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브런치북은 2024.9.20일, 무엇엔가 이끌리듯 후다닥 시골로 이사한 나, 낡은 집과 낡은 내가 변해가는 과정을 리얼하게 담고 있습니다.
사진으로 여러번 공개했듯이 이 집을 처음 봤을 때는 그야말로 밀림이었다. 마당 전체를 주목, 측백나무가 빽빽하게 둘러싸고 있어 집으로 들어오는 햇살이라곤 찾아볼 수 없고 그러다 보니 집이 차고 눅눅하고 축축하고... 게다가 을씨년스럽기까지.
그런데 왜 이 집을 보자마자 구입했는지 사람들은 묻고 나는 간단하게 답한다.
바꿀 수 있는 건 내가 바꾸며 살면 되지만
내가 바꿀 수 없는 조건이 충족되어 있었다고.
양옆으로는 집이 들어설 수 없고
집옆으로 작지만 개울이 흐르고
중정을 사이에 두고 연구실과 거주지가 분리되어 있고
목조가 아닌 콩크리트 건물이며
원주민과 이주민이 어우러져 살고
도로에서 그리 멀지 않으면서 온전한 숲속에 자리하고
높은 지대에 앞옆으로 건물이 보이지 않아 시야가 트였고
전원주택단지처럼 다 똑같은 집들이 모인 곳도 아니고.
통창에 높은 층고로 지어졌고.
여하튼, 이 밀림의 주인공 주목, 측백나무는 이사 후 집안정리가 끝난 후 가장 먼저 베어내야할 숙제였고 '이 재미있는 놀이를 왜 돈주고 남시켜?' 한마디에 100%공감. 그 날의 결심이 이리 오래 힘들줄 몰랐지만 톱이라곤 손에 쥐어보지도 못한 나는 직접 톱을 쥐고 나무를 베기 시작했다. 마당의 좌우와 정면의 주목나무까지. 단 밑둥까지 자르는 것이 아니라 1m정도의 키를 남기기로 했다.
주목나무는 무려 키 20m, 지름도 1m나 굵어지는 아주 멋드러진 나무다. 하지만 이렇게 거대한 몸집으로는 나와 함께 살지 못한다. 나랑 나눠가져야 할 햇살을 녀석이 다 독차지하게 놔둘 순 없는 노릇, 여기서 나랑 살려면 작은 키에 스스로 아랫도리를 챙겨입게끔 키워줘야 했다.
해를 받느라 서로서로 부대끼며 위로만 자라는 바람에 아랫도리는 홀라당 벗고 머리꼭대기까지 쭈뼛쭈뼛 멋없이 서로 햇살을 받으려 경쟁하는 녀석들을 적당한 키로 잘라주면 나무의 밑둥까지 해를 받을 수 있고 뿌리의 영양분이 위로 뻗치는 것이 아니라 아래를 굵고 풍성하게 자라는 데 쓰이게 되어 원하는 자태가 나올 것이다. 이 것이 나무와 내가 공존할 수 있는 최선의 내 선택이었다.
하지만, 아랫도리를 스스로 갖춰입을 때까지 최소 2~3년은 지나야겠지만 뭐...
자연은...
결코 시간을 어기는 법이 없으니 내가 재촉할 수 없다.
그저 자연의 시간과 속도에 내가 적응하는 것뿐.
그렇게 자연의 결정에 따르는 것뿐.
그 기간 내가 참아내야 할 것은 울타리없는 집으로 2~3년은 버텨야 한다는 것이다.
이 시골에... 뭐, 울타리가 꼭 있어야 할까? 우리집이 끝집이니 사실 누가 지나다니지도 않는다. 그래서 따로 소철이나 철쭉같은 울타리나무를 심지 않기로 했고 또한 주목들의 뿌리가 벌써 땅속 깊숙이까지 내려가 있는데 그 곳에 당장의 울타리를 만들려고 다른 나무를 심으면 마치 원주민과 이주민이 갈등으로 얼굴붉히며 사는 여타의 마을과 다름없이 이들도 서로를 힘들게 할 지 모른다.
나의 판단이 아니라 땅의, 나무의 판단을 믿는 것이 더 현명할 것이다. 이 곳에서 이리도 키높이 자란 녀석들의 힘과 에너지라면 작은 키에 걸맞는 분명 풍성한 가지와 열매를 맺을 것이다. 나무를 베어낸지 이제 겨우 1달남짓 지났을 뿐인데 반갑게도 녀석들은 벌써 밑둥부터 싹을 내고 있다. 그렇게 땅의 기운과 태양의 온기를 맘껏 서로 나누며 그 귀한 자태로 나를, 나의 집을, 건율원을 품어줄 것을 믿는다. 나무들의 비탈에 뿌린 핑크뮬리를 팔랑대는 치마삼아, 맥문동을 꽃신삼아 잘 자라주길...
벽... 울타리...
한번도 이렇게 확 트인 곳에서 살아보지 않았다. 살면서 지금까지 반드시 있어야만 하는 것이 벽이고 울타리였는데 여기서는 내 관념의 벽도 무너진 것이다. 벽이 꼭 있어야 하나. 담이 꼭 필요하나. 울타리가 꼭 쳐져야 하나. 누가 날 염탐이라도 할 수작이라면 담을 넘어서라도 들어오겠지만 염탐할 게 뭐가 있나, 또 그런들 어떠리 싶기도 하고...
밀림으로 가려진 벽을 허문 나는 이렇게 휑~하게 드러난 집에서, 그것도 통창이라 안이 훤히 보이는 집에서 낯설게 시골생활을 시작했지만 이미 적응되었다. 책상에 앉아서도 집으로 방문하는 걸음의 표정이 보이고 그들이 내게 도착하기 전에 먼저 뛰어나가 그들을 맞이할 수 있고 어떤 집 굴뚝에서 연기가 나는지, 아랫집 고양이 고등어가 우리마당으로 어슬렁거리며 올라오는 것까지 다 볼 수 있다.
무엇보다 거의 하루종일을 책상에서 보내는 날 위해 5시가 넘어가면서부터는 지상최대의 공연장에 오로지 나만 초대해서, 그것도 VIP로, 나만을 위한 하늘과 태양의 쇼가 펼쳐진다.
음... 뭐랄까...
오늘 하루 소일을 다하고 헤어짐을 서로가 아쉬워하듯,
내일 또 어김없이 새벽에 만나자 약조하듯,
그렇게 서로가 연합되어 있음을 증명하는 증표같은...
너의 하루를 내가 잘 기록해둘테니 애썼다... 이제 쉬어라... 고 말하는 듯한...
보이는 벽을 허물었지만 통창으로 나는 보호되고 있다.
내 관념의 벽은 신랄하게 깨뜨리지만 나의 이상과 사상은 깊이 보존, 보관, 보호되고 있다.
지금 우리 사회도 큰 난제앞에 모두가 황망해하고는 있지만 모든 이에게 골고루 햇살을 비춰주지 못하는 위험천만한 커다란 벽이 무너지려는지 국가자체가 지닌 정체성과 생명력, 대한민국이 지닌 민족성은 철저하게 보호되고 더 강인한 생명력으로 드러나고 있음을 믿으려 한다.
벽없는 너른 마당을 향해 통창으로 훤히 세상과 소통하며 나는 이 고립속에서 나만의 세계를 발견하고 나만의 사상을 더 깊이 연구하고 짙게 채색하고 은밀하면서도 고...요하게... 쌓아가고 있다.
물론, 인간으로서의 한계에 수시로 봉착하지만 이 욕망이라는 것 역시 내 삶의 밀도를 더 촘촘히 쌓아 내 삶이 세상을 향해 잘 버무려지길 바라는 것외에 특별한 목적이란 게 없기에, 내가 쌓아놓은 이상의 한계 안에서 어느 정도까지만 오르면 나 스스로 만족할 수 있으리라.
혹여, 어느 순간, '인간이 자신이 갇혀 있는 감방의 벽에다가 여러 풍경과 형상들을 화려하고 밝은 색으로 그려놓고 기뻐하고 있는 식의 허울좋은 체념에 불과(주1)'하다는 것을 느낄지라도...
벽없는 집, 지금부터 보내야할 추운 겨울, 겨울잠을 자는 나만의 기간은 내 안을 단단히 보호할 수 있는 보이지 않는 성을 하나씩 쌓아올리는 과정으로 보내려 한다.
외부와의 벽은 허물고
내면에는 그 누구도 감히 넘볼 수 없는 나의 사상의 단단함을 구축해가는...
이것이 나의 욕망에서 비롯된 것일지라도 나는 한결같이 꿈을 꾸며 그 어떤 간절함이라도 감히 훔쳐갈 수 없는 나만의 상념담은 고양된 정신을 차곡차곡... 단단하게 쌓고자 한다. 어떤 타격에도 쉽게 무너지지 않는 정신. 나의 세계. 지금... 어떤 어렴풋한 무언가가 나의 세계로 들어와 오래전부터 찾아다녔던 자기자리인 것마냥 편안하게 감도는 것을 느낀다.
이렇게 나는... 벽없는 집에서 서서히 내면의 단단한 성을 쌓아가고 있다.
이렇게 우리 모두도... 이 시국에서 서서히 자신이 태어난 국가에 대한 진정한 사랑을 쌓아가고 있으며
이렇게 위기의 대한민국도... 그 어떤 힘에도 균열되지 않는 단단한 성을 구축하는 중이리라 믿어본다...
주> 괴테,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민음사
2년전 처음 연재를 시작한 [엄마의 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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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유산은 계승이 목적입니다. 저와 함께 '엄마의 유산2'를 이어가실 엄마작가(초보자라도 상관없습니다.)들, '아빠의 유산'을 써주실 아빠작가님들을 기다립니다.[작가에게 제안하기]로 메일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