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재기를 기다리며
영주는 오랜만에 지나에게 전화를 걸었다. 평소에는 카톡으로 간단하게 희재의 소식을 전하곤 했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지나가 괘씸하게 느껴졌다.
희재는 벌써 세 번째 자살을 시도했다. 희재의 새엄마는 이번에도 영주에게 하소연하는 전화를 걸어왔다. 그저께 수면제를 최대한 모아서 먹고 잠든 희재를 발견하고, 응급실로 데려가 위세척하고, 다음 날 집으로 데리고 왔다고. 영주에게 집으로 와서 희재와 대화 좀 해달라고 부탁을 했다.
지나는 늘 신기하다고 말했었다. 희재의 새엄마는 돌아가신 희재 어머니보다 희재와 닮았다고. 그런데, 외모만 그럴 뿐 둘은 전혀 친하지 않다고 들었다. 희재는 새엄마가 이복남동생에게만 애정을 쏟을 뿐 자기한테는 무관심하다고 말했다. 그래서 희재는 자신이 한 부모 가정 출신이라고 농담했었다. 영주는 희재의 말대로라면 희재는 벌써 이 세상 사람이 아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희재의 새엄마는 희재를 벌써 세 번째 살려 놓았다.
희재의 첫 자살시도 후, 희재의 새엄마는 희재를 정신과 치료를 받게 하고, 병원에 데리고 다녔다. 예상과 달리 희재는 새엄마의 말을 잘 들었다. 영주는 합숙할 때 듣고 상상했던 희재와 새엄마의 관계가 실제 모습과 달라 혼란스러웠다. 희재의 새엄마가 유달리 희재를 아끼고 있는 모습이 보였기 때문이다. 영주는 자신의 솔직한 마음을 희재에게 말하지 않았다. 친구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는 것 같아 망설여졌다.
" 가게 문 열어 놓고 뭐 해? 멍하니?"
영주의 엄마가 카페에 들어서며 물었다.
영주는 깜짝 놀라 일어섰다.
"세상에. 이렇게 손님이 없는 거야? 손님보고 깜짝 놀라게."
"아냐. 엄마. 우리 가게 잘 되는 거 알잖아. 이게 다 엄마 쿠키 반죽 덕분이지. 인기 짱. 이제는 인터넷 주문도 폭발이야."
영주 엄마는 눈에 힘을 주고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그렇지. 빵가게를 운영한 지가 얼추 30년이다. 그것도 동네 시장 빵가게. 뭐, 브랜드가 있기를 해.... 대기업 프랜차이즈 빵집과 경쟁해서 잘 버티고 있는 럭키 빵집"
"럭키와 소년"
영주는 엄마의 말에 맞장구쳤다.
"그래. 나는 이제 대본연습 갈 게."
영주의 엄마는 핸드폰 시계를 보고 서둘러 일어났다. 영주의 부모님은 <고도를 기다리며>를 공연하다가 만났다. 아버지는 럭키, 엄마는 소년을 연기했었다. 영주의 부모님은 빵집을 하면서도 계속 연극을 하고 있다. 한 사람이 출연할 때, 한 사람은 가게를 운영한다.
<쿠키 가페>를 열 때, 영주는 버티기로 마음먹었다. 예술가의 삶이 화려하지 않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예술은 인생을 행복하고 구름 위의 삶을 사는 들뜬 기분을 경험할 수 있게 하지만, 매일매일 먹을 수 있는 빵을 주지는 않는다고 영주 부모님은 입버릇처럼 말했다. 그 말을 할 때면, 두 사람은 얼굴을 마주 보며 낄낄거렸다. 그리고 <고도를 기다리며>에서 나오는 장면들을 바꿔 연기하곤 했다.
고고!
디디!
악수하자!
좋다!
내 품으로 와!
네 품 안으로?
이리 와!
그래 간다.
둘이 이런 장난을 칠 때 영주는 재밌어서 깔깔거렸다. 아빠가 블라디미르 역으로 두 팔을 활짝 벌릴 때, 엄마가 그래 간다고 대답하기 전에 영주는 아빠 품으로 뛰어들었다.
영주는 앞으로도 계속 가수 활동을 할 것이다.
*
지나는 꽤 오랜 시간을 창밖 풍경을 바라보며 핸드폰을 들고 서 있었다. 돌로미티의 아름다운 여름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시원하고 맑은 공기가 열린 창을 통해 들어왔다. 7월이지만 전혀 덥지 않았다.
" 너, 너무 한 거 아니야? 희재 소식 알면서 , 어쩜! 나는 네가 몰라서 한국에 안 오는 줄 알았어."
오랜만에 전화를 하면서. 영주가 처음부터 손톱을 드러내지는 않았다. 하지만, 지나가 로마에서 다니기로 한 음악학교를 다니지 않고, 요리학원을 다녔고, 거기서 만난 요리 학교 동창 덕분에 호텔 레스토랑에 취업했다고 말하자, 원망하며, 서운함을 드러냈다.
"잘 살고 있네. 그러면, 친구도 신경 쓸 여유가 있어 보이는데..."
"잘 살긴. 어찌어찌 사는 거야. 꾸역 꾸역이 더 적절하겠다. 어쨌든, 미안해."
지나는 영주에게 자신의 마음을 숨기고 말했다. 사실, 지나는 <소울메이트>가 해체된 후 그룹 멤버들과 단절하고 싶었다.
재민 대표가 일방적으로 그룹이 새 앨범 작업에 들어간다고 했을 때부터 지나는 감이 좋지 않았다. 지나는 재민이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이 싫었다. 지나는 재민의 얼굴에서 애매하고 난처한 표정을 한 번씩 발견했었다. 무언가를 숨기는 것 같았다. 그래서 다음 앨범을 기약하는 공연을 마친 뒤 지나만 울었었다. 다른 멤버들은 재민을 담백하고 명료한 매니저로 철썩 같이 믿었다. 영주, 희재, 한나는 지나가 재민을 믿지 못하는 것을 탐탁지 않게 생각했고, 지나를 일시적으로 따돌렸다. 셋이서 모여 수다를 떨다가 지나가 왔을 때 말하기를 멈추고, 눈빛을 교환하던 모습이 지나는 한 번씩 떠올랐다. 특히, 분장실에서 희재가 한나와 대화하다 지나가 나타나면, 말을 멈추고, 거울을 바라보던 장면이 떠오를 때, 배신감으로 마음이 싸늘해졌다. 멤버들의 따돌림은 지나에게 깊은 마음의 상처가 되었다. 시간이 지나서인지 영주도, 희재도 지나를 왕따 시켰다는 사실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지나는 아침 뷔페 서빙까지 마치고 등산복으로 갈아입고 파쏘 셀라에 있는 마운튼 리조트를 나왔다. 마운튼 리조트와 바로 붙어 있는 관짝 케이블이라고 불리는 1,2인용 케이블을 타고 싸소 룽고 봉우리로 올라갔다. 케이블카를 타는 동안 지나는 희재를 떠올렸다. <해피 핼러윈>은 지나가 작곡하고 희재가 작사한 곡이었다. 지나와 희재는 둘 다 한부모 가정이라고 느끼는 공통점 때문인지 유난히 가까웠다. <소울 메이트>가 만들어질 때, 아이돌에 관심이 없는 지나를 끌다시피 해서 인터뷰를 같이 보러 간 사람도 희재였다.
지나는 자신의 꿈은 작가라며, 많은 관중들 앞에서 노래 부르고 춤추는 아이돌 가수는 원하지 않는다고 오디션에서 밝혔다. 희재가 혼자 가기 두렵고 떨리다며 '함께 오디션 보기'를 부탁해 도와주기 위해서 왔다고 솔직하게 말했다.
" 제발 제 친구 희재를 합격시켜 주세요. 희재는 작사 작곡도 가능한 훌륭한 뮤지션이에요."
지금은 대형 연예기획사의 이사로 능력을 발휘하고 있는 재민 대표는 지나에게 물었다.
"지나 씨도 작사, 작곡하는 것으로 들려요. 희재 씨 작품을 알아요?"
"네, 우리 둘이 서로의 작품들을 듣고 의견을 내줘요. 작사를 같이하기도 하고, 음을 써주기도 해요. 어떤 때는 작곡을 해서 연주하고도 음을 못 잡을 경우가 있거든요."
지나는 케이블카 유리창에 비치는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작은 얼굴, 작은 코, 작은 입. 눈에 확 띄는 희재의 외모와는 다르게, 지나는 평범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그래도, 지나는 어릴 때부터 갸름한 얼굴과 작은 이목구비들 때문에 김 홍도의 미인도를 연상시킨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
지나는 기대하지 않았는데 희재와 <소울 메이트> 멤버로 뽑혔을 때, 하늘을 나는 동작을 하며 지나의 주위를 빙빙 맴돌았던 희재가 떠올랐다. 희재는 아름다워서 한번 스쳐 지나간 사람들은 꼭 뒤돌아 보게 만들었지만, 자존감이 낮았다. 곁에 있을 때, 안정감이 없고 우울하고 힘없어 보였다. 희재는 지나와 유치원동창이었다. 유치원 때만 해도 희재는 세상의 모든 아침을 가진 아이였다. 희재의 어머니의 죽음은 희재를 송두리째 바꾸어 놓았다. 요란스러운 새엄마의 출연도 마찬가지였다. 희재는 이상하리만큼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새엄마를 닮았다.
희재는 크고 동그란 눈을 가지고 있었다. 속눈썹이 길고 촘촘하게 나서 큰 눈에 그윽하고 신비롭게 음영이 졌다. 희재의 눈을 쳐다보면 눈물이 그렁그렁 거리는 것처럼 촉촉하게 보였다. 코도 끝이 뾰쪽하게 날이 서 있어서 차갑고 지적인 분위기가 더해졌다. 하지만 꽤 두툼한 입술과 큰 입이 눈과 코와는 다르게 육감적인 분위기를 주어서 얼굴이 뭔가 부조화스러웠다. 사람들이 바로 그 부조화스러움을 확인하기 위해 뒤돌아 보는 지도 모른다. 희재의 큰 입은 웃을 때 앤젤리나 졸리 같은 느낌을 주어서 희재의 별명은 에인절이었다. 찰떡같이 잘 어울리는 별명이었다.
지나는 영주의 비난이 기분 나쁘면서도 희재를 만나야겠다는 생각은 들었다.
이번에 돌로미티 여름 시즌 끝나면 스키 시즌이 시작되기 전에 한국으로 떠날 것이다.
산장에 도착하자 지나는 케이블카에서 뛰어내렸다. 바닥에 내리도록 도움 주는 아저씨께 가볍게 목례를 하고 산장으로 카푸치노커피를 마시러 들어갔다. 귀여운 여자 아이 둘이 언제나처럼 빗자루 놀이를 하다가 지나를 반가워했다. 눈이 워낙 많이 오는 지역이라 자매들은 빗자루와 쓰레받기로 마당을 쓸며 놀고 있었다.
이제 아장아장 걷는 세 살인 안젤라는 천사 같은 미소를 지으며 지나에게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지나는 작은 손을 악수하고 나서 아이 엄마에게 크로와상과 커피를 주문했다. 커피를 마시고 산악 트래킹을 시작할 것이다. 지나는 산장밖 나무 테이블에 빵과 커피를 놓고 산봉우리들을 바라보며 의자에 앉았다.
'이번에는 한국에 가면 , 이것저것 모색해 봐야지'
지나는 틈틈이 쓰고 있는 소설과 노래 가사들을 떠올렸다. 계속 이태리에 머물기에는 수입이 지출을 따라갈 수 없었다. 산아래로 케이블 카를 타지 않고 돌산을 오르고 있는 등산객들이 보였다. 고개를 들어 맑은 하늘과 눈 덮인 산봉우리들을 보았다. 지나는 여름에도 녹지 않는 만년설들을 한참 바라보았다. 돌로미티를 떠나도 이 풍경들을 오래오래 기억하고 싶었다.
지나는 시계를 봤다. 어느새, 암벽등반을 함께 할 독일인 친구와 만날 시간이 거의 다 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