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용기는 애정

독일 장애인 여행 캠프에 워커로 가다 (10)

by 반하의 수필


어떤 용기가 뻔뻔함이라면 어떤 용기는 애정이다. 애정은 내 마음보다 그의 마음을 먼저 헤아린다.

뽑기가 맺어준 인연으로 워커 베라와 함께 방을 쓰게 됐다. 잠들기 직전에 방에 들어가서 기상과 동시에 옷을 챙겨입고 나간 탓에 또래들과 가는 수련회처럼 잠들기 전 속닥이며 우정을 쌓는 일은 없었다. 우리는 매일 밤 “구테 나흐트(잘 자)”라는 말을 나눴지만, 날이 갈수록 서로를 알게 되지는 않았다.

베라는 매일 누군가와 전화했다. 그 통화는 내가 가끔 친구나 가족들과 나누는 것처럼 여가의 영역에 있지 않다는 걸 목소리로 쉽게 알 수 있었다. 그건 이곳 참가자들과 같은 발달 장애가 있는 동생에게 누나가 지금 너의 곁에 있지 않은 이유를 재차 설명하는 것이거나, 늙은 아버지의 안부를 묻고 그의 병원 문제에 대해 상의하는 것이었다.


그의 동생을 돌보는 건 여태껏 아버지의 몫이었지만 그는 늙고 병들었다. 서른일곱이 된 베라는 행사 기획자로 다니던 직장도 그만두고 아버지와 동생을 돌보는 데 전념하고 있다. 이곳에서 그가 사람들을 대하는 것을 보면 남동생과 함께한 그녀의 오랜 세월이 느껴졌다. 갑자기 일어난 실수에 당황하지 않았고 한 번도 화를 내지 않았다. 발달 장애인 남동생이 있는 소피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의 다정함은 비가 와도 젖지 않는 바다 같았다. 피할 도리 없이 강해진 누나들 앞에서 나는 자신을 어린애 같다고 여겼다. 걱정하고 책임질 것이 나밖에 없으므로.


창 너머로 풀벌레 소리가 들리는 늦은 밤이다. 나는 어둠이 가득한 방에서 잠들지 않은 채 발을 꼼지락거린다. 사실 조금 전 전화를 끊은 베라가 신경쓰인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지만, 이따금 한숨을 쉰다. 슬프고 무거운 분위기가 느껴진다. 그가 저녁 회의에 운 것처럼 붉어진 눈으로 나타났었으므로, 지금 그녀가 홀로 울고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한다. 축축한 공기가 침대를 타고 흘러내려 빗물처럼 창문에 붙었다가 내게 다가와 마음을 톡톡 건드린다.

그의 슬픔 앞에서 그의 가장 밝은 순간을 떠올린다. 그날 오후였다. 베라와 나는 다섯 명의 사람과 함께 호수 수영장에 갔다. 베라는 능숙하게 봉고차를 운전하며 노래를 틀고 사람들의 상태를 살폈다. 차도를 건널 때는 늘 제일 끝에 있는 사람이 인도에 닿을 때까지 차를 막고 서 있었다. 우리는 무거운 짐을 함께 들었고, 호수 앞 돗자리에 무사히 도착했다. 31도의 끈적한 더위에 머리카락이 이마에 붙었다. 하늘은 회색빛 구름으로 가득했지만, 알록달록한 수영복을 입은 사람들이 너른 호수의 안팎에서 밝게 북적거렸다. 매끈하고 밝은 시멘트 타일 대신 짙은 녹색의 숲과 나무들, 풀들이 물의 가장자리를 두르고 있었다. 사람들은 첨벙첨벙 녹색과 푸른빛의 물로 뛰어들었다. 아, 정말이지 환상적인 공간이었다. 그러나 내가 그곳에서 견뎌야 했던 건 강한 씁쓸함이었다. 베라의 양보로 도착하자마자 홀로 세 번 정도 물에 뛰어든 후 돗자리로 돌아왔다. 물 가까이에도 갈 생각이 없는 마리우스와 프랑크를 홀로 두고 혼자 놀러 갈 수는 없으니, 호수는 그림의 떡이 되었다. 그곳에 꼼짝없이 몸이 묶여 더운 땀을 삐질삐질 흘렸다. 신나게 물놀이하는 주변 사람들이 부러워 신경질이 났다. 할 수 있는 건 이곳에 다음에 꼭 놀러 오겠다는 다짐뿐, 일을 하는 중이니 어쩔 수 없다며 마음을 다잡았다.


그렇게 한 시간쯤 지났다. 더위와 무력함에 지친 나는 표정도 말도 없어졌다. 두 명의 참가자와 물에서 돌아온 베라는 이제 갈 시간이라고 말했다. 자리를 지키는 것 외에는 큰 도움이 되지 않는 나 때문에 그녀는 혼자 더 애썼을 것이다. 비키의 샤워를 도운 것도, 참가자들에게 더 많은 말을 하는 것도, 운전하는 것도 그였다. 그런데 그는 나와 달리 큰 언니처럼 모든 일을 척척 하고, 웃음을 잃지 않았다. 억지로 웃는 게 아니라 정말로 밝게, 한치의 구겨짐 없이. 그런 그가 너무 강해 보였다. 한 손으로 커다란 봉고차를 운전하는 베라에게 창밖의 황금빛으로 지는 해와 시원한 바람이 불어들었다. 그녀의 젖은 머리칼이 흔들리며 그녀의 웃음과 함께 반짝반짝 빛났다. 그때 베라가 얼마나 아름답게 보였는지 모른다. 멋진 그녀를 보고 있자니 내 마음도 조금씩 펴져서 곧 창문을 활짝 열고 머리칼을 날리며 웃을 수 있었다.

내 안에는 그녀가 보여준 햇살이 가득한데, 같은 방에 있는 그녀는 홀로 버거운 어둠을 걷는다. 어둠과 적막 위에 그녀의 햇살 한 줌을 띄워보기로 한다. 안아주지 않아도 어떤 말들은 이불이 되어 주니까. 망설이는 마음을 넘어 입을 뗀다.


“베라, 있잖아, 너는 진짜 멋있고 강해. 고마워.”


그 말은 내 목구멍 끝에서 여러번 굴러 떨어졌지만, 떨리는 메시지를 보내고 휴대폰을 던져버리듯 그 말을 던졌다. 잠깐의 어색함이나 부끄러움만 견디면 그에게 조금이나마 힘이 될 거라고 믿었다. 잃을 건 없고 얻을 것만 있다는 지극히 합리적인 계산을 한 후였다. 고요한 밤, 내 음성이 그녀에게 미끄러져 부드럽게 착지한다. 울음과 웃음이 뭍은 목소리로 그녀가 고맙다고 말한다.


사람이 사람에게 줄 수 있는, 순간에서 만들어 낼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은 진심이 담긴 말이다. 진짜의 순간에 침묵은 0이고 ‘너 정말 멋져’ 그 단순한 말은 1이다. 더 화려한 대사는 필요 없다. 가성비가 좋다 못해 마음에 직빵으로 가닿는다.

그때 그 말이 결국 내 목구멍을 넘지 못했더라면, 다음 날 그에게 편지를 썼을 지도 모르겠다. 편지를 건네는 건 아무래도 덜 쑥스럽기 때문이다. 편지에는 ‘너 진짜 멋져’ 라는 말을 건네기 위해 전화와 수영장과 그 밤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적었을 것이다. 편지는 맥락을 설명하지만 말은 그 순간에 존재했다는 것으로 모든 설명과 묘사를 건너뛴다. 목소리의 떨림이 있어서 더 많은 미사여구가 필요하지 않다. 글씨는 남지만 음성은 그 순간 우리가 혼자가 아니게 한다. 쑥스럽고 야단스러워도 애정이 담긴 말이 떠올랐다면 전하자. 살아있는 힘이 바래기 전에. 애정을 앞세우고 부끄러운 마음은 뒤로하는 용기이다.





보든제







매일의 아침 식사


keyword
이전 23화배째라는 마음은 한톨도 없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