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주일 미술 여행 (11) 울고 나면 용감해진다

"우리는 앞으로 훨씬 더 쿨한 것들을 많이 하게 될 거야."

by 반하의 수필


War cool heute? 봐쿨호이테. 석탄 노천 채굴장에 다녀온 날 새미가 빠르게 말해 한번에 알아듣지 못했던 말이지만, 그때부터 계속 기억하고 있는 문장이다. 봐 쿨! Was cool!이라는 말이고 호이테는 오늘이라는 뜻이다. 봐 쿨이었던 여행이 끝났다. 여행 첫날은 땅끝까지 힘들었고 여행 둘째 날은 조금 나아졌고 여행 셋째 날은 좀 재미있어졌고 넷째 날부터는 집에 가는 날이 다가오는 게 아쉽고 이곳이 무척 좋았다.


태양을 내리쬐며 그림을 그리던 순간. 서늘한 그늘에서 그림을 그리던 순간. 따가운 잔디 위에서 그림을 그리던 순간. 발이 쑥쑥 들어가던 모래섬에서 그림을 그리던 순간. 하루 종일 일주일 내내 그림을 그렸다. 장소만 바뀔 뿐이었다. 그림을 그릴 때 느리게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나무의 작은 옹이나 서랍의 작은 틈 같은 걸 바라보고 그리던 느린 시간이 지나고 나니 어느 때보다 길고 많이 본 일주일이 지났다. 그림 덕분에 한 자리에 오래 머물 수 있었고 자세히 볼 수 있었다. 비슷한 온도로 함께 존재했던 친구들 속에서 장난치고 밥 먹으며 나만 담겨 있었던 같은 살얼음이 녹았다. 낯설기만 했던 열여덟 명 속에서 점점 편안함을 찾아가고 익숙해지는 것이 좋았다. 낯선 것이 익숙해지는 것, 그게 너무 좋아서 여러 곳에 가보는 것보다는 작은 마을이라도 오래 머무르고 매번 같은 카페에 가는 것을 좋아한다. 떨기도 많이 떨지만 금방 사랑스러운 것을 찾아 정을 붙이는 내 마음은 떠날 때가 되더라도 유리창에 남은 스티커 자국처럼 진득한 자국이 남는다. 독일인들과 아침 식사를 하는 것, 함께 요리를 하는 것, 하루 종일 독일어 속에 있는 것, 같은 방에서 잠을 자고 같이 차를 타고 이동하는 것, 마치 처음 독일에 온 것처럼 이 여행은 내게 모든 처음이 되어 주었다. 떠나는 날, 교수님들께 진심을 담아 편지를 썼다. 이런 경험을 하게 해 주셔서, 우리를 받아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평생 잊지 못할 소중한 시간을 보냈습니다.라는 말이었다.


아이들은 자신의 강아지, 부모님, 애인의 품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일주일 동안 못 본 것이 그들에게는 그렇게 큰 것인지 모두 싱글벙글했다. 차를 타고 달리는데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풍경이 나를 외딴섬으로 보내는 것 같았다. 시공간이 이상했다. 집에서 일 년을 떠난 난 일주일의 여행을 기다려줄 가족이 없었다. 꼬리 치며 달려올 강아지도, 반가워할 애인도 없었다. 기숙사에 있는 침대보다 떠나온 숙소의 침대가 더 좋았고 기숙사에 있는 내 냉장고보다 숙소의 냉장고에 더 많은 음식이 있었다. 나와 은주가 그림여행을 하는 동안 스페인에 갔던 현서도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혼자 있을 내 방은 외딴섬 같았다. 한나, 셀리나, 은주와 나누던 잘 자라는 말 없이 아침에는 붕 뜬 머리로 잘 잤냐라며 한국어로 말하던 새미가 있는 곳이 내겐 떠나고 싶지 않은 집이었다. 모두 부모님의 손을 잡고 집으로 돌아가는데 데리러 올 사람 없이 홀로 떠나야 하는 아이가 된 것 같은 낯선 느낌에 가슴이 울렁였다.


3시간 만에 차는 일주일 전과 같은 자리에 도착했다. 아이들은 실었던 그림 도구를 다시 BTZ 안으로 옮기고 커다란 종이 그대로 가져온 자신의 그림을 챙겼다. 냉동 빵, 소금, 설탕, 오일과 같은 남은 식재료는 교수님이 하나씩 바구니에서 꺼내며 가져갈 사람을 물었다. 난 마늘과 발사믹 소스, 망고 주스 따위를 챙겼다. 새미는 내게 팬케이크 위에 뿌리는 흰 가루를 가져가라며 나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내 가방에 넣었다. 팬케이크를 한 번도 만들어 본 적 없다는 내 말에 엄청나게 쉽다고 꼭 해 먹으라고 말했다. 이 시간이 끝나고 아이들은 가벼운 허그로 인사를 하며 서서히 흩어졌다. 열심히 참아온 눈물이 다시 차올랐다. 고개를 숙여 긴 머리카락으로 얼굴을 가려보아도 뚝뚝 떨어지는 눈물로 젖은 바지까지 가려지지는 않았다. 새미와 멜리나는 내 곁에 앉아 걱정스럽고 슬픈 눈으로 나를 지켜보았다. 은주는 울지 말라며 위로하더니 곧 자기도 울어버렸다. 나는 눈물로 범벅된 얼굴에 고개를 들지도 못한 채 누가 울면 따라 울 수밖에 없다며 나를 탓하는 은주의 목소리를 들었다. 고개를 들자 새미는 내 얼굴을 보며 울지 말라고, 자기도 눈물이 날 만큼 슬프다고 했다. 그리고 말했다. “하리, 울지 마. 언제든지 내게 전화하고 메시지를 보내. 모르는 게 있으면 나한테 물어보고. 네가 원한다면 매일매일 볼 수도 있고 우리는 앞으로 훨씬 더 쿨한 것들을 많이 하게 될 거야. 진짜야. 약속해. 배 위에 있는 클럽도 갈 수 있고 슈투트가르트 시내에서 놀 수도 있고 축구도 같이 볼 수 있어. 다음 학기에 내가 기숙사로 이사를 온다면 정말 매일매일 볼 수 있어. 언제든지 메시지 해. 다른 친구들도 다 근처에 사니까 네가 연락만 하면 다들 좋아할 거야. 앞으로 더 많이 만나면 되니까 슬퍼할 필요 없어 하리야.” 멜리나도 말했다. “우리 꼭 다음에 같이 놀자.” 언제든지 메시지 하라고 말하지만 나는 분명 먼저 메시지 하기 어려울 거야, 망설이다 결국 못하고 말 거야. 먼저 해주는 사람은 없겠지. 오히려 슬퍼질 일만 많아진 게 아닐까. 정들었던 아이들과 학교에서 그저 스쳐 지나갈 사이가 될 것이 벌써 마음이 아팠다. 혼자 보낼 일상이 너무 시시해질까 봐 걱정이었다. 적극적으로 나를 위로하는 새미의 마음에 웃음이 나면서도 슬펐다. 눈을 꼭 감고 ‘멜리나랑 친해지게 해 주세요. 큐랑 친해지게 해 주세요. 새미를 자주 만나게 해 주세요.’하고 기도했다.


눈물로 얼룩진 채 캐리어를 들고 계단을 한 층 올랐다. 열쇠를 두 번 돌려 문을 여니 익숙한 냄새가 났다. 여기가 나의 집이었지, 하는 냄새. 조용한 복도를 짧게 지나쳐 내 방에 들어갔다. 내 앞 방에 사는 마리의 인기척이 느껴졌다. 돌돌 말린 커다란 그림들을 옷장 아래에 넣었다. 한국에 가져갈 수 없을 것 같았지만 현서나 내 방에 오게 될 친구들에게 보여줄 수 있었다. 제대로 엉엉 울어버려서 그런지 막상 방에 도착하자 슬픔이 가셨다. 나를 달래준 친구들에게 받은 사랑은 살포시 웃음을 만들었다. 이렇게까지 아쉬워할 수 있다는 것에 큰 감사와 행복을 느꼈다. 마음이 편안했다. 역시 눈물은 힘이 세다. 틀고 잠글 수 있는 수도꼭지와 달리 마음의 수도꼭지는 계획과 의지로 통제할 수 없고 조절하는 것조차 어려운 눈물이 터지기도 한다는 점에서 무언가 영묘한 의미가 있다. 단절과 헤어짐으로 느껴졌던 이 여행의 끝에 선물 같은 경험과 기억을 가득 안은 내가 있었다. 사진첩에는 그 증거로 남은 수많은 아름다운 조각을 가득 가지게 되었고 긴장과 웃음을 반복했던 내 가슴은 비 온 후 굳어진 땅처럼 더 단단해졌다. 일주일 동안 독일 아이들 속에 있었던 덕에 독일어와도 많이 친해졌다. 다시 일상을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러다 어느 날 일주일의 미술여행 같은 다른 꿈같은 날이 찾아오겠지. 내게서 너무 먼 곳의 일상이었기에 여행을 간다고 얻을 수 없는 기회였다. 노력으로 되는 것도 아니고 삶이 데려다주는 수밖에 없다.


짐을 정리하고 있는데 은주에게 카톡이 왔다. 마치 오랫동안 뒤에서 나를 지켜보신 담임 선생님이 써주신 생활기록부처럼 차분하고 다정한 말씨였다.


‘하리야~ 한 주 동안 고생 많았어. 첫날에 많이 감정이 고생하는 것 같아서 걱정했는데 한 주 동안 지켜본 하리는 꾸준히 사람에게 관심을 가지고 그림도 열심히 그리며 성장하는 모습이 보였어. 모든 아이들이 예뻤던 만큼 하리도 예쁜 아이였단다. So proud of you! 습득력이 정말 빠른 영특한 아이 하리. 한 주 동안 얻었던 코멘트와 아이들의 사랑을 잘 저금해서 앞으로도 힘을 얻고 잘 헤쳐 나가자.’


은주의 말마따나 상실감보다는 내가 이미 얻은 힘을 느끼며 곁이 있는 것이 즐거웠던 그 아이들 없이 다시 혼자서도 잘 살아갈 수 있을 거라는 마음이 생겼다. 크리스마스에 함께 보낼 친구가 없다면 자기 집에 오라는 교수님도 만났고 자기가 초대하고 싶다고 말한 친구도 만났다. 오랫동안 기다렸고 떨렸던 미술 여행을 끝나고 돌아왔다니, 시간이 참 빠르게 느껴진다. 매일매일이 새로우니 내가 과거에 살고 있는 것 같기도, 미래에 살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앞으로는 어떤 일상을 보내게 될까, 또 무슨 일이 생길까? 전혀 모르겠어 궁금하기만 한 느낌이 나쁘지 않다. 울었다 웃었다를 반복하는 사이 이곳에서 살아남는데 필요한 마음 같은 게 굳은살처럼 차근차근 쌓이고 있는 느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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