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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사이 Oct 02. 2024

그믐달 친구

고마워요. 모두.


이마에 그믐달 하나.

눈가에 그믐달 하나.

볼에 완벽한 그믐달 하나.

처음엔 커다란 한 개의 그믐달이었다.

서로 한 몸이었던 적이 없다는 듯 세 개로 나뉘더니 세월이 흐르며 적당히 흐려지는

내 얼굴엔 그믐달 세 개가 있다.

50년을 넘어 생을 마감하는 순간까지 함께 할 그믐달 친구가 있다.


나는 세 살에 겪은 그 사고 상황이 전혀 기억에 없고, 아픔도 모른다.


셋째 이모가 사정상 맡겨두어 마당 벽에 세워둔 커다란 공장용 난방 난로가 있었다.

아버지는 안고 있던 나를 잠시 내려놓았고, 커다란 난로는 아장아장 걷던 세 살짜리를 덮쳤다.

굵은 연통의 동그라미가 아기의 얼굴을 지나고 가슴팍까지 찍었다.

자칫했으면 왼쪽 눈이 하나 없는 운명이 될 수도 있었고, 어쩌면 그날이 마지막 날이 되었을 수도 있었다.

그날의 일에 대해서 엄마와 아버지에겐 상황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다.

부모님은 그날을 말하기 어려웠을 것이고, 어쩌면 기억에서 지우고 싶었을 그날이었을 것이다.


다친 아이를 안고 동네의 외과 병원으로  온 가족이 뛰었다고 했다.

세 살짜리 작은 조카딸을 막내이모가 안고 수술실로 들어갔다.

수술을 하는 내내 조카를 이모의 심장에 붙여 꼭 안고 편안한 요람이 된 채 있었다.

나의 수술침대가 된 막내 이모의 팔은 내 몸의 모양대로 화석이 된 듯 돌처럼 굳어 한참 동안 펴지지 않았다고 했다.

마취를 하지 않고 꿰매야 나중에 흉이 덜 진다는 의사 선생님의 말에 의해 마취 없이 수술이 진행됐다.

이모만 아는 그 수술실 안에서의 내 모습과 내가 한 말을 선명하게 기억하고 말을 전해주었다.

“넌 말을 빨리 했고, 잘했거든. 네가 그러더라. 이모 괜찮아. 안 아파.. 그 조그만 것이... 글쎄 그러더라 “

그러곤 움찔거리며 세 살짜리가 꾹꾹 울음을 참으며 간혹 “아야” 하며 참았다고 한다.

이모의 심장소리가 나를 안심시켰을 것이라 확신한다.


다행히 눈을 피했고, 동맥을 피하고, 심장을 피했다. 운이 좋았다.

나는 가끔 생각한다.

세 살 이후의 삶은 덤으로 사는 행운의 날들이었으니 고맙지 않은 것이 없고,

기억 안나는 그날이 묘비에 적힐 날짜였다고 생각하면 그날이 언제가 되든 아쉽거나 별로 두려운 것이 없었다.

그렇지만 잠재된 트라우마인지 병원은 체질적으로 무섭고 싫다. 병원과 친해져야 할 나이가 되니 조금 걱정이 된다.


중학교 때 친구는 팔뚝 전체에 큰 점이 있었는데 여름에도 늘 춘추복 긴팔을 입고 다녔다.

흉터는 얼굴이 커지며 이마와 눈가, 볼로 3단 분리가 되어 얼굴 전체에 있으니 가면을 쓸 수도 없는 노릇이고, 숨길 방법은 없었다.

“아이고, 어쩌다 여자 애의 얼굴에 저리 흉터가 생겼을까? 쯧쯧”

“예쁘기만 한데 뭘. 그사이야, 신경 쓰지 않아도 돼. 넌 다 괜찮아! “

지나치는 사람이 혀를 찰 때 그 사람에게 대꾸하지 않고, 엄마는 내게 그렇게 말하셨다.

아이보다 더 큰 마음의 상처와 흉터가 생긴 주변 사람들과 함께 살며 나는 무사히 어른이 되었다.


결혼이 예정되자 엄마는 내 얼굴의 흉터를 성형수술 해주고 싶어 했다.

“그때 생각만 하면 내가..”   평생의 한이었다고 하셨다.

사고가 있었던 그날, 엄마는 마당에 있던 난로를 망치로 치고 돌을 던지며 미친 사람처럼 난로를 부쉈다고 했다.

엄마로부터 처음 듣는 한이 된 그날의 이야기였다.

겁이 많은 나는 흉터 복원수술을 하고 싶지 않았지만 엄마의 마음속에 생긴 상처가 흉터가 되지도 못한채 여전히 아픈 것 같아 하겠다고 했다.

큰 병원 원장이셨던 친구 아버지를 통해 선생님을 소개받고, 진단을 받고 날짜만 정하면 되는 일이었다.

남자친구는 “아무렇지도 않은데 왜 수술을 하려고 해? 난 네 모습이 좋아. 아무렇지도 않아 “

그의 한마디는 수술을 포기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엄마의 실망스러운 눈을 잊을 수가 없다.

‘바보! 그때 흉터를 지웠어야지.’


나의 오래된 흉터를 당사자인 나보다 각자의 다른 이유로 마음에 흉터를 갖게 된 된 분들이 모두 세상을 떠나셨다.

가장 큰 흉터를 갖었을 엄마와 아버지, 난로 주인인 셋째 이모, 수술실의 나의 침대가 되어주셨던 막내이모..

모두들 나를 볼 때면 내 얼굴의 흉터가 아주 크게 보이셨을 것 같다.

그분들께 한 번도 말한 적 없는데 난 괜찮았다고 말하고 싶다.



당신들의 마음이 있어서
난 정말 괜찮았어요




흉터를 그믐달로 표현한 것은 왼쪽 편 얼굴에 있기 때문이다.

나는 왼쪽 얼굴이 더 마음에 든다. 왼쪽 눈이. 왼쪽 얼굴 선이 좋다.

사진을 찍을 때 나도 모르게 자꾸만 왼쪽 얼굴을 내세운다.

어릴 때 사진엔 흉터가 선명한데 어른이 된 후엔 화장이란 좋은 기술 때문이기도 하지만 별로 눈에 띄지 않는다.


첫 아이가 세 살 쯤이었을까?  

“엄마 이거 모야? “  

작은 손으로 내 볼의 흉터를 만지며 아무도 묻지 않는 것을 물었다. 순수한 어린 눈에 비친 궁금증이다  

“응 그거.. 강아지랑 너무 신나게 놀다가 꽉 물렸지 모야. 봐봐. 딱 강아지 입 만하지? “    

“정말 그러네. 웃기다”   

천진난만한 아이가 사랑스럽게 까르르 웃었다.

‘내가 딱 요만했었겠구나...‘


내가 얼굴에 흉터를 갖고 사는 건 특별하지 않다. 남이 말하기 전까지는..  

눈에 안 띌 리가 없는 큰 흉터는 남들이 안보일리가 없는데 쉽게 말하지 못한다.  

어떻게 된 일인지 궁금하여 묻고 싶을 텐데 사람들은 묻지 않는다.  

‘대단해서일까? 별거 아닌 걸까?’  전자는 내 생각이고, 후자는 타인의 생각일 것이다.  

예전에 실험하는 프로그램이었던 스펀지에선 시선을 끄는 탈을 머리에 쓰고 사람이 많은 곳에 서있는 실험을 했다.   

탈을 쓴 실험자는 마치 사람들이 집중하여 나만 볼 것 같은 부끄러움에 나서길 두려워했다. 모든 실험이 끝나고 지나친 사람에게 물었다.  

“머리에 탈 쓴 사람 보셨어요?”  ”아뇨. 못 봤는데요. 어디요?”  

생각보다 사람들은 내가 아닌 남에게 생긴 일에 관심이 없고, 오래 기억하지 않는다.  

몇십 년이나 되는 오랜 시간 동안 직접 임상실험해 보니 정말 그렇다.

그러니 몸과 마음에 커다란 흉터를 하나쯤 가지고 있어도 용기를 내고 어깨를 쭉 펴고 살아도 된다.


흉터는 어른이 되고서도 가끔 간지럽기도 하고, 빨개지기도 하며 계속 존재감을 드러냈다.

그런데 몇 년 전부터 아무런 증상이 없다.

“그믐달은 잘 있나? “ 하고 손으로 살살 만져본다. 없어지면 왠지 쓸쓸할 것 같다.

종종 느껴지는 오래된 상처와 흉터를 종종 잊어버린다.

이마와 눈가 그리고 볼에 한평생을 함께 가는 그러나 한 번도 원망한 적이 없는 그믐달 모양의 친구는 이제야 정말 내 것이 된 것 같다.

정말 신기한 것은 남편을 비롯한 나의 아이들, 친구 가까이에 있는 그 누구도 나의 흉터를 부끄러워하거나 이상하게 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는 소중한 그들을 살아남은 두 눈으로 보고, 뛰고 있는 심장으로 느낀다.

그때 세 살의 나이로 인생이 멈췄더라면 좋았었겠다는 생각을 때때로 하며 살아왔다.

그러나 살아있길 잘했다.

살아있어서 느끼게 된 모든 일들에 대하여.

“그사이야, 넌 다 괜찮아”라고 말해준 엄마가 내 엄마였음에 대하여.

그믐달 친구와 함께 살았음에 대하여.


“고마워요. 모두”


2024년 10월 2일(음력 8월 30일)

동트기 전 동쪽 하늘에서 잠깐 볼 수 있는 그믐달을 보는 것은 어렵다.

밖을 내다보니 이미 동이 텄고, 그믐달은 어디론가 갔다.

많은 것이 생각나는 오늘은 그믐이다.




* 그믐달 (Old moon)

초승달, 보름달을 거쳐 그믐달이 된다.

음력 27~30일에 나타난다.

동트기 전 동쪽 하늘에서 잠깐 볼 수 있으며 이내 시야에서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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