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과 작가'에 대하여
벌써 며칠째인지 모르겠다. 조금 강도높은 두려움이 날 휘감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그래선지 내 몸은 늘 초긴장상태로 어깨가 뻣뻣하고 표정은 굳고 미간에 주름이 깊어지고 잠은 계속 자다깨다 한다.
'멘탈'. 정신은 감정에 지배되지 않으려, 풀었던 문제집 계속 풀어대는 사람마냥 해석, 해석, 해석에 집중한다. 그리고 매번 똑같은 해석인데도 노트에 다시 정리하고 그리고 잠깐의 편안함을 느끼다가 또 다시 더 커다란 무기들고 찾아온 두려움에 쉴 틈이 없다.
나는 안다.
두려움은 결코 없앨 수 없는 존재란 사실을
모든 두려움은 이치로서 떨칠 수 있다는 루크레티우스(주)의 가르침을
송곳처럼 날카롭게 가슴에 꽂고 사는 나는
원리와 이치로서 나의 두려움을 해석할 줄도 안다.
나는 많이 똑똑해졌다.
감정에 지배받지 않고 정신이 항상 이기도록 날 끌고 갈 능.력.이 있다.
그런데 이것 또한 안다.
능력을 초토화시키는 녀석도 감정이란 사실을.
인간이 언제 가장 살벌할 정도의 두려움을 느꼈는지를 곰곰히 생각해본 적이 있었다. 최초 인간은 나무 위에 살았고 먹을 것을 구하기 위해 나무 밑으로 터전을 옮기기로 했다. 이 심정은 말 그대로 살벌(殺伐), 죽자고 날 쳐대는 두려움이었을 것이다.
발바닥의 감촉부터 달랐고 나무위보다 시야도 좁아졌고 사방이 뻥 뚫려 어디서 어떤 놈들이 날 죽이려 덤빌지도 모르고 지천에 독이 든 식물들인지라 뭘 먹어야 할 지도 모르겠고. 가장 본능적인 생존의 위협은 사람을 죽일 정도로 두렵게 한다.
나는 요즘 나무 아래로 내려온 최초의 인류가 된 느낌이다. 이렇게 살던 내가 글로 먹고 살겠다고 선언하고 지겹기도 지루하기도 어렵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대한 이끌림에 매일 내 안의 글을, 글 속의 나를 서로 마주치게 한다. 멍하게 마주보다가 날카롭게 서로를 찌르다가 부둥켜안고 울다가. 이 둘의 조우는 항상 예측을 벗어난다.
두 개의 갈림길에서 여기로 가야 할지 저기로 가야 할 지 몰라 엉엉 울기도 하지만 결국 동전던지기밖에 할 수 없는 지경의, 그러니까 내 머리속에는 판단의 기준도 경험도 없는 길이라 그저 운에 맡겨버린 내 인생에 대한 믿음과 체념한 듯한 내 심정의 비움과 갈구에 목까지 차오른 내 심장의 떨림으로 나는 매일을 살지만 솔직히 그렇게 던져진 동전에 뒤통수를 맞기도 또 맞을까 두렵기도 하다.
그래서 내 글은 모두가 나에게 주입시키는,
현실의 나를 그대로 드러내는,
내면의 내가 간절히 바라는 내용투성이다.
글이 이런 방향으로만 가도 될까.
남들처럼 일상을 재미나게 쓸 수는 없을까,
뾰족한 이슈도 없는 내 글로 나는 남은 반평생을 살아낼 수 있을까.
아니, 또 그렇게 계속 써나갈 수는 있을까.
혹여 쓰다쓰다 글조차도 두려운 순간이 오면 다시 과거로 돌아갈수는 있을까.
이도저도 아닌 바다 한가운데에 나 혼자 표류되면 어쩌나.
저 멀리 항구가 아직 시야에 잡히지만
수영도 못하는 나는 되돌아가지 않겠다고 타고온 배조차 다 버렸는데 이를 어쩌나.
그러다가도 지금 집필중인 '엄마의 유산'과 '이기론'을 부여잡고 읽고 고치고 읽고 고치고, 조사하나, 단어하나, 어미처리 하나 바꾸고 또 바꾸고 그러다가 다시 원래로 되돌리고 끝도 없이 이어지는 작업에 나는 내게 치를 떨기도 하다가 나를 쓰담해주기도 하다가 이 두권을 시작으로 '작가'로서의 인생을 시작하는 것이라고 나의 정신에 강력하게 정리를 하며 머리를 털어내기 일쑤다.
내게 작가라는 칭호는
글쓰는 이가 아니다.
만드는 이다.
내 인생을 창조하여 만드는 이.
문학, 소설, 그림, 시나리오, 예술작품 등 뭐든 만드는 작가들처럼
내게 작가라는 칭호는
내 인생을 창작하는, 창조하는 사람이라는 의미다.
모두에게 스며들어 있지만 독특성과 희소성, 그러면서도 모두의 내면에서 공감을 끌어내는 그런 인생을 만드는 이.....
나는 글이라는 도구를 통해 나의 인생을 건설중이다.
그래서 나무아래로 내려온 최초의 인간마냥 앞으로 예고없이 등장할 삶의 미지수 앞에서 나는 두렵다.
이 당연하고 응당하게 치러내야 할 살벌한 두려움은
분명히 있는 힘껏 나를 가격할 것이다.
그래도 내가 쓰러지지 않는다면, 두려움에 굴복하지 않는다면
그 때 두려움은 백기를 들 것이다.
그리고 새 옷으로 단장한 후
나밖에 모르는 친우가 되든,
내 명이면 무조건 받드는 충복이 되든,
오로지 날 위해 희생까지 불사를 노예로 내 옆을 지킬 것이다.
적군이었지만 내게 감동, 감흥하면 더 충직한 충복이 되는.
이 당연한 이치를 알면서도 이 녀석의 가격이 시작된 지금의 나는 무섭고 아프다.
멘탈, 정신을 위해 오늘도 또 성현들의 가르침을 수없이 내 가슴에 꽂는다.
정신의 두려움은 이치로서 떨쳐낼 수 있으니(주1),
현실의 공포는 날 도우러 온 것이니(주2).
본질대로, 본성대로, 포장치장분장없이 본유된 것만 쥐고 가기에 두려운 것이다.
포장치장분장으로 난장인 세상에서 아무 무기없이 맨몸으로, 오로지 내면에 담긴 경험과 머리에 담긴 진실만으로 길을 걸으니 두려운 것이다. 손에 있는 것들 죄다 뒤로 하고 걸으니 공포스러운 것이다. 너무 많이 가졌었고 너무 때도 많이 묻었기에 맑아지는 지금이 오히려 두렵고 공포스러운 것이다.
보이지도 않는 길에 내 뜻이 길을 내주길 바라며 마치 도망간 노예가 북극성만을 보고 달리듯 나 역시 별과 같은 꿈만 보고 달려야 한다. 아카바의 별을 친구로 둔 꼬마(주3)처럼, 매일 활을 쏜 궁수(주4)처럼 그렇게 말없이 한 길만을...
그러면 제 때 도착하지 못할지는 모르지만 항로를 벗어나지는 않을 것이다.
엉뚱한 곳에서 오물을 뒤집어쓴 채 나를 초라하게 만들지는 않을 것이다.
거추장스러운 분장에 적당히 맞춰진 군중들의 표정을 내 얼굴에 입히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두렵고 무섭다.
그러니 가고 있는 것이다.
이쪽에 등을 보이고 손에 쥔 모든 것 내려놓고 내가 가고 있음을 나는 안다.
나는 내가 추구하는 가치를 향해 지금 절름거리고 뒤뚱대고 머뭇거리며 아주 작은 보폭으로 어디론가 향하고 있다. 작은 도약이, 나의 비약을 일궈 그렇게 나의 보행이 되는 길로 나는 가고 있다.
-로버트 프로스트-
노란 숲 속에 길이 두 갈래로 났었습니다.
나는 두 길을 다 가지 못하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면서,
오랫동안 서서 한 길이 굽어 꺾여 내려간 데까지,
바라다볼 수 있는 데까지 멀리 바라다 보았습니다.
그리고, 똑같이 아름다운 다른 길을 택했습니다.
그 길에는 풀이 더 있고 사람이 걸은 자취가 적어,
아마 더 걸어야 될 길이라고 나는 생각했었던 게지요.
그 길을 걸으므로, 그 길도 거의 같아질 것이지만.
그 날 아침 두 길에는
낙엽을 밟은 자취는 없었습니다.
아, 나는 다음 날을 위하여 한 길은 남겨 두었습니다.
길은 길에 연하여 끝없으므로
내가 다시 돌아올 것을 의심하면서….
훗날에 훗날에 나는 어디선가
한숨을 쉬며 이야기할 것입니다.
숲 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다고,
나는 사람이 적게 간 길을 택하였다고,
그리고 그것 때문에 모든 것이 달라졌다고.
주1> 루크레티우스,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 아카넷
주2> 키에르케고르, 키에르케고르선집, 집문당
주3> 오그만디노, 아카다의 별, 학일출판사
주4> 파올로코엘뇨, 아처, 문학동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