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단편소설
인파가 물밀듯이 쏟아지는 퇴근 시간. 어느 한 남자가 텅 빈 눈으로 맞은편 스크린도어에 기계적으로 시선을 고정하고 있다. 수많은 광고의 소음 속에서, 유독 한 문장이 망막에 날아와 박혔다.
당신을 괴롭히는 기억을 말.끔.히 지워드립니다!
기억을 지운다라... 최면 같은 신종 사기인가.
지하철은 기계적인 안내 음성과 함께, 철로를 긁는 쇳소리를 내며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다음 날.
“처음이신가요?” 원무과 직원이 모니터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로 남자에게 물었다.
“아…. 네.”
“이거 작성하고 잠시만 기다리세요.”
직원이 내민 것은 작은 정사각형의 종이였다. 이름과 주소, 연락처 같은 인적사항을 적는 익숙한 빈칸들이 나열되어 있었다. 그리고 종이의 가장 밑단, 굵은 고딕체로 새겨진 문장이 눈에 들어왔다. ‘본 시술의 부작용 및 결과에 대해 병원은 어떠한 법적 책임도 지지 않음.’ 남자는 망설임 없이 빈칸을 채워나갔다.
병원 대기실에는 남자 외에 아무도 없었다. 차가운 형광등 불빛 아래, 그는 문득 내가 여길 왜 왔을까, 하는 자조적인 생각에 빠졌다. 그냥 집에 들어가서 맥주나 한 캔 마시며 해외 축구나 볼 것을. 후회 섞인 한숨이 나올 때쯤, 진료실 문이 열리고 간호사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000님, 진료실로 들어오실게요~”
흰 가운을 입은 여의사와 마주 앉은 남자는, 몇 분 동안 아무 말 없이 침묵했다. 의사는 그를 재촉하지 않고 그저 가만히 기다려줄 뿐이었다.
특정 사건 하나만 지우는 것이 아니었다. ‘특정 기간’ 전체를 송두리째 삭제하는 것이었다. 그 기간 속에는 분명 자신을 미치도록 괴롭히던 기억이 잠들어 있지만, 분명 사소하게나마 좋았던 순간도 함께 묻혀 있을 터였다. 남자의 고민이 깊어졌다.
“4년 전…… 2015년 3월부터 12월까지로 할게요.” 그가 마른 입술을 열었다.
“네. 2015년 3월부터 12월, 해당 기간의 기억 전체를 추출하겠습니다.” 의사는 남자의 차트에 기간을 표시하며 무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추출한 기억은 어떻게 처리해 드릴까요?”
“‘어떻게 한다’는 게 무슨 말씀이시죠?”
“기억을 USB에 담아 가실 수도 있고, 저희 쪽에서 영구 폐기해드릴 수도 있습니다.”
“...담아 가겠습니다.”
남자는 병원에서 제공한 흰 가운으로 갈아입고, 차가운 진료실 침대에 몸을 누였다. 이내 간호사 두 명이 바퀴 달린 기계를 끌고 와, 그에게서 뻗어 나온 서너 개의 패드를 그의 이마와 양쪽 관자놀이에 부착했다. 차가운 젤의 감촉이 느껴졌다.
“처음엔 찌릿하실 수 있는데, 금방 익숙해지실 거예요. 시술은 한 시간 정도 소요됩니다.”
간호사의 말대로 관자놀이에서 약한 전류가 흐르는 듯한 감각이 느껴졌다. 그 자극은 점차 무뎌졌고, 의식은 서서히 안개 속으로 가라앉았다. 남자는 편안하게, 혹은 모든 것을 포기한 듯이 눈을 감았다.
집으로 돌아온 남자는 옷도 갈아입지 않은 채 침대 위로 풀썩 쓰러졌다. 머릿속이 기묘할 정도로 고요했다. 있어야 할 무언가가 잘려나간 자리, 깨끗하게 도려내진 공백이 느껴졌다. 후련함보다는 낯선 불안감이 그 자리를 채웠다. 4년 전 그해의 담임 선생님 얼굴, 같은 반 친구들의 이름, 축제 때의 풍경, 체육대회의 함성.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기억은 그저 텅 비어 있었다.
그는 침대에 걸터앉아 약 봉투에 담겨 온 작은 USB를 꺼내 들었다. 그의 손에 들린 작은 저장 장치는, 이제 제 것이 아니게 된, 혹은 처음부터 제 것이 아니었을지도 모르는 시간의 파편이었다.
‘나는 4년 전에 대체 무슨 일을 겪었길래, 이 기억을 돈까지 내고 지우려 했을까?’
남자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책상 위 노트북에 USB를 연결했다. 자신의 이름이 적힌 폴더 하나, 그 안에는 동영상 파일 한 개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그는 망설임 없이 영상을 실행했다. 재생 시간은 30분을 조금 넘겼다. 9개월이라는 시간이 고작 30분짜리 하이라이트로 요약되었다는 사실에 씁쓸한 감정이 밀려왔다.
영상 속의 ‘나’는 낯설었다. 아버지에게 선물 받은 자전거를 타고 등하교하는 모습, 도둑맞은 자전거를 찾기 위해 친구와 골목을 헤매던 모습, 축구 시합 중 발목에 금이 가던 순간... 오랜만에 보는 친구들의 얼굴에, 남자는 저도 모르게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잊고 있던 온기가 스며드는 것 같았다.
하지만 화면 속의 계절이 바뀌고, 낯선 얼굴의 전학생 하나가 등장하자 영상의 색채는 급격히 탁해졌다. 이유는 없었다. 영상은 어떤 설명도 없이, 그저 폭력의 결과만을 집요하게 전시했다. 전학생이 만든 무리가 ‘나’를 구석으로 몰고 가 마구잡이로 때리고, 욕설을 내뱉는 장면들이 이어졌다.
이윽고 여러 장면들이 어지럽게 오버랩되기 시작했다. 무관심으로 일관하던 담임의 얼굴. 늘 바쁘다는 핑계로 부재했던 부모님. 애써 외면하며 방관했던 반 아이들의 눈빛. 그리고 마침내, 아파트 옥상 난간에 홀로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는 자신의 모습. 영상은 12월의 어느 날, 그를 괴롭히던 아이가 자퇴했다는 소식으로 끝이 났다. 남자는 폴더를 휴지통으로, 휴지통을 완전한 공백으로 만들었다. 노트북을 덮었다. USB는 변기의 소용돌이 속으로 던져 넣었다. 그는 모든 흔적을 지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도려냈던 기억의 통증은, 이제 선명한 영상이 되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지우기 전보다 더 생생한 형태로...
그는 침대에 걸터앉아 고개를 떨궜다. 텅 빈 표정 위로 깊은 한숨이 내려앉았다.
"내일 다시 들러야겠다..." 뱉어낸 한마디는 무거운 체념이었다.
※ 본 이야기는 작가의 상상으로 창작된 픽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