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외할머니의 휴대폰에서 유물 같은 나의 어릴 적 영상을 봤다. 알을 깨고 나온 새끼 새처럼 머리숱이 적던 돌 무렵의 내가 할머니, 할아버지와 트라이앵글 대열로 마주 앉아, 트로트 노래를 들으며 고개를 흔들고 박수를 치고 있었다. ‘K-POP과 노래방에 열광하는 나는 이때부터 흥이 많았구먼’ 하며 영상을 반복해 보는데, 영상 속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아주머니, 아저씨라고 불러도 될 정도로 젊어 보였다.
외갓집은 대가족이다. 할머니, 할아버지와 엄마의 형제들이 총 5명(다들 결혼했으니 짝꿍들까지 10명), 여기에 나를 포함한 손주 9명을 더하면 모두 21명이다. 외할머니에게 나는 첫 손주나 다름없었다. 나보다 보름 정도 일찍 태어난 외삼촌의 아들이 있지만, 외숙모는 당시 일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할머니 집에 손주를 맡길 일이 드물었다. 반면 엄마는 출산 후 1년 만에 다시 일을 시작했고 나는 외갓집에 맡겨지는 일이 많았다. 나의 어린 시절 영상들을 볼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30여 년 만에 관계를 맺어야 하는 아기 사람이 신기하고 귀엽고 사랑스러우면서도 조심스러웠던 것 같다. 첫 아이를 키우던 때처럼.
할머니의 집은 주택이다. 현관 앞 크고 작은 화분과 마당에서 각종 꽃과 나무들이 자란다. 방울토마토며 오이, 고추 같은 채소도 심어 키우신다. 5-6년 전까지만 해도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마을에 있는 밭에 큰 토마토와 옥수수, 참깨, 들깨 같은 것을 심어 키우셨는데, 허리가 아픈 할머니를 걱정하는 엄마와 이모, 외삼촌의 성화에 못 이겨 농사를 접으셨다. 밭에서 키운 것 중에 큰 토마토와 옥수수를 좋아했던 나로서는 아쉬운 일이었다.
할머니는 집 마당에서 키우는 방울토마토와 밭에서 키우는 큰 토마토를 다르게 부르셨다. 방울토마토는 토마토라고 하는데, 밭에서 키우던 큰 토마토는 꼭 ‘도마도’라고 하셨다. 그리고 도마도가 익으면 접시에 먹기 좋게 자른 후 설탕을 솔솔 뿌려 나에게 가장 먼저 먹이셨다. “ㅇㅇ아~ 도마도 먹어” 도마도를 다 먹을 때쯤이면 꼭 덧붙이는 말씀도 있다. “국물(?)도 마셔”. 옥수수는 알을 뜯어먹은 것이지 씹다 만 것인지 모르게 먹던 나를 위해 옥수수 알을 일일이 떼서 숟가락으로 퍼먹을 수 있게 밥그릇에 담아주셨다. 지금도 마트에서 도마도와 옥수수를 보면 할머니가 생각난다.
두 돌이 되기 전까지 나는 엄마가 일하러 가면 할머니 집에서 지냈다. 어릴 때부터 잠이 많았다는 나는 할머니가 업고 ‘섬집 아기’라는 노래를 한 곡 불러주면 노래가 끝날 때쯤 곯아떨어졌다고 했다. 그 말을 칭찬처럼 자주 하시던 할머니를 보고, ‘요즘 젊은 엄마들이 “아기는 잘 때가 가장 예뻐요”라고 하던데 할머니도 자는 내가 가장 예뻤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다.
세 살이 돼 어린이집에 간 후에도 엄마 일이 늦게 끝나고 아빠 퇴근이 늦어질 때면 할머니 집에서 보낼 때가 많았다. 그 시절 나를 가장 즐겁게 하는 일은 마트 나들이었다. 한글을 읽지 못했던 나는 노란 마트(이마트), 초록 마트(농협 하나로마트)라고 부르며 마트에 가자고 할아버지를 볶았다고 한다. 할아버지는 지금도 “ㅇㅇ아~ 노란 마트 갈까?”라고 하시며 그때를 기억하고 웃으신다.
어린이집에 다니기 시작하면서 나는 엄마에게 동생을 낳아달라고 조르기 시작했다. 병원놀이, 주방놀이를 같이 할 수 있는 여동생 있는 친구들이 부러웠다. 엄마는 늘 단호하게 동생은 없다고 하셨다. 나는 눕히면 눈을 감고 일으키면 눈을 번쩍 뜨는, 내가 가지고 있는 인형 중에서 가장 사람과 비슷해 보이는 콩순이 인형을 동생으로 여기며 데리고 다녔다. 그래도 동생 있는 친구들이 부러운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렇게 나의 ‘동생 타령’이 잦아들었는데 얼마 후 엄마 뱃속에 동생이 생겼다고 했다. 뛸 듯이 기뻤다. 그때는 엄마가 동생을 낳는다면 당연히 여동생이 나올 거라 생각했던 것 같다. 엄마의 임신 소식을 들은 외할머니와 큰 이모의 반응은 냉랭했다. 지금도 큰 이모는 내 동생을 보다가 “저렇게 예쁘고 똑똑한데 안 낳았으면 어쩔 뻔했어. △△이 임신했다고 했을 때 엄마(외할머니)가 너네 엄마 미쳤다고 했는데...”라는 말을 하곤 한다.(외갓집에서 할머니와 이모, 엄마는 유독 “미쳤네, 미쳤어, 미쳤고만”이라는 말을 자주 한다. 처음엔 그 표현이 어딘지 비속어처럼 느껴졌지만, 대화의 맥락을 보면 외갓집에서는 ‘미치다’를 동사가 아닌 감탄사로 봐야겠다라고 생각하고 있다.) 이모와 할머니가 엄마의 임신을 반기지 않은 건 나 때문이다. 엄마는 나를 임신하고 여섯 달쯤부터 조산기가 있었다고 했다. 조산기는 출산을 앞둔 진통과 비슷한 건데, 폐가 다 자라지 않은 아이가 세상에 나오면 위험하다고 했다. 엄마는 산부인과에 입원해서 조산을 막는 주사를 맞아야 했다. 그 주사는 부작용이 있는데 심장이 빨리 뛰고 수전증처럼 손을 떤다고 했다. 엄마가 동생을 임신할 무렵에는 그 주사가 부작용 때문에 처방이 중단됐다는 얘기도 훗날 이모와 엄마의 대화를 통해 알게 됐다. 할머니는 엄마와 같은 증상으로 입원했던 산모가 한밤중에 구급차에 실려가는 모습을 보고 걱정이 더 컸던 것 같았다. 엄마는 나를 임신했을 때, 아기가 폐호흡이 가능한 37주까지 병원에서 버티다가 퇴원했고, 퇴원 3일째 되는 날 2.9kg인 나를 낳았다고 했다. 엄마는 동생을 임신한 후에도 조산기가 있었지만, 다행히 입원할 정도는 아니었다고 했다. 동생은 임신 기간 40주를 다 채우고 3.4kg으로 세상에 나왔다.
엄마가 동생을 임신하고 배가 불러오자 나도 이제 곧 동생이 생긴다는 게 실감 났다. 그 무렵 한글을 익기 시작한 나는 밤마다 엄마 배에 대고 책을 읽어줬다. 배를 쓰다듬어주며 얘기하는 것도 좋았다. 그런데 엄마 뱃속에서 나온 동생은 남자였다. 실망스러웠지만 그때는 만지기조차 조심스러울 정도로 작은 아기를 직접 보니 여자든 남자든 중요할 것 같지 않았다. 엄마는 1년 정도 집에서 동생을 키우고 다시 일을 하러 나가셨다. 두 돌이 되기 전까지 외할머니 집에 맡겼던 나와 달리 엄마는 동생을 어린이집에 맡긴다고 하셨다. 동생이 다닐 어린이집에서 받아온 가방은 동생이 들어가도 될 정도로 커 보였다. 할머니는 다시 엄마에게 미쳤다고 하며 동생을 외갓집으로 데려 오라고 하셨다. 그 후 우리는 외갓집 근처로 이사했다. 그때부터 엄마의 일이 늦게 끝나는 날이면 나는 동생과 함께 외갓집에 갔다.
사람들은 동생이 남자애지만 순한 편이라고 했다. 내가 콩순이 인형을 끼고 살던 것과 달리 동생은 공룡과 로봇을 끌고 다녔지만 나와 같이 주방놀이, 병원놀이 하는 것을 싫어하지 않았다. 동생은 언제나 내가 시키는 대로 환자 역할을 충실하게 해 주었기에 만족스러웠다. 여동생처럼 보이면 좋을 것 같아서 앞머리를 사과 꼭지처럼 묶어주기도 했다. 어린 동생 때문에 외갓집에 갈 일이 많아진 나는, 할머니가 동생 돌보는 모습을 보면서 내가 어릴 때도 이렇게 돌보셨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곤 했다. 할머니는 마트에 장 보러 가실 때 다른 것은 가격대비 싸고 좋은 것을 고르지만, 나와 동생에게 먹일 요구르트나 우유, 치즈, 과일 같은 것은 가장 비싼 걸 집으셨다. 뭐가 더 좋은 건지 판단하기 어려울 때, 그게 우리에게 먹일 것일 때는 비싼 게 좋을 거라고 생각하시는 것 같았다.
할머니는 우리에게 먹일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셨다. 방금 밥을 먹었는데 밥 먹인 후 한두 시간 후 먹일 간식을 걱정하신다. 어쩌다 하루 종일 할머니 집에 있어야 하는 날이면 할머니는 그날 아침부터 저녁까지 우리에게 먹일 밥과 간식에 대한 계획을 세워두셨다. 영양사 선생님 저리 가라 할 정도였다.
동생은 할머니에게 자주 업히지 못했다. 허리가 안 좋아진 할머니가 동생을 업으려고 하면 엄마는 할머니와 싸웠고, 할머니 집에 오지 않겠다고 할 때가 많아졌다. 그리고 얼마 후 정말 할머니 집에는 주말이나 가족 모임, 명절, 생신 같은 행사가 있을 때 가게 되었다. 할머니 집에 가게 되면 할머니는 내 이름에 성을 붙여 부르며, 할머니 집 마당에 핀 꽃처럼 환하게 웃으신다. 나는 내 이름에 성을 붙여 부르는 걸 굉장히 기분 나빠하는데 이상하게 할머니가 그렇게 부르는 건 기분 나쁘지가 않다.
할머니는 키가 작은 편이셔서 이제는 내 키가 할머니보다 크다. 지난번 내 생일 때는 은은한 파스텔톤 봉투에 용돈을 넣어서 주셨는데, 그 봉투에는 내가 할머니 생신 때 드린 편지에 붙였던 토끼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 스티커를 버리지 않고 가지고 계시다가 나에게 붙여주신 거였다. 나는 그 토끼 스티커를 버릴 수 없었다.
할머니의 휴대폰에 저장돼 있는 영상을 나의 카톡으로 전송해서 저장했다.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어린 시절 영상을 보면서 그 시절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표정을 보면서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그 과거를 앞으로도 더 자주 찾고 싶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