 쯔음에는 준비된 것들로 본격적인 요리를 시작한다. 즉, 인덕션에 불을 켜는 것이다! 이 순간은 나에게 마치 달리기 선수가 출발선에서 힘차게 뛰어나가는 것과 같다. 나 혼자만의 밥상을 차릴 때보다 배로 긴장하고 또 그만큼 설렌다. 그래서일까, 이때부터 나의 시계는 보통보다 2배는 빠르게 째깍째깍 흘러간다. 다행히도 아직까지 이 단계에서 실수한 적은 없다. 앞으로도 그럴 수 있기를!
다섯 번째, 손님과 함께하는 식사:
약속 시간이 되어 초인종이 울린다. 이제는 긴장보다 반가움이라는 감정이 한 발 더 앞에 있다. "배고프지? 딱 5분만 기다려!"라며 요리를 마무리한다. 현관문 쪽에 부엌이 있어 들어오자마자 메뉴가 일부 공개되는 것이 조금 아쉽기는 하다.
드디어 대망의 순간이 찾아왔다. 류스토랑의 손님과 함께 맛을 보는 시간이다. 아, 그전에 일단 포토타임을 가지는 것은 절대 지나칠 수 없다.
모든 요리를 상에 올려두면, 항상 듣는 말은 "대박이다 야... 근데.. 탁자가 너무 작은데?"이다. 나도 그 사실을 알기에 뿌듯하면서도 지금 자취방에서는 큰 식탁을 둘 수 없음에 조금 아쉽다. 그래서 집들이를 할 때마다, 4인용 식탁을 놓을 수 있는 집을 장만하고자 하는 나의 열망의 풍선에 대량의 공기가 들어간다.
먹기 전, 아주 간단하게 메뉴를 설명해 준다. 첫 입을 맛본 손님의 눈이 굉장히 커진다. "헐.. 이걸 집에서 했다고?" 이 말을 들으면 뿌듯함에 날아갈 것 같다. 캬. 류스토랑. 오늘도 성공이구나!
총 다섯 번의 류스토랑 오픈날 중에 가장 최근이었던 두 개의 날을 추억해 본다.
2024년 7월 2일
고등학교 1학년이었을 때 만나 어느덧 10년 지기가 된 나의 친구, 주연이를 초대했다. 이날의 집들이는 나에게 큰 의미가 있었다. 요리라는 것이 내 삶에 어떤 존재인지, 그리고 어떤 존재이게 할 것인지 진지하게 생각하게 된 후, 처음으로 다른 누군가에게 요리를 해준 날이기 때문이다. 그랬기에 난 더 더 잘하고 싶었다. 이때 탄생한 요리가 바로 나의 이 연재책 네 번째 게시물에 있었던 Chou Farci [슈 파르시]. 당시 이 요리를 탄생시킨 내가 얼마나 대견했는지! 솔직히 며칠 동안 자아도취에 빠져있었다. 그때의 글에서 티가 날지도 모르겠다. 로즈메리 두유 크림을 한 스푼 떠먹고 놀라움에 동그랗게 커다래진 친구의 두 눈을 잊지 못한다. 맛있게 먹어주어 고맙다, 주연아 :)
이 날 이 순간을 위해 긴장을 적지 않게 했었는지, 친구가 집으로 돌아간 후 나는 바닥에 널브러졌다. 밤에 잠을 잘 때가 아니면 잘 눕지 않는 나인데, 이날은 한 시간 동안 일어나지 못했다. 그렇게 누워있다가 보니 저녁 시간이 되었다. 이제 다시 나를 위해 저녁밥을 차려야 할 시간이 온 것이다. 아직 피곤이 가시지 않았지만 요리가 무척 하고 싶었다. 그래서 기력을 차리기 위해 홍삼을 야무지게 쪽쪽 빨아먹고, 나를 위한 밥상을 정성스레 차려 맛있게 먹었다. 오직 요리를 위해 홍삼까지 먹은 나. 처음에는 '나 참 못 말린다' 싶었다가도 내가 요리라는 것에 가진 열정이 보통이 아니라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나에게 요리는 정말 어떤 존재일까?'를 더 진지하게 생각하게 되었다.
2024년 8월 2일
이 날의 손님은 고등학교 2학년이었을 때 만나 환상의 짝꿍이 되었던 친구, 소영이였다. 공부를 하겠다고 주말에 같이 학교에 가서는, 아침부터 아이돌들의 춤을 추다가 떡볶이, 짜장면, 또는 달달한 빵을 먹으며 하하 호호 재미나게 웃다가 하교를 하던 우리였다. 걱정 없이 웃고, 먹고 그리고 춤추던 그 시절 소영이와의 추억은 나에게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보물들 중 하나이다. 고등학교 졸업 후에는 다른 대학교로 진학하고 서로 바빠지면서 연락을 자주 하지는 못하게 되어 정말 오랜만에 본, 아주 반가운 손님이다.
이번 손님을 위한 레스토랑 준비 과정은 예상치 못한 흥미로움이 더해졌다. 채소 mbti의 결과, 쓰지 않아야 할 재료가 생각보다 많았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조금 막막했지만 그 덕분에 나는 나라는 틀을 깨고 더 재미난 상상과 도전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오히려 좋았다!
다행히도 친구는 조금도 남기지 않고 너무나 잘 먹어주었다. 이번에도 첫 입을 먹자마자 놀라움에 커다래지는 친구의 두 눈을 보게 되었다. 류스토랑, 이번에도 대성공이다! 나를 위해 부산에서 서울로 와준, 커다란 복숭아 한 박스와 샤인머스켓을 낑낑대며 들고 와준 소영이에게 무척이나 고맙다 :)
예고편: 2024년 8월 15일
이 글을 쓰는 지금은 8월 15일의 새벽이다. 오늘은 내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자 내 기준 세상 최고의 미식가가 손님으로 오는 날이다. 바로, 우리 엄마. 요리사 자격증이 있을 만큼 요리에 대해서는 전문적이며 맛의 미묘한 차이도 예리하게 알아차리는 이 손님에게 인정을 받고 싶은 마음에, 잘하고 싶은 나의 열정의 풍선이 더더욱 커졌다. 준비는 다 되었다! 오늘도 류스토랑 오픈이다!
참 감사하게도 난 이때까지 노력만 하면 원하는 것을 다 이루었던 삶을 살았다. 집들이뿐만이 아니라 공부나 여러 시험들에서도. 조금 재수 없게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난 이 만큼 노력했는데 왜 안되었지?'라고 생각했던 적이 잘 없었다. 무언가 안되었을 때는 내가 그 일에 열정이 충분치 않았기에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내가 노력을 퍼부었던 대상은 대개 그것에 대한 나의 열정이 가득했던 것이기도 했고, 더불어 돌이켜보면 난 많은 경우에 운이 좋았던 것 같기도 하다. 그래서 나는 노력하면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항상 자신감이 있었다.
하지만 어느 날, 나는 열정을 퍼부울 대상을 잃고 말았다. 언제나 나의 마음속에서 두둥실 떠다니던 열정의 풍선에 바람이 다 빠진 것이다. 나는 힘없이 내려앉고 말았다. 한때는 나의 대명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던 '열정' 그리고 '노력'이라는 단어들이 이제는 너무나도 낯설게만 느껴졌다. 동시에 열정이 없어지고 노력을 할 수 없게 된, 정확히는 노력하지 않고 있는 나 자신을 보며 한심함과 죄책감이 들기도 했다.
요리는 비어있던 나의 열정 풍선에 숨결을 불어넣어준다.
어떤 날은 한 국자만큼 넣어주기도 하고,
또 어떤 날은 작은 티스푼의 양만큼 넣어주기도 한다.
하지만, 아주 조금씩이라도 멈추지 않고 나를 다시 채워주고 있다.
그래서 그 풍선은 너무 커져서 터질 만큼도 아니고,
너무 작아서 땅에 가라앉을 만큼도 아닌,
나의 마음 하늘에 유유자적 예쁘게 둥둥 떠다니게 되었다.
열정의 풍선을 다시 띄워준 요리에게 무척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