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 작은 방 책상 맨 위 칸에는 먼지 쌓인 수첩 같은 게 열 개정도 꽂혀있다. 태블릿 절반 정도의 크기에 색깔은 대부분 핑크색이다. 인디핑크, 파스텔핑크, 베이지 핑크, 핫핑크, 마른 장미꽃잎 같은 핑크 등등. 이 집에서 핑크색으로 된 뭔가를 살 사람은 어릴 적 나 아니면 엄마뿐이기에, 엄마 것이라 확신했지만 들춰 보고 싶을 만큼 대단한 게 있을 것 같진 않았다. 처음 그걸 열어본 건 한 3년 전쯤이다. 엄마가 연도별로 사용한 다이어리들인데, 2009년부터 2012년까지는 굉장히 공들여서 자세히 엄마의 과거를 적어두었다.
엄마의 다이어리 중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2012년도 거다. 2012년은 내가 태어난 해이다. 이 해에 적은 다이어리는 TMI의 극치를 이룬다. 조선왕조실록이 이렇게 자세할까 싶을 정도이다. 기록은 1월이 아니라 내가 태어난 달인 4월부터 시작되는데 앞부분에 있는 월간 플래너에는 나의 출생일부터 예방접종 한 날, 늘어가는 몸무게 등이 적혀있고, 주간 플래너에는 아무도 궁금해할 것 같지 않은, 시간대별로 먹은 모유의 양과 이유식의 종류와 양, 응가한 횟수와 양, 잠잔 시간, 몸무게, 매일의 체온과 아플 때 먹은 약 등이 적혀있다. 그리고 거의 매일 쓴 일기에는 엄마가 나를 출산할 때의 상황과 모유를 잘 먹지 못해 힘들어하는 나의 모습, 태어난 지 일주일 후쯤 탈락한 배꼽을 찾느라고 허둥대던 엄마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그 다이어리에서 나는 처음에는 태명인 ‘봄이’로 불리다가 ‘ㅇㅇ’이로 불리고 있다.
엄마가 분석한 나의 울음소리에 대해서 적어둔 부분을 볼 때는, 동물행동연구가가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40일간 ㅇㅇ이를 보면서 알게 된 게 있다. 배가 고플 때면 어딘가가 아주 많이 아픈 것처럼 갑자기 서럽게 운다. 아기들은 배가 고프다고 갑자기 이렇게 서럽게 울까 싶은 생각이 든다...” 나를 목욕시키면서 아빠가 물로 장난을 치니 “아효~”라는 소리를 냈고, 놀다가 처음으로 “꺅~~~” 소리를 질렀던 날짜, 내가 처음 “엄마”를 했던 날짜도 적어두었다. 언제 처음 고개를 가누었는지, 언제 처음 뒤집기, 되집기를 했는지, 배를 밀며 기지 못하자 옆으로 빙그르르르 굴러서 이동한다는 이야기도 적혀있다.
태어난 지 50일이 되어서는 드레스와 꿀벌 옷을 입고 사진을 찍었고, 오르골 연주 음악을 특히 좋아하는 것 같다는 이야기와 다양한 소리의 옹알이들, 이불에 그려진 인형 그림을 손으로 잡으려고 애쓴다는 이야기, 100일 잔치에서 이모와 외삼촌들이 예뻐해 주던 이야기도 빼곡하게 적혀있다. 나의 육아 일기로 채워진 이 다이어리에는 내가 돌이 되었을 무렵의 이야기까지 채워져 있다.
동생이 태어난 해인 2016년도 다이어리도 찾아봤는데, 이때는 엄마도 이런 TMI가 불필요하다고 생각했는지, 자세한 기록이 없었다. 월간 플래너에 예방접종이나 투약일지, 행사 정도만 적혀 있고, 일기도 한두 달에 한 번 정도가 고작이다.
지금도 나는 내 이야기가 적힌 다이어리를 종종 들춰 보고 있다. 이제는 아예 내방 책꽂이에 꽂아두었다. 특히 엄마가 동생을 대하는 모습에서 질투가 느껴질 때나 엄마랑 싸울 때 꺼내 보는 것 같다. 이 기록들을 보면서 나에 대한 엄마의 사랑을 확인하고 싶은지 모르겠다. 이 다이어리가 책이라고 한다면 독자는 아마 나와 엄마뿐일 테지만, 단 한 명에게라도 평생 꺼내 보고 싶은 책이라면 그것도 의미 있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사실 엄마의 여러 다이어리 중에서 가장 흥미진진한 것은 2009년과 2010년 거다. ‘이 다이어리들은 아빠가 읽는다면 안될 것 같은데’ 하는 생각을 하며 조마조마하며 읽었었다. 엄마는 2011년 4월에 결혼했다. 2009년과 2010년은 아빠와 연애할 때 이야기가 적혀있다. 아빠랑 엄마의 연애는 영화 속에 나올 법한 절절한 사랑은 아니었다. 어제 싸우면, 오늘 아빠가 엄마 퇴근길에 기다렸다가 집에 데려다주면서 두유와 바나나빵을 내밀어 화해하고, 내일 다시 토라지는 식이다.
하지만 시시한 연애 이야기 속에서 내 가슴을 두근두근 뛰게 만든 이야기가 있었다. 엄마의 전 남자친구가 몇 번 찾아오는 이야기였다. 아빠를 만나기 전에 사귀었던 남자친구 같은데 첫 번째 찾아왔을 때 엄마는 ‘사실은 믿기지 않아서 꿈인 것처럼 반가웠다’고 했고, 두 번째 찾아왔을 때는 냉정하게 대했고, 마지막에 연락이 왔을 때는 결혼한다고 거짓말을 했다고 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엄마는 아빠와 결혼은 전혀 생각이 없었던 것 같은데... 그 후 1년 정도가 지났을 무렵 겨울, 엄마는 다이어리에 아빠와 결혼을 준비해야 할 것 같다고 적은 후 더 이상 다이어리를 쓰지 않았다. 다음 화가 궁금한 드라마가 갑자기 끝나버린 같은 느낌이었다.
언젠가 엄마에게 “엄마는 왜 아빠랑 결혼했어?”라고 물어봤다. 엄마는 “결혼은 그냥 타이밍인 것 같아. 결혼할 시기에 아빠를 만나서, 결혼한 것 같아”라고 말했다. 그걸 본 남동생이 몇 분 후 엄마에게 똑같이 물어봤다. “엄마는 우리 ㅇㅇ이 만나려고 아빠랑 결혼했지~~”하는 거다. 참나~ 엄마는 또 나한테는 T면서 동생한테는 F다. 내가 엄마의 약점을 다 알고 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