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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로아티아에서 제육 볶기

뜨거운 여행은 뜨거운 밥상에서부터(1)

by 오색경단 Mar 25.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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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들아, 밥 먹자!"


이 한마디에 일곱 명이 식탁으로 모여든다. 누군가 밥을 차리고 나를 부르는 게 참 오랜만이었다. 더구나, 달려가 마주한 식탁에는 몇십 인분 되어 보이는 한국음식이 넘쳐흐를 듯 냄비채로 올라와 있다. 투박함이 반갑다. 부모님이 해주신 음식을 먹기만 하던 우리가 크로아티아라는 낯선 땅에서 서로를 먹여 살리고 있었다. 매일 저녁 마트와 정육점을 돌아다니며, 기어이 한식을 만들어냈다. 처음엔 설익고 다 타버린 냄비밥도 3일 차쯤 되더니 제 맛을 찾아가더라.


쿠웨이트에서 함께 유학하던 한국인 언니, 오빠 일곱 명과 떠난 11박 12일 여행. 목적지는 보스니아(정확히는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에서 시작해 크로아티아의 세도시 — 두브로브니크, 스플리트, 자그레브까지였다. 이미 여러 차례 유럽 여행을 다녀온 모두는 그곳의 맛엔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대신, 뜨거운 밥 한 숟갈과 돼지기름 섞인 제육볶음 한 점은 상상만 해도 턱이 시큰해지고 침이 고인다. 이것이 힐링이로구나. 우리는 이번 여행에서 먹고 싶었던 한국 음식을 원 없이 먹기로 했다. 아랍 음식에 불닭소스를 찍어먹는 거 말고, 근본부터 고춧가루와 된장이 기강을 잡고 있는 진-한 한국의 맛을 크로아티아에서 구현해보리.




1. 비빔밥과 계란국


두브로브니크의 날씨는 쨍쨍하다. 우리나라의 여름처럼 습하진 않으나 해가 머리 바로 위에서 뜨거운 열기를 내뿜어 사람 혼을 쏙 빼놓는다. 특히, 성곽투어를 할 때는 더위를 피할 그늘 하나 없어 내 몸이 두브로브니크에 있는지 남한산성에 있는지 헷갈릴 지경이다. 옷을 최대한 벗어봐도 달라지는 건 없다. 의지할 거라곤 손에 들린 미지근한 제로콜라 한 병뿐인데, 이마저도 한 모금씩 사라지고 있다. 나는 딱 이것을 생각하며 버텼다. "바다" 끝없이 펼쳐진 푸른 바다가 보인다. 글을 쓰는 지금도 성곽을 생각하면 온몸에 열이 확 올랐다가, 바다를 떠올리면 이마를 스치는 옅은 바람이 느껴져 열이 가라앉는다. 그렇게 성곽투어가 끝나고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선셋비치의 바닷물에 뛰어들었다. 풍덩!


물밑의 몸은 차갑고 물 위의 얼굴은 뜨겁다. 너무 차갑거나 뜨거워지면 반대로 머리를 물에 담그고 몸은 물 위에 띄운다. 차갑고 뜨겁고, 뜨겁고 차갑고, 차갑고 뜨겁고를 몇 번 반복하다 보니 시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게 흘러버렸다. 극강의 배고픔이 밀려온다. 물이 뚝뚝 떨어지지 않을 정도로만 햇빛에 몸을 말리고 축축한 상태로 숙소에 돌아왔다. 오늘의 요리조 두 명 K와 L은 옷도 갈아입지 못하고, 우리의 주린배를 채워주기 위해 냉장고를 열었다.


먼저, 리조토용 쌀을 물에 불려 냄비밥을 안친다. 우리나라 쌀에 비해 푸석하지만 어느 정도의 찰기는 있어 물을 정량보다 조금 더 넣으면 된다. 쌀이 냄비 안에서 물과 사투를 벌일 동안 각종 야채와 소스를 준비한다. 쿠웨이트 한인마트에서 모셔온 고추장에 간 소고기를 볶아 약고추장을, 당근, 호박을 썰어 익히고 소금 한 꼬집과 함께 무쳐 나물을, 상추를 살짝 곁들여 주고, 취향에 맞춰 완/반숙 계란프라이도 굽는다. 끓는 물에 치킨스톡과 달걀을 풀어 넣어 계란국을 만들고 어린이 입맛의 어른이들을 위해 소시지도 미리 굽는다.


"얘들아, 밥 먹어~"


비빔밥을 각자의 방식대로 비벼 크게 한입 먹는 순간, 모두의 입가의 미소가 번진다. 달큼한 고추장과 밥의 조화가 환상이다. 요리사들은 치킨스톡 맛 때문에 계란국에 후회가 남는다 하지만 우리에겐 최고인걸?


완성된 요리들


맛있게 먹겠습니다!



2. 제육볶음


다섯 시간 버스를 타고 두 번째 도시 스플리트에 도착했다. 휴양지인 두브로브니크에 반해 스플리트는 조금 조용한, 거주지의 느낌이 물씬 나는 동네였다. 예약한 숙소는 테라스가 딸린 빌라의 꼭대기층이다. 문을 열고 들어갔더니 호스트분께서 웰컴 체리와 식빵을 준비해 놓으신 모양이다. 현금만 받는 휴게소 빵집에서 한번 좌절하고 오후 5시까지 쫄쫄 굶은 상태였기에 체리와 빵을 흡입하다시피 해치웠다. 이제야 정신이 조금 든다. 오늘은 나를 포함한 B와 H가 제육볶음을 만들기로 한 날이다. 어느 정도 허기를 채운 상태로 마트를 찾아 나섰다.


구글지도를 보고 찾아간 첫 번째 마트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다. 정말 이곳에 마트가 있었단 말인가, 흔적도 없는걸. 두 번째 마트도 마찬가지. 세 번째 마트를 찾아 30분을 더 걸었다. 그 결과, 잭팟! 대형마트가 모여있는 골목으로 진입할 수 있었다. 크로아티아 마트에서 한식 재료를 찾기란 수월하진 않았지만 어찌어찌 흥겨운 크로아티아 노래를 들으며 쇼핑을 마무리했다.


가장 먼저 해야 할 일, 밥을 안친다. 어느새 L 언니는 쌀의 질감에 따라 뜸 들이는 시간을 조절할 정도로 여유로움을 갖추게 되었다. 목살은 한입 크기로 썰어 고추장과 간장으로 버무린 후 재워두었다. 양배추 한 통과 양파는 먹기 좋은 크기로 자르고, 마늘은 흐르는 물에 씻어 다져준다. 그리고 냄비에 다 넣고 볶는다. 조금 타는 것 같으면 물을 넣어도 좋다. 양을 얼마나 많이 했는지 두 개의 냄비에 가득 담고 남을 정도다.


냄새를 좇아 주방으로 온 하이에나들은 한 입만 달라며 줄을 선지 오래. 그러나 우리는 보스니아에서 몇 번의 시행착오를 겪고 다른 팀이 요리할 땐 주방에 들어오면 된다는 규칙을 정했다. 너도나도 요리 참견을 했기 때문이다. 이후 하이에나들은 어른답게 참을성을 보이며 주방 선 밖에서 참견을 하기 시작했다.


고기에 핏빛이 사라지고 양념이 베어 들고 있다. 아직 맛을 보긴 이르지만 곧 먹을 수 있다는 신호다.


"다들 밥 먹어!" 저녁을 차리고 사람들을 부르는 일이 이렇게 뿌듯할 줄이야. 일곱 명은 각자의 양대로 밥을 푸고 수저를 세팅했다. 드디어 두 냄비의 제육이 식탁에 안착. 우리는 고기, 양배추, 양파, 소스를 지나 바닥까지 긁어먹은 뒤 김과 참기름을 넣고 볶음밥까지 만들어 해치웠다. 아주 만족스러운 식사였다. 어제의 나는 모이를 받아먹는 아기새였으나 오늘은 내가 어미새다.





3. 닭볶음탕과 계란말이


자그레브는 크로아티아의 수도로 여느 유럽 국가의 느낌을 물씬 풍긴다. 헝가리가 떠오른달까. 노란 트램이 골목골목을 지나다니는 것을 보니 포르투갈 같기도 하고. 사람이 붐비는 시장의 활기참은 체코를 닮은 듯하다. 그러나 자그레브에는 그 어떤 국가와도 비교할 수 없는 보물이 있다. 바로, 영화 '아바타'의 배경에 큰 영감이 된 국립공원, 플리트비체다. 우린 플리트비체를 가장 염두에 두고 기대에 부풀어 마지막 도시인 자그레브에 도착했다. 문득, 도시 곳곳에서 노란색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건물, 꽃, 불빛, 우체통과 햇빛, 한번 보이기 시작해서 그런가 자꾸만 억지스럽게 모든 것을 노란색에 끼워 맞추고 있다.


다음날 플리트비체에서 4시간 코스를 무리 없이 소화하려면 오늘은 여유롭게 체력을 비축해야 한다. 미뤄왔던 기념품을 살 생각이다. 기념품샵 물건들은 어딜 가나 비슷하다. 가격이 조금 다르거나, 자세히 보면 디테일이 더 살아있긴 한데 그건 그만큼 비싸다는 사실. 아무튼 몇몇의 여행자는 공감할지도 모르겠다. 다음 도시에 더 예쁜 게 있을 것만 같고, 예쁜걸 훨씬 싸게 팔 것 같다는 근거 없는 바람. 그래서 차일피일 안 사고 미뤄왔지만 마지막 도시도 별반 다르지 않은. 그런 상황 말이다. 우리는 젤라또를 손에 들고 기념품 쇼핑을 했다. 좋은 곳을 발견할 때면 단톡방에 위치를 공유해주기도 했다. 나는 라벤더 오일과 비누를 샀다. 은은한 향기가 여행의 기억을 오래도록 붙잡아줄 것 같은 예감이 든다.


저녁은 감자가 듬뿍 들어간 닭볶음탕과 계란말이다. K와 L은 요리를 시작했다. 닭을 깨끗이 씻어 불순물을 제거하고 끓는 물에 한 번 데친다. 양파와 감자도 큼직하게 썰어 준비한다. 끓는 물에 다진 마늘, 간장, 고추장, 고춧가루를 넣고 데친 닭을 넣은 뒤 중불에서 천천히 끓인다. 양념이 감자와 닭에 서서히 스며든다. 간장이 없는 관계로 소금을 넣어 간을 맞추고 한소끔 더 끓인다. 숙소 곳곳에 얼큰하고 깊은 향이 퍼진다. 닭볶음탕이 더 깊은 맛을 낼 동안, 계란말이를 만든다. 완성된 닭볶음탕과 계란말이를 테이블에 올리고 말했다.


"밥 먹자!"


이보다 든든한 저녁이 없다. 창밖에는 노을이 물들고 있었고, 내 흰 티셔츠는 닭볶음탕으로 물들고 있었다. 이날 밥이 조금 설익었지만, 그게 무슨 상관이랴. 탄수화물은 감자로 채우면 되고 설익은 밥도 배에서 불리면 되지.


완성된 닭볶음탕 한상과 열심히 제조 중인 계란말이!




그때 제육볶음 진-짜 맛있었는데...


나는 음식으로 여행했던 도시를 구분한다. 비빔밥 두브로브니크, 제육볶음 스플리트, 닭볶음탕 자그레브. 마치 전주비빔밥과 춘천닭갈비, 의정부 부대찌개와 대구 막창 같은 역할이랄까? 마트에서 요리 재료를 사고 좁은 숙소에 모여 요리한 음식을 나눠먹었던 크로아티아의 기억이 정말 강렬하다. 여전히 잊으래야 잊을 수 없다. 지친 관광 후에도 요리를 해내야 한다는 책임감이었는지, 내 요리가 맛있을지 걱정되는 부담감이었는지. 무엇이었든, 그 감정마저도 추억으로 남았다.


그리고 우리의 요리열전은 끝나지 않았다. 여행의 끝자락, 밀가루 반죽까지 직접 치대며, 수제비에 도전하는데...


다음 편에서 이야기는 계속된다.




뜨거운 햇빛의 두브로브니크 성곽 투어


선셋 비치


그리고 수영하는 나!


스플리트 거리 / 장 보러 가는 길


자그레브로...!


자그레브에서 피크닉


다음 편은 수제비와 감자전 그리고 삼겹살과 짬뽕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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