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에 대하여
아마도 내가 새벽독서를 수년간 지속하면서 생긴 가장 커다란 변화라면 터를 옮기는 것에 자유로워졌다는 것이다.
커다란 집, 넓은 거실, 한적하고 깨끗한 동네.. 뭐 이런 식의 관념과 어떤 조건이 구비되어야만 터를 옮기는 것이 내게 허락되었었는데
이제는 작은, 유리로 된, 책으로 쌓인, 아무나 편하게 드나들 수 있는 그런 공간이면 좋겠고 나의 사유가 흐르는 정신과 비슷한 환경, 나의 사유를 도와줄 환경에 날 머무르게 하고 싶다는, 그리고 그것을 위해 굳이 조건이 필요하지 않다는, 내 안의 자유가 생겨버렸다.
과거와 지금 달라진 것이라곤
책을 통해
관념이 사라지고
세속적인 조건에 얽매이지 않고
원하는 방향으로 날 머무르게 할 자유가,
꾹꾹 눌려 구겨진데다 부패직전까지 간
나의 자유가 내 안에서 샘솟는다는 것뿐이다.
여하튼
내외부의 결이 비슷한 공간으로 나를 옮겨놓고 싶다.
그런 간절함이 시작되던 2년전쯤 경기수도권의 정말 많은 집과 땅들을 보러 다녔다. 잘 갖춰진 세련된 전원주택들이 즐비했지만 내가 원하는 공간은 그런 곳이 아니다. 제자리에서 한바퀴 빙 돌더라도 내 시야에 건물이 포착되지 않는, 조금 걸어나가면 맑은 물이 흐르는, 산으로 둘러싸여 아늑한, 밤길도 무섭지 않은, 길가다 누굴 만나더라도 정겨운 인사나눌 수 있는 원주민들이 사는, 너무 한적하지도 않고 서울까지 오가기도 멀지 않은. 인공적으로 만든 터가 아니라 그냥 그렇게 세월 그대로인 모습으로 남아있는.
엄청 자유로운 것 같으면서도 까다로운 내 구미에 딱 맞는 곳을 찾기가 쉽지는 않다마는 나의 상상은 지금껏 끝이 없다. 그 때만 해도 그렇게 움직일 수 있는 조건이 갖춰지길 바랬었고 그렇게 2년이 흘러 난 아직도 나를 그런 곳으로 옮겨주지 못한 것이 한탄스러워 오늘 새벽내내 깊이 생각에 빠지게 되었다.
'내가 왜? 무엇을 얻으려고 미루고 또 미루고 있을까?'
나는 내가 이해되지 않았다.
요란하고 현란한 세상, 답답했지만 남들 다 그렇게 사는데 뭐...하며 여태 이렇게 머뭇거리는 나에게 '왜 여태 이러고 있니?'하며 혼줄을 내고 채근까지 했다. 도시에서 그냥 그렇게 사는 방법밖에 모르고 더 넓고 더 이쁘고 더 깨끗하고 더 이름있는 좋은 동네를 찾아 지금까지 살아왔는데 마음 속에는 항상 한적한 곳으로 가고 싶어 하면서 무엇을 잃을까 두려워 지금껏 움직이지 못하는 것인지...
나의 육체가 머무를 곳.
내가 담겨 있어야 할 세상.
무엇이 묻어도 털어낼 것 없는 그런 공간.
어디에 눈을 둬도 푸른 생명이 내 정신을 활어처럼 파닥거리게 할 그런 보금자리.
그거면 족한데...
무슨 조건이, 제약이, 한계가 나의 자유를 저당잡고 있는지..
내가 원하는 곳은 그리 대단한 곳이 아니었다.
작은 두 발이 닿는 바닥에서 고개들면 넓은 하늘만이 내 시야에 들어온다면,
캄캄한 밤이지만 누가 지나가도 겁나지 않고 멀리서 가슴 두근거리며 인사나눌 수 있다면,
네모진 기계없이도 구불거리지만 길찾고 길잃을 염려없다면,
누구의 것이 아닌 모두의 것이라 내 것인양 마음대로 이름지어줄 수 있다면,
진입금지나 화살표없이 내 걸음 닿는 곳에 자유로이 내 발길 들여놓을 수 있다면,
가끔 처음 듣는 새소리도 들리고 고라니정도는 만날 수 있다면,
사람흔적말고 동물의 변이나 발자국이 내 발 옆에서 발견된다면,
굳이 공연장을 찾지 않아도 조금만 귀기울이면 24시간 자연의 오케스트라 연주가 들린다면,
예의와 공손으로 포장된 억지스러움 말고 괴퍅하고 괴짜스러워도 진심가진 사람이 걷는 길이라면,
옆에 누구보다 더 땀흘리지 않더라도 내 보폭으로 조용히, 천천히 걸어도 조급한 마음들지 않는다면,
나의 외적인 소유가 아니라 나의 표정과 말투, 눈빛에서 나의 속내를 읽어줄 그런 이가 옆집산다면,
내 영혼이 자극주는대로 나와 글 사이 장벽이 사라지고 글이 나이고 내가 글이 되어 글이 길을 내어준다면,
나는 기꺼이
모든 자연이 내게 허락되었더라도
내 감히 함부로 대하지 못하고 순종할 수밖에 없는, 그런 노예가 되고 싶다.
그리하여,
오히려 싱그럽고 푸르른 거대한 자연으로부터 주인대접받는 황홀감도 느껴보고 싶다.
그런 길,
그런 길가의 집에 날 머물게 해야겠다.
그런 터전에서 내 씨앗들을 끄집어내고 싶다.
그러다 보면....
어느 날 어느 순간,
자연이 자라는 속도에 맞춰 나도 자라있음을 느끼겠지.
이것저것 눈요깃거리에 산만한 나의 정신이 알아서 그 대열의 리듬을 따르겠지.
함께였지만 따로였던 시간들을 떠나 따로지만 함께인 조화의 아름다움을 알게 되겠지.
더 나은 시간 만들려 애쓰고 애닯지 않아도 머무는 자체로 충만한 시간들이 이어지겠지.
나의 글도 모든 힘 다 빼내고 자연닮은 거대하고 섬세한 흐름을 따라주겠지.
그리하여,
내가 택한 구불거리는 좁은 길이 나의 인생을 큰 길로 이끌어주길 바란다.
작은 발 아래 세상에 머물던 눈길 거두고
고개들어 커다란 하늘보며, 하늘로 치솟는 나무보며, 그 나무에서 노니는 새들보며,
멀리 갈 인생, 더디고 미련스럽게 내게 희망고문 해대는 글이나 쓰며 그렇게 살고 싶다.
그 길에서라면
애써 찾지 않아도
잃어버린 나의 작은 아이를 다시 만날 수 있지 않을까...
만나고 싶은 위대한 미래의 나를 빚어볼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지금의 나를 더 크게 깊이 사랑할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