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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사이 Oct 25. 2024

외할머니의 라면

눈 오는 막다른 골목의 추억.


* 원글은 2024년 2월 21일에 작성된 글입니다. 오늘의 날씨에 착오 없으시길 바랍니다.*



눈이 오면 생각나는 외할머니의 라면


마지막 눈일까?

강원도엔 무척 많은 눈이 내렸고, 오늘은 중부지방에도 눈 예보가 있다. 이번 겨울은 눈이 많이 내린다. 집에서 보는 눈은 포근해 보이고 참 예쁘다. 눈을 좋아하는 나는 마음 같으면 밖으로 나가 눈을 맞고 손이 시리도록 눈을 만지고 싶지만 그저 자꾸만 창가로 가서 밖을 내다볼 뿐이다.

창틀에 소복소복 쌓인 눈처럼 마음속에 쌓인 첫눈 같은 고운 추억이 떠오른다.


생각만으로도 포근하고, 온몸이 따끈해져 사르르 녹아내릴 것만 같은 외할머니.


서울. 강북…그 막다른 골목.

내가 태어나고, 유년을 지나 스무 살이 넘는 시간의 기억 속 배경으로 존재하는 그 골목.

대로변 버스 정류장에서 내려 안쪽으로 200미터쯤 직선으로 걸어가 왼쪽-오른쪽-오른쪽으로 돌면 우리의 골목이 나온다.

계단을 올라 쌩쌩 달리던 자동차들 위에 올라서면 콧구멍이 뻥 뚫리게 시원했던 육교만 없어졌을 뿐 그 아래의 버스 정류장은 아직도 존재한다. 도로의 너비와 모습이 별반 다르지 않고 거의 그대로인 것이 신기하다.

그러고 보면 많은 사람들이 오랜 세월을 살아온 지역인 강의 북쪽. 강북의 길은 참 안 변한다. 간혹 변치 않은 길을 지난다.

버스 정류장과 길은 그대로인 반면 우리의 골목과 그 일대의 땅을 갈아엎고, 우뚝 선 높은 아파트를 만나면 왠지 얄미워 나도 모르게 외면을 하게 된다.

한 살 아래의  이종사촌 준이가 수십 년 만에 한국에 다니러 왔을 때 우리의 골목을 찾아갔었다고 했다.

“누나, 하나도 없어. 다 높은 빌딩이고 어디가 어딘지.. 이상해”


추억의 그 골목은 이제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외할머니도 안 계신다.


충무로를 기반으로 살던 분들이 어쩌다가 결혼 후 그 골목에 자리를 잡으셨는지는 모르겠다.

어린 시절 막다른 골목의 끝에 있던 우리 집과 셋째 이모네 집은 서로 마주 보고 있었다. 한 골목뒤엔 막내 이모의 집이 있었다. 매일 강북에서 수원까지 먼 길을 출근해야 했던 이모의 집엔 외할머니가 함께 사셨다. 셋째 이모의 집은 우리의 아지트였으니 대부분의 날에 외할머니가 해주시는 간식을 먹고 밥도 먹었다. 외할머니의 음식은 매서운 시집살이로 단련되어 정갈하고, 맛있었다.


어느 가을밤.

고소한 잣의 둥근 부분에 뾰족한 솔잎을 세 개쯤 끼워 우리의 손에 쥐어주시고 불을 붙여주셨다. 잣불이 타는 동안 소원을 빌라고 하셨다.

동그랗게 둘러앉은 우리는 잣의 부드럽고 고소한 향기가 나는 파르스름하고 묘한 불 속으로 빠져들어 가기도 했다.

늦도록 놀다가 외할머니가 앉아 계신 주변에서 하나 둘 잠이 든다. 다음날 아침이면 어김없이 집에서 눈을 떴다. 신기한 순간이동이다.


아이들 중 나이 차이가 나는 언니, 오빠들은 제외하고, 연년생으로 이어진 남자아이 넷과 홍일점인 나까지 우린 사촌이 아닌 친구였다.

다섯 명이 뭉치면 부러울 것도 없었고, 무슨 일이 생겨 언니, 오빠들이 합세하면 겁날 것도 없으니 무적의 독수리 오 형제처럼 동네를 휘젓고 다녔다.

제기를 차고, 공을 차고, 야구도 하며 동네를 뛰어다니며 남자아이들이 하는 놀이를 주로 하고 놀았다. 나는 고무줄놀이나 공기놀이가 재미도 없었고, 잘할 줄도 몰랐다.

한 번은 공터에서 불장난을 하다가 시장에 다녀오던 막내 이모에게 딱 걸렸다. 우린 이모를 발견하고 공터의 낮은 담 아래 몸을 낮춰 숨었고 집으로 돌아와 잡아떼려 했지만 숯검댕이 묻은 시커먼 얼굴은 바로 증거가 됐다. 집안도 아니고, 집 밖 담벼락에 줄줄이 서서 오래 벌을 선 일도 있다. 온 동네 사람이 다 보도록 아주 혼쭐이 났던 것이 생생하다. 우린 다시는 불장난을 하지 않았다.

겨울이면 노천 스케이트 장이 되어 십원에 스케이트를 빌려 탔다. 겨울의 맛인 떡볶이와 어묵을 팔던 그 공터엔 지금 큰 건물이 들어서 있다.  


우다다다 반대쪽 골목 끝까지 뛰다 보면 목소리도 얼굴도 예쁜 아줌마가 “조심해. 다칠라”

얼굴을 들어 보면 당대 최고의 가수 이미자 아줌마가 웃고 있었다. 가수 아줌마는 분홍색 앙고라 스웨터에 밤색 체크의 긴치마를 입고 있었다. 우리의 막다른 골목 반대쪽 끝에 잔디가 깔린 마당이 넓은 2층 양옥집에 이미자 아줌마가 살았다. 어느 날엔 가수 아줌마가 새까만 세단 차를 타고 와서 집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기도 하고, 간혹 목욕탕에서 만나기도 했다. 우린 가끔 철장 대문 사이로 슬며시 잔디 깔린 마당을 들여다보곤 했다.

어느 날엔가 가수 아줌마는 이사를 갔고, 그 집안의 잔디 마당도 사라져 더 이상 볼 수 없게 됐다.

가수 아줌마의 말을 귓등으로 듣고, 어느 날 또다시 우다다다 앞도 안 보고 뛰다가 준이는 목욕탕 벽 모서리에 머리를 박아 여러 바늘 꿰매었다.

꿈이었나 싶은 아찔한 기억이다.




막다른 골목이 진가를 발휘하는 날은 눈 오는 날이다.


무엇을 해도 가두리의 물고기처럼 안전했고, 강아지처럼 뛰며 소리를 질러도 뭐라고 할 사람이 없으니 집 앞의 막다른 골목은 온전히 우리 것이었다.

빨간 내복을 껴입고 엄마들이 짜준 스웨터 위에 솜잠바를 입고, 목도리와 벙어리장갑을 끼었다. 단단히 복장을 완비했지만 방한성과 보온성이 좋지 않아 바람이 숭숭 파고들었다. 그 시절이 더 춥게 느껴지는 건 기능성 없는 옷 때문인 것 같다.

하지만 우린 추운지도 모른 채 눈싸움을 맘껏 할 수 있었다. 양쪽집 문을 열어놓은 채 도망가고 숨고, 옥상에서 눈덩이를 던지기도 했다.

다 같이 커다란 눈사람을 만들고 콧물이 줄줄 나도록 놀다 보면 벙어리장갑은 더덕더덕 얼음이 붙은 얼음장갑이 되어 보온의 효과가 전혀 없이 무겁기만 한 상태가 되었다. 바로 그때 외할머니가 우리를 부르셨다.


“얘들아, 춥다. 어서 들어와~ 라면 먹어~“


아무리 재밌고 더 놀고 싶어도 그 부름엔 거절할 재간이 없는 유혹이었다.

그제야 추위를 느낀 우리는 빨간 볼을 하고 따뜻한 방에서 옹기종기 이불밑으로 기어들어가 똑 같이 턱을 고이고 엎드려 몸을 녹였다.

마구 벗어놓은 젖은 옷들을 갈무리하신 후 할머니는 둥그런 양은 상을 들고 들어오셨다.

지금도 생각나는 미군부대에서 사용하던 베이지 색의 두툼한 플라스틱 그릇에 담긴 김이 모락모락 나는 꼬불꼬불한 라면.

사실 정신없이 놀면서도 우린 할머니가 구멍가게로 가시는 걸 보았다. 돌아오시는 할머니 손에 들린 주황색 비닐 포장지는 분명히 라면이다. 그 안엔 분명히 낱개포장되지 않은 면 다섯 개와 수프 다섯 개가 들어있다.

눈 오는 날의 특별식. 라면이다!

(둘리처럼) 후루룩 짭짭 라면을 먹을 동안 할머니는 면과 국물을 조금 남겨둔 석유곤로 위의 솥에 찬밥을 넣어 끓이셨다.  

계란도 톡 깨서 넣으시면 말해 뭐 해. 라면죽이 탄생한다.

풀코스 라면 정식!

눈 오는 날의 특식인 외할머니가 끓여주신 라면맛은 그야말로 어떤 음식과도 비교할 수가 없다.

배불리 다 먹고 나면 외할머니의 강아지들은 방바닥에 녹아 붙었다.  

새하얀 골목에서 눈놀이를 한 그날밤은 업어가도 모를 정도로 곯아떨어져 꿀잠이 든다. 우리는 어김없이 순간이동을 한다.


공터도 사라졌다. 우리 모두의 외할머니처럼..


오빠는 외할머니가 끓여주시는 라면이 제일 맛있다며 결혼 후에도 외할머니를 만날 때마다 라면을 끓여달라고 했다. 나중에 할머니께 여쭈었다.

“할머니 라면은 어떻게 끓이는 거야? 왜 맛이 다르지?”

“뭐 맛있어. 라면이 라면이지. 근데 라면 수프는 반 만 넣고, 소금으로 간을 맞추면 돼. “

어떤 마음으로 그렇게 하신 건지 모르겠지만  맛이 기가 막혔다.

분명히 외할머니의 많은 맛있는 음식을 먹었는데 된장국도 김치찌개도 아니고,

눈 오는 날이면 끓여주셨던 외할머니의 특식 라면이 가장 생각난다.

그런데 끓이는 비법을 알아도 소용은 없었다. 아무리 따라 해 보아도 그 라면의 맛이 나지 않았다.

왜 그런 걸까?


외할머니의 마음과 손맛이 들어있던 라면.

셋째 이모의 덕분으로 우린 외할머니의 맛있는 사랑을 듬뿍 먹으며 지낼 수 있었다.




반가의 규수였던 외할머니는 부잣집 장손 며느리가 되었다. 3년의 터울로 딸 넷을 낳고 막내딸이 세 살이 되었을 때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장손 며느리인 외할머니는 아들 못 낳은 눈치를 보며 혼자 남아 시집살이를 하셨다. 그리고 전쟁이 발발되었고, 집안은 어려워졌다. 시아버지 마저 돌아가시자 바깥일을 전혀 모르던 외할머니는 수를 놓던 고운 솜씨로 고관대작의 집에 한복을 지어 대는 일로 가족들의 생계를 유지하셨다고 했다. 시대물에 나올 법한 이야기다.

외할머니는 서른 초반에 청상과부가 되신 후 딸 넷과 홀로 오랜 세월을 사셨다.

내 어린 시절의 훌륭한 가두리였던 외할머니와 엄마 그리고 이모들은 모두 옛날 사람들이 되셨다.


다섯 명의 장난꾸러기를 돌보시면서도 외할머니가 야단을 치거나 큰 목소리를 내시는걸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그저 보듬고, 고운 사랑만 내리셨다.

우리가 함께 뛰어놀고 할머니 앞에서 재롱을 떨 때 손자들 틈에 끼어있는 홍일점인 나를 특별히 아껴주셨다.

한 번도 속을 내보이신 적이 없는데 내가 아들을 낳았을 때 참 기뻐하셨다.

“잘했다. 아들을 낳았구나. 그래야지. 이제 안심이야”

그때 외할머니의 깊이 묻어두셨던 아픔의 마음을 알 것 같았다.


아들이 백일을 막 지났을 무렵.

봄볕이 가득 드는 거실에서 아이는 잠들어있고, 나는 빨래를 개고 있었다.

아이의 이불 위로 뭔가 팔랑 거리는 그림자가 보여 창밖을 보았다.

하얀 나비 한 마리가 꽤 오랫동안 머무른다.

‘이상하다. 11층은 나비가 오기에 너무 높은 거 아닌가?’


그때 전화가 울렸다. “할머니가 돌아가셨어..”



외할머니. 나의 외할머니는 이름도 신식이었다.

멋진 사람 박태희 씨.

늘씬하게 키가 크고, 한복의 자태가 아름다웠던 그리운 외할머니.

이제 다시 품에 안긴 네 딸과 모든 고생과 시름은 잊고 언제나 편안하시길 바랍니다.

외할머니의 솜씨를 그대로 닮은 이모의 송편
할머니께 배운 나의 만두. ”그사이는 예쁜딸을 낳겠구나“

라면 이야기지만 라면 사진이 없다. 송편과 만두가 먹고 싶어 지는 라면 이야기.



* 원글은 2024년 2월 21일에 작성된 글입니다.*

초고가 된 -눈이 오면-엔 눈이 온 다음 날의 이야기가 들어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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