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정신이 가미된 부모정신이어야
손이 할머니손같다.
가늘고 긴 손가락에 반짝광내는 메니큐어가 이뻤던 손은 이제
투박하다. 마디는 굵어졌고 손가락은 퉁퉁 부었다.
돌아가신 할머니께서 손을 농사일에 허락하셨듯이
내 손은 몇년간 노트북에만 허락되었던 결과다.
손가락이 얼얼한 것은 글을 많이 써서가 아니라 손가락이 늘 긴장에 머물렀기 때문일 것이다. 쓴 것이라곤 고작 몇장인데 늘 손가락은 준비자세로 노트북위에 고정되어 있으니 말이다. 게다가 사실 몸이 전체적으로 운동부족이라는 신호를 알아챈 지 꽤 되었기에 오늘은 과감하게 자리를 박차고 저~어기 멀리까지 걷기로 했다.
땅과 길옆의 풀만 쳐다보고 걷다가 나는 내 새끼손가락 길이정도의 반쯤 마른 채 끝을 동그랗게 오므린 죽은 지렁이가 움직이는 것에 놀라서 멈췄다. 호기심이 제대로 발동한 나는 무릎을 접어 쭈그린 채 가만히 들여다 봤다. 내 새끼손톱의 1/5도 안되는 작은 개미 3마리, 정확하게 3마리였다. 그 3마리가 자기 몸집보다 억수로 거대한 지렁이를, 1마리는 앞에서 2마리는 뒤에서 옮기고 있는 것이었다.
놀라웠다. 등에 내리쬐는 볕의 열기가 꽤 따가운 이 시간 쌀가마니 번쩍번쩍 드는 괴력의 사나이들보다 더 사나이다운 괴력으로 녀석들은 쉬지 않고 움직였다. 도로바닥의 작은 틈에 지렁이 몸통이 걸리자 맨 선두의 녀석이 당황했는지 묘수를 생각하기 위함인지 갑자기 빙글빙글 두어바퀴를 돌더니 뒤로 가서, 그러니까 3놈이 한꺼번에, 햇빛이 자신들이 득템한 식량에서 조금이라도 수분을 더 빨아가기 전에 옮기려는 듯 힘차게 밀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또 2마리가 앞으로 이동해 끌기 시작하고.
아.. 이 녀석들의 협업에 나는 놀라서 심장이 두근댔다. 녀석들은 온통 식량을 옮겨야 하는 것에만 몸의 모든 기능을 쏟아붓는 듯 했다. 녀석들의 시야에는 거인인 내가 포착되지 않았나보다. 가던 길로 계속 가는 걸 보니.
빨리 해가 지면 식량의 건조가 조금 덜해지려나 싶지만 근처에 바짝 말라버린 시체들이 있는 것을 보면 이 녀석들에게 이 식량은 전쟁터의 마지막 물자처럼 소중한 쾌거일텐데 항상 노력에는 저항이 따르고 가는 길엔 걸림돌이 있기 마련, 내 엄지손톱만한 나뭇잎부스러기가 전사들 앞을 가로막았다. 역시나 리더격인 맨 앞의 녀석은 또 뭔 생각이라도 하는 양 뺑뺑 두어바퀴를 전속력으로 돌더니 그대로 나뭇잎 밑으로 식량을 끌고 지나가는 것이다.
"어이! 친구! 돌아가기엔 식량의 건조가 너무 빨라서 위태로워. 그대로 돌진하세!"
마치 키루스(주1)가 전투를 지휘하듯 나뭇잎속으로 긴 식량의 머릿부분이 쑥 들어가더니 곧장 터널 빠져나오듯 몸전체가 다시 세상으로 드러났다.
내 손가락 하나 까딱하면 나뭇잎 정도 치워주는 건 일도 아니었건만 그런 자선은 해서는 안된다. 정당하게 취득한 것에 자신의 노력과 인내가 더해져야만 그들은 내일도, 모레도 지금만큼 어쩌면 지금보다 더 크고 먹음직스러운 식량을 끌고 갈 힘을 기를테니까.
그렇게 부지런과 근면 성실의 대명사인 개미를 10여분 쳐다보고는 흐뭇하게 역시역시역시! 감탄하던 내 뇌리에 아! 잠시 지진이 일었다.
지금 나의 감탄은 무지의 하품이 아니던가?
개미처럼 살다가 지금 우리 중년이, 지금 젊은 세대가 어찌 되었는가?
콧잔등에 땀이 마르지 않도록 노력하고 상사한테 잘 하라고 교육받은 한 지성인은 아직도 자기집한채 장만하지 못하고 있고 누구보다 늦게까지 일하고 가장 먼저 출근하는 또 한명의 지식인도 자녀가 직장인이 되는 것을 결코 반대한다는데.
근면성실이라면 개미 저리가라였던 우리가
지금 자신을 뒤돌아보며
두고 온 것에 대하여,
잊고 산 것에 대하여,
외면해서는 안되었는데 무시했던 상식들에 대하여
정신이 번쩍 들도록 된통 후회하고 있지 않은가!
세상이 빨리 변하고 너무 오래 살고 모든 소통이 온라인으로 이뤄진, 말 그대로 플리핑(Flipping)된 시대에 '신인류'라 불리는 우리 자녀세대들. 그들에게 제대로 교육되어질 국가의 철학과 시대적 정신, 역사적 전통, 문화적 유산이 과연 계승되고 있는가. 계승해야 할 무형의 자산은 계승되어 곤란한 유형의 자산에 밀려 도대체 어디서 찾아야할 지 오리무중인 것은 아닌가? 이런 현주소를 제대로 아는 지식인, 지성인들은 과연 어디에서 자신의 지성을 갈고 닦는지 제발 세상에 나와주길 바라지만 그림자조차 볼 수 없지 않은가?
이제 부모 스스로가 자기 자녀에게만이라도 제대로 된 교육을 해줘야 할 때라고 나는 주장한다.
결코 직장인으로서는 자신의 삶의 끝이 보장되지 않는 현실에서 내가 내 자식에게 똑같이 대물림되는 현실을 유산으로 물려줘서는 안되지 않을까?
개미의 근면성실은 기본중의 기본이라 여긴다.
개미에게 없는 시대정신, 무조건 돌격이 아니라
지혜로움으로 대변되는 초월된 지식(메타지식)이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하다.
그러니,
내 아이가 보편에 한술 얹는 타인의 삶을 살게 할 것인지
자신만의 독창성을 보편화로 이끌며 자신의 삶을 살게 할 것인지
부모인 우리는 선택앞에 냉정과 단호함과 용기가 필요하다.
어떻게 내 번호를 알았는지 가끔씩 울려대는 주식, 투자, 코인.. 뭐 이런 '모르는 번호'로부터의 습격에 수신차단, 대화삭제를 누르려다 잠깐 내 시선이 멈췄다.
사형이 무서운지 은퇴가 무서운지는 각자의 역량과 자원의 정도에 달려 있겠지만 나폴레온힐인가.. 지그지글러인가 기억이 가물거리지만 여하튼 인간의 가장 무서운 공포는 죽음이 아니라 가난이라 읽었던 기억이 난다. 가난의 정도도, 개념도 물론 개인에 따라 다르겠지만 내가 규정짓는 가난의 정의는
가난, '번번히 오는 기회를 패스'하는 것이다.
일하면 먹고는 살겠지만 과연 인간이 먹고 살기 위해 사는 것인가?
아니다.
자신의 삶을 더 높은 곳으로 끌어올리고
자신이 원하는 그 자리에 서기 위해,
자신을 위해 마련된 기회와 운을 활용해서 더 궁극의 자신을 증명해내는 것이 삶 아닐까?
과연 우리 부모들이
자녀들을 직장인으로 만들려는 이 고정된 사고는 언제쯤 깨질까?
직장(職場)인 말고 직업(職業)인,
자신의 업을 위해 일을 하는 사람으로 자녀를 키우려는 시도를 해야 하지 않을까?
사형선고, 죽음을 선고받는 것보다 더 무섭다는 은퇴로 인한 빈곤한 상태로 자녀들의 미래를 만들어가는 데 오히려 부모가 일조하고 있다는 생각을 조금이라도 해야 할 때가 아닌가?
단지 '역량'에 의한 것이 아니다.
자신의 업을 생계 이상으로 고양시킨 자의 몫이다.
그렇다면 진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찾아주는 것이 기술이나 지식과 함께 병행되어야 할 우선순위가 아닐까?
은퇴없는 인생이라는 것은 단지 '돈'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노동의 유무를 떠나서 자신의 일상이 경제활동으로 이어지게 해야 한다.
그렇다면 진짜 자기가 좋아서 하는 그 일이 물질(돈을 비롯한 모든)로 환원되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부모정신은 시대를 반영해야 한다.
그렇게 시대가 가미된 부모의 정신으로 부모의 역할이 이뤄질 때
내 아이의 불투명한 미래에 밝은 빛이 비추이고
내 아이는 개미처럼 성실하기만 하다가 자신의 몫은 없이 무언가 뒤돌아보고선 잊고 산 것들이 너무 많아 허무한 인생을 만들지 않을 것이다.
100세 시대, 부모의 시선은 자신의 100세뿐만 아니라 내 자녀의 100세 시대까지 봐야 하니
분명히 지금의 관념이나 관성, 관조보다 훨씬 더 거침없는
사고의 유동성,
관성의 단절에 대한 집요함,
보이지 않는 미래를 가늠할 수 있는 지력있는 관조의 시선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
부모도 공부해야만 한다.
진짜 삶의 공부 말이다.
오래전 한창 강의할 때 보여줬던 영상이 떠올라 여기 남긴다.
https://www.youtube.com/watch?v=u2DYlRdkpxw
주1> 키루스(Cyrus the Younger)는 내게 진정한 리더십을 알려준 최고의 스승이다.
* 참고 : 그렇다면, 개미처럼 살지 말고 어떻게 살아야 한단 말인가? 가 궁금하시면 아래 링크 클릭하시어 '거미처럼'을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https://brunch.co.kr/@fd2810bf17474ff/887
[건율원 ]
삶의 가치실현을 위한 어른의 학교, 앎을 삶으로 연결짓는 학교, 나로써, 나답게, 내가 되는 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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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담북살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