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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담 May 21. 2024

자기불구화, 글의 헛구역질.
그래서 지금이다.

'자기불구화'에 대하여

희망고문에서 벗어나고도 싶고 

아직도 전진할 힘이 남아 있으니 갈 데까지 가보자 싶기도 하고

알 수 없는 미래를 걸어가는 마음엔 항상 천사와 악마가 나를 두고 내전을 벌이지만 천사는 너무 조용하고 악마는 여러가지 형상으로 자주 출몰하여 나를 현혹시킨다.


난 5년째 새벽 5시에 책을 읽는다. 늘 4시 조금 넘으면 눈이 떠지는데 요즘 새벽에 일어날 때마다 내 안에서 처음 출동하는 감정은 불안과 긴장이다. 한 때는 경이로움이었고 한 때는 순수함이었고 한 때는 들뜨기직전의 열정들이 나의 하루를 함께 했었는데 그것들이 그 기간 그렇게 날 점령하다 어디론가 사라져버린 것처럼 지금의 불안과 긴장도 얼마 지나지 않아 사라질 것을 안다. 


그래, 알면서도 나는 쓸데없는 질투와 미련스러운 죄의식, 오지않은 것들에 대한 걱정, 더 잘하고 싶다는 욕구와 왜 이것밖에 못하냐는 원망에 사로잡혀 있는 나를 발견하여 불안하고 긴장되어 있다. 이 못난 나를 직면할 때마다 괴롭지만 '못난 나를 지나가야 잘난 내가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니 또 나를 가만두지 못한다. 이 모든 부정은 신이 나의 자격을 묻는 테스트이며 이 과정없이 어찌 원하는 것을 얻겠냐며 '또 다른 나'가 나를 혼내고 있다.


'자기 감정의 노예가 되는 것이 폭군의 종이 되는 것보다 훨씬 불행한 일(주1)'이라고 일레인교수가 말했던가? 이런 말을 한 그 교수는 이성이 감정을 이기도록 어떻게 훈련했을까? 하긴, 방법을 몰라서가 아니지, 감정이 날 덮쳐올 때 그것이 아무리 힘들어도 이성이 이기게끔 싸우게 하는 정신이 없거나 또 싸우는 게 싫으니 그저 힘들다 힘들다 하면서 감정이 이기게 냅두는 것이지. 오히려 편한 쪽을 택하는 것이지.


이중삼중사중으로 겹겹이 두 눈을 치켜들고 날 바라보는 '또 다른 나의 눈들'이 나를 더 초라하게도, 전진하게도 만드니 이 현상을 그저 불안과 긴장이라 이름부르며, 이 감정은 인간이라면 누구나가 저 심연 속에 담고 살아야 하는 응당한 대가라고 자위하고 이를 데려갈 시간에 나는 나를 맡겨 본다. 

그러다 찾았다! 에머슨이 내게 가르쳐주지 않았던가. 교육이 필요한 시점에 대해서.

'질투는 어리석음이고 모방은 멸망이라는 사실을 알기 위해서,

좋을 때나 나쁠 때나 자신의 몫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사실을 알기 위해서, 

그리고 드넓은 우주는 좋은 것들로 가득하지만 자기몫으로 주어진 땅에서 그저 밭을 가는 수고를 하지 않고는 옥수수 낟알 하나도 절대 얻을 수 없다는 확신에 이를 때가 바로 그 때이다(주2).'


바로 그 때란다. 

나에게 지금이다. 

내게 교육이 필요한 시점이다.

나는 다시 책을 잡는다.

어떤 감정으로 내가 이성과 팽팽한 경쟁을 벌일 때마다 나는 나를 교육시켰다. 

책으로써. 


책 속의 성현들을 부여잡고 내가 지지 않게 해달라고, 내가 울지 않게 해달라고, 나약한 내가 안스럽더라도 못난 나를 들쳐업고라도 한걸음 나아가게 해달라고, 지금 내가 모르는 것을 '그 때는 몰랐지만 지금은 안다'라고 말할 수 있는 날이 빨리 오게 해달라고 의지하고 매달린다. 


인생을 논하기에 나는 미약하고 미숙하지만 그 놈의 인생이란 길에는 항상 자기불구화의 함정, 아니, 함정인지 빠졌다 나와야만 하는 과정인지 아니면 아무 것도 아닌데 괜한 심술부리는 투정인지는 모르겠지만 여하튼 그 곳에 빠져 숨이 막힐 지경이 되어서야 겨우 다시 건져지는 그런 구간을 만난다. 

이렇게 부정적이고 진취적이지 못한 '꼬리표'로 자신을 정의하는 현상(주3)인 자기불구가 되어가는 나를 발견할 때 꼬리표를 떼어버리거나 그 다음 전진을 위한 전조라는 이치를 얼른 주입시켜야 한다. 


나는 감정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는 절름거리는 이성을 책으로 서둘러 교정하려는 의지는 있는 듯하다. 다행이다. 의지는 자기불구화에 빠져 있는 이 시기를 도약판으로 삼느냐, 나를 함몰시킬 구덩이로 냅두느냐의 정신, 즉 이성의 기능에 충분한 화력이 된다. 누구나, 어떤 일에서나 이 기간은 분명히 존재한다. 없다고 말할 수 있는 자는 이미 그 기간에 감정을 이기는 정신을 갖춘 것이지 이 기간이 없는 것은 아니다. 


자, 정신이 감정과 싸워 이겨야 할 때, 내가 내 인생의 궤도에서 벗어나면 안되도록 정신을 부여잡아야 할 때가 내게 또 온 것이다. 그래선지 요즘 나는 이상한 짓을 한다. 읽었던 책을 다시 펼쳐 읽고 싶은 데까지만 읽고 덮는다. 쓰고 있는 글도 쓰고 싶은 데까지만 쓰고는 더 이상 진행하지 못하고 있다. 여기 브런치공간의 '작가의 서랍'에도 그런 글들이 수두룩이다. 끝을 맺지 못하는 글들.. 은 머리속의 것을 손가락 끝으로 뽑아내는 능력의 부족이라 위로하지만 이게 어찌 손가락탓이겠는가. 


사고가 여물고 탄탄하지 못하여 논리를 만들지 못하는 것인데. 그러니 이 힘을 기르라고, 그러기 위해서 지금 감정이 정신을 이기게 냅두면 안된다고 감정이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는 것인데 이 얼마나 감사한 자기불구화인가!


결국, 감정이 불구가 되면 이성과 이성의 결합인 글까지 모두 불구가 될 위기에 빠진다. 완성시키지 못한 채 그대로 내버려두는... 지금 쓰는 이 글도 끝을 맺을 수 있을까? 어떻게 써내려가야 결론인 것이지? 머리가 또 혼잡해진다. 이런... 쓰다만 글들이 쌓이면서 혹여 습관이 된 것은 아니겠지? 싶다가도 이내 다시 정신을 집중시켜 이상한 글이 마구 튀어나오는 글의 헛구역질에도 꾸역꾸역 써내려간다


내게는 지금 교육이 필요하다. 내 정신이 불구가 되어가는 것은 불안과 긴장으로 눈을 뜨게 만드는 감정덕에 알게 되었고 감정은 이내 자신의 진가를 발휘하며 정신을 정신차리게 하는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감정이 짙어질수록 정신이 더 요동치니까. 나의 정신이, 이성이 더 깊은 주름을 내려나보다. 그렇게 날 희망고문하는 것에 맛들린 나의 글에 더 단단한 논리가 필요한가보다. 지식창업을 하겠다고 선언한지 며칠도 안되어 겁이 나는 것일 수도 있겠다. 도전은 감정의 진폭이 크고 그 여운도 길게 따라붙으니까.


내가 쓰는 글이 괴로움을 토로하는 것은 나의 토로와는 또 다른 차원이다.

나는 내가 통제할 수 있지만 탄생하고자 하는 글이 나를 헤집고 튀어나오는 것은 내 막을 수가 없다.

모든 것에는 자체로서의 본양(本樣)과 본성(本性), 본의(本意)가 있으니

내가 가리고 막고 숨긴들 소요없다. 

어떻게 해서든 나를 통해 나와야 할 글은 자력(自力)으로 나를 뚫고서라도 나온다.


나는 한랭이처럼 글만 쓰고 노니며 사유하는 삶을 살고 싶다

한랭이가 되는 삶이 상당히 고된 과정을 요구하는구나...

그래도 어찌하겠는가.

이제 알았으니

오늘도 나는 글의 헛구역질을 참아가며, 치워가며 써내려가 보자.


주1,3> 쑤린, 어떻게 살 것인가, 2021, 다연

주2> 랄프왈도에머슨, 세상의 중심에 너 홀로 서라, 2009, 씽크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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