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ncore '엄마의 유산' - 1번째 편지
* 1번째 편지는 다소 길어 1,2편으로 나눠 발행됩니다. (2편은 일요일 5:00A.M.)
이런 말 들어봤을 거야. '마음이 지옥이면 사는 게 지옥'이란 말. 사람은 어떻게 생각하고 어떤 마음으로 사는지에 따라 삶을 천국으로도, 지옥으로도 만들 수 있어. 많은 사람들이 '감정'을 주체하지 못해, 감정에 지배당한 채 힘들게 사는 것 같아. 우울하고 공허하고 불안하고 두렵고 슬프고... 제 아무리 훌륭한 명함, 외모, 재산을 가져도 자기 자신을 제대로 운용하지 못한다면 사는 것이 지옥같을 수 있단다. 엄마는 네가 정말 행복한 삶을 살길 바래. 그러기 위해서 우선적으로 알아야 할 것이 있다면 '인간', 그러니까 '너라는 사람'이 어떻게 정신과 감정, 감각, 영혼이 연결, 연동, 연계되어 있는지를 이해하는 것이라 여겨.
그래서 엄마의 첫번째 편지는 네가 너를 이해하길 바라는 글이야.
'호랑이굴에 들어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는 말 알지? 이미 우리는 알아야 할 기본은 알고 있어. 신체의 힘보다 정신의 힘이 더 강하고 중요하다는 사실말야. 신체가 어떤 질병에 시달리면 사람들은 어떻게든 살기 위해 애를 쓰지. 그런데 정신이 아프면 죽으려고 애를 써. 물론, 신체보다 정신이 중요하다고 단정지을 수는 없지만 다양한 삶을 통해 전해들은 간접경험들은 이를 증명해주지.
가령, 오늘내일하며 시한부를 살던 아버지가 '우리 딸 결혼하는 것만 꼭 보고 죽어야지'하면 그것이 현실로 이뤄지잖아. 앞으로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신체로도 10년 이상을 거뜬하게 버티는 경우도 많고 특히 천재지변에 의한 재난과 같은 실제 사례에서도 우리는 인간의 물리적 한계를 넘어선 경우를 종종 접했지. 이렇게 정신은 신체를 이겨내는 존재야.
그리고 또 하나 인정할 수밖에 없는 분명한 사실이 있어. 우리가 너무 쉽게 뱉는 말 중에 '정신을 못차리겠네.', '정신차려!'라는 말이 있는 걸 보면 정신은 진리를 찾아 머무르기보다 이리저리 방황하길 좋아하는 본성이 있다는 것이야. 너는 살아있는 한 잠을 자든 깨어 있든 어떤 공간에 머물게 돼. 집에서 지하철로, 또 학교나 직장, 여행지로. 우리는 자기에게 필요한 어떤 공간을 늘 찾아다니지. 작은 방안에서도 침대에 들어갔다가 책상앞에 앉았다가 때론 방바닥에 몸을 뉘여주기도 하는 등 항상 어떤 공간에 의지해. 이렇게 정신은 신체를 여기저기로 이동시키는 주인이란다.
이렇게 네 신체의 주체, 정신이 방황을 시작하면 네 신체는 바빠져. 자꾸만 여기저기로 널 이동시키거든. 미술관에도, 연주회장도, 군중속으로도, 자연을 찾아나서기도 하는거야. 이로써 너는 충분히 네 정신의 상태를 신체가 가는 길을 통해 가늠할 수 있고 네 신체는 정신의 명령에 무조건적으로 따른다는 것도 이해할 수 있을거야.
그렇다면,
네 핸드폰에 저장된 사진들을 보렴. 푸른 초원에서 활짝 웃는 모습. 그 때 네 정신은 왜 널 그리로 이동시켰지? 그리고 무엇이 널 활짝 웃게 했지? 네 눈에 비친 감각이라고 할 수 있겠지? 어떤 연유로 정신이 그 곳에 널 데려다 놓았든 너는 초원을 보며, 초원의 향기를 맡으며 초원이 뿜어내는 모든 기운에 너의 감각을 의지한 채 네 정신은 환기되었을거야. 그 공간으로 인해 너는 활짝 웃는 것이니 정신이 널 이동시키는 이유는 결국 환기를 원했기 때문이지. 환기란 외부의 것을 진입시킴으로써 내부의 일부를 빼내고 새롭게 섞는 현상이지? 이렇게 정신이 환기를 원할 때 우리는 공간을 이동시키려 한단다.
자, 이쯤에서 너는 분명하게 이해했을거야. 네가 주말마다, 또는 더 자주 여기저기로 바람쐬러 가고 싶다는 것은 네 정신이 더 잦은 환기를 원한다는 신호이고 그것은 정신에서 빼내야 하거나 투입시켜야 할 것이 많다는 의미란다. 한마디로 네 정신이 방황하고 있다는 신호지. 그러한데도 정신에 관심을 두지 않고 신체만 여기저기 이동시키며 감정의 유희에 빠져 지낸다면 계속 정신은 신체를 더 바쁘게 이동시키며 감정에 좌지우지될거야.
반면, 굳이 신체에게 여기저기 다니라 명령하지 않는 정신을 소유한 사람을 네 주변에서 찾아봐. 분명 있어. 그들은 성향상 다니기를 싫어하는 경우일수도 있지만 굳이 환기시킬 것이 없거나 실컷 환기가 되어 자신의 정신만으로도 충분히 충만함을 느끼거나 공간의 지배없이 자체적으로 환기를 시킬 수 있는, 자기정화가 가능한 이들이야. 이런 정신은 스스로 정리하고 통제할 수 있는, 질서잡힌 정신이라고 할 수 있지. 정신이 방황하지 않고 자기자리를 제대로 지키고 있으니 굳이 여기저기 신체를 옮겨가며 이런저런 감각들을 요구하지 않아도 되지. 강한 정신인지는 두고 볼 일이지만 어떤 식으로든 질서잡힌 정신인 것만은 분명하지.
정신의 질서와 체계에 따라 네 삶의 질서와 체계가 만들어지고 그렇게 보내는 일상이 네 인생이 되는 것이야. 그래서 조금 더 정신에 대한 디테일한 얘기를 나누면 좋겠어.
자주 경험하겠지만 복잡한 지하철안에서 너는 무언가에 골똘히 빠져 있었던 경험이 있을거야. 또 조용한 방안에 잘 정돈된 책상앞에서 책을 펼쳤지만 책과 네 눈사이 그 짧은 거리에서조차도 네 정신은 제대로 책에 닿지 못하고 어디로 도망쳐버린, 분명 책을 볼 수밖에 없는 환경인데도 책을 읽어내지 못한 경험도 있을거야. 이 단순한 경험만으로도 정신은 외부적 공간과 너를 단절시킬 충분한 힘을 지니고 있고, 또한 외부 공간과는 무관하게 너를 외면할 힘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지.
정신은 이렇게
외부적으로 네게 주어진 공간과 너의 감각을 외면하거나 버려두고
자기가 갈 곳을 가버리는,
신체적 감각과 환경 모두를 맘대로 이탈하는 자유로운 습성을 지닌 존재야.
결국, 집중하지 못하는 것은 자유롭게 방황하는 정신의 본성에게 네가 지는 것이야. 하지만, 복잡한 지하철에서도 정신을 한 곳에 빠뜨릴 수 있는 것처럼(그 빠진 곳이 어디든간에) 어떤 환경에서도 이탈한 정신을 다시 네게로 데려올 수 있어. 다시 말해, 무언가에 집중한다는 것은 네 정신의 자유를 구속한다는 말이 되겠지? 그렇다면, 무엇이 네 정신의 자유를 구속하기도 해방시키기도 하는 것이지? 이를 아는 것은 아주 중요해. 왜냐면, 네 정신이 네 행동에 명령하고 네 행동에 따라 네 인생이 만들어지니까.
자, 이미 눈치챘겠지만, 정신을 제자리로 앉혀주는 그것이 정신의 움직임을 통제할 수 있는 주체야.
바로 인간이라면 누구에게나 존재하는 의식(consciousness)이지.
'정신차려!'라는 말, '정신을 차리게 명령하는' 그것이 있으니까 그런 말을 하는 것 아니겠니? 그 주체가 '의식'이야. 이탈한 정신을 다시 제자리로 데려오라고 지시하는 게 의식이지. 의식이 그걸 알아채는거야. '아. 정신이 또 엉뚱한 곳으로 갔군. 정신 데려와야겠다.'라고 의식하는 순간 너는 너에게 말할거야. '정신 차려야겠다'라고. 그런데 여기서 의식하지 않는 의식, 즉 '무의식'은 그냥 네가 평소에 하는대로 널 내버려 둬. 게임에 빠져 시간가는 줄 모르는 경우가 그런 경우야. 그냥 늘 하던대로 '의식하지 않고' 그냥 하는 거, '무의식적으로 그랬어'라는 말처럼. 하지만 의식은 늘 무의식과 싸우라고 정신에게 지시하지. '게임 그만해!'하면서.
의식이 이겨야겠니? 무의식이 이겨야겠니?
의식과 무의식의 밀당,
여기서 항상 의식이 이기는 자가 되어야 해.
단단하게 늘 깨어있는 정신을 소유하려면 말야.
엄마는 너의 삶을 위해 너의 몸이 어떻게 연계되어 연쇄적으로 연동되는지에 대해 아주 중요하게 말해주고 싶어. 그래서, 지금 네게 쓰고 있는 이 글에 조금도 소홀히 하고 싶은 마음이 없어. 짧게, 간단하게, 대충 말하고 싶지 않아. 그러니 너도 네 정신을 잘 부여잡고 잘 따라와주길 바래.
학교에서 가르쳐주지 않는 '나'와 '삶'. 네가 너를 모르고 너의 삶을 어찌 이끌지 고뇌하지 않는다면 지금까지 그 긴 시간 학교에서 배운 공부는 그저 좀 괜찮은 도구일 뿐이야. 도구를 손에 쥐었는데 잘못 사용한다면 네 삶에게 좀 미안하지 않겠니? 또한, 네가 열심히 얻은 그 도구를 남의 삶을 위해서만 활용하는 것도 네 삶에게 너무 미안하지 않겠니? 세상은 네게 '삶'을 허락하면서 네 삶을 통해 자신의 뜻을 펼치려 해. 그러니 너의 '앎'이 '삶'으로 제대로 연결되어 너의 모든 잠재된 능력을 끄집어내야 한단다. 이는 우선적으로 너 자신을 위함이고 나아가 네가 이 세상에 머물며 영향을 미칠 다양한 범주에서 네가 귀하게 남겨야 할 선(善)을 향한 행적들이 필요하기 때문이지.
그런데 이상한 게 있다! 의식이 '게임 그만해!'하며 명령하게 하는 그 주체도 있지 않을까? 그게 무엇인지 '모른다'고 해서 '없다'고 결론짓기엔 뭔가 찜찜하지? 마치 잃어버린 물건을 대충 찾다가 '없어'하고 뒤돌아서는 느낌? 없다고 판단함으로써 네 감정이 편해지길 바라는 치사한 변명? 우리는 그 반대편, 무언가를 찾아내는 쾌락쪽으로 좀 더 가보자.
자, 의식이 알아채게끔 지시하는 그 무언가는 바로 잠재의식이야. 쉽게 말해서, 잠자고 있는 의식이지. 잠재의식은 늘 자고 있어서 겉으로 드러나지도 않고 그래선지 네가 알 수 없어. 좀 전 언급했던 '의식'은 너의 행동으로 표현이 돼. '아, 정신차려야지!'와 같이 네가 네게 지시할 수 있는 것과 같이 의식은 네게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지만 잠재의식은 계속 잠만 자. 하지만, 자면서도 깨어있는 요상하고 신비로운 잠재의식은 너의 의식이 일을 하지 않거나 나약해질 때 느닷없이 의식에게 출동을 명령해. 이런 잠재의식이 가진 힘이 '잠재력'이야. 잠재력을 키우려면 잠재의식에 대해서도 조금 알 필요가 있겠지?
잠재의식은 한마디로 바보야.
무조건 네가 시키는대로 한다는 말이지. 네가 '계속 게임해도 돼', '나는 게임밖에 못해'라고 스스로에게 한 명령을 결코 허투루 듣거나 판단하거나 축소시키거나 반박하지 않고 '아! 나의 주인은 계속 게임해도 되는, 게임밖에 모르는구나'라고 받아들여서 그 힘을 비축하고 있다가 네 의식에게 명령하는거야. 반면, '나는 내가 통제할 수 있는 사람이야. 게임을 멈추고 책을 볼 수 있는 정신의 소유자야'라고 네가 시키면 '아! 우리 주인은 스스로 통제할 수 있는 사람이구나'라는 명을 받고 그 방향으로 자신의 힘을 사용하지.
그래서, 우리는 분명하게 알 수 있어. 정신을 움직이는 뿌리가 잠재의식이고 잠재의식을 키우는, 즉, 먹이를 주는 존재가 의식이며 의식을 늘 깨어있게 하는 주체가 바로 실천과 행동이란 것을. 한마디로, 정신의 힘은 잠재의식에서 비롯돼. 바른 정신이든 그릇된 정신이든 이는 또 다른 논제니까 다음으로 미루고 지금까지 말했던 논리에 따라 정신의 힘이 곧 잠재의식, 잠재력이라는 결론을 얻을 수 있겠지?
다시 정신에 대한 대화로 돌아가보자.
정신에 아무것도 없는 사람은 없어.
정신이 텅 빈 사람은 없다구.
자연은 모든 곳에 '공간'이라는 것을 마련해 무언가로 채워넣기 때문이야.
채워질 수 없다면 우리는 공간이라 부르지 않아.
우주라는 공간안에 세계라는 거대한 공간이, 또 그 안에 다시 작은 공간들이 구성되어 있고 모든 것에는 그에 합당한 무언가가 채워져 있지. 그 채워진 것들의 종류나 범위에 따라 다양한 이름을 갖게 되는 것이고. 네 정신도 무언가로 채워져 있어. 그러니까 '생각'이라는 것을 하지. '정신없어'라는 것은 '채워져야 할 것이 아닌 다른 것으로 채워진' 또는 '채워진 것들이 제자리에 있지 않은' 것을 말하지 정신 속이 비어있다는 의미는 아니야.
그럼
==> 이어지는 글, [앎을 삶으로 연결시키기 위해 너부터 이해해보자 2]는
다가오는 일요일 5:00A.M.에 발행됩니다.
* 위의 내용을 요약한 영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