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에서 저기, 저기에서 여기.
'나'는 '나'로부터 분리되어
'나'를 '나'에게 매개한다.
나는 내가 나를 재우고
내가 나를 깨우는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나의 영혼은
여기의 나를 재우면서
저기의 나를 깨우고
여기의 나를 깨울 때에
저기의 나를 재운다.
나는 동시에
잠이 들며 깨어나고
깨어나며 잠이 든다.
두 공간으로 분리된 나를
영혼이 연결하여 매듭지으면
저기로부터 보내온 신호에
여기의 나는 무의식으로 반응한다.
어떤 꿈은 진땀흘리며 털어내고
어떤 꿈은 아이처럼 부여잡고
어떤 때에는 꿈이 오지 않아 기다린다.
요즘 영혼이 내게 하는 짓은
여기서도 이 생각,
저기서도 이 생각,
여기서 날 깨우며 하는 짓을 저기서는 잠재우며 하게 하고
여기서 날 재우며 하는 짓을 저기서는 날깨우며 하게 하며
여긴지 저긴지 분간할 수 없게
구분된 나를 하나로 매듭짓는다.
영혼의 호들갑에 육신은 과열되었다.
여기서도 자다깨다
저기서도 자다깨다
열도 나고 속도 타고 입도 헐고...
자다깨다
자나깨나
여기서도
저기서도
같은 생각, 같은 짓하는,
오묘한 신비로움에
깨서도 놀랍고
자다가도 놀라 깨는,
자다깨다의 연속은
시간과 무관하고
정신과 신체도 무시한다.
해넘어간 밤시간에도 자다깨다,
달넘어간 해시간에도 자다깨다,
늘 깨어있지도 잠들지도 않은...
힙나고기아(hypnagogia)...
벌써 몇주째다.
영혼이 '연결한다!'며 여기를 저기와, 저기를 여기와 매듭짓는 것은
자신의 존재를 알리기 위한 것일까?
나를 드러내라 재촉하는 것일까?
더 '제대로 미쳐라' 다그치는 것일까?
자나깨나.
같은 짓만 한다는 건
같은 짓만 머리 속에 가득차 있다는 건
그 '짓'외에는 재미와 의미를 상실했다는 건
여기의 나와 저기의 내가
바통을 주고 받는
전우주적 일체(一切)에 대한 신비한 체험이 아닐 수 없다.
난 자면서도 글을 쓴다.
지금 이 글도
저기서 깨어있는 내가
여기서 자는 내게로 흘러들어와
자다 일어나 손가락만 움직이며 그냥 받아적을 뿐.
이 오묘한 신비로움에
나는 말 그대로, 정신을 못 차리겠다!
내가 이 '신비'를 외면할 수 없는 이유는
'신비는 공리를 초월하면서 어떤 질서를 수렴한다(주1)'는,
'호접몽(주2)'에 대한 만물일체의 기억을,
'우리는 잠자며 잠 깨어 있고. 잠 깨어서 잠자고 있으니 어째서 우리가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 다른 방식의 꿈꾸는 일이며, 깨어 있는 것이 어떤 종류의 잠이 아닌가?(주3)'라고 의문하지 않는 나를 호되게 꾸짖었던 성현의 가르침이 이미 내게 담겼기 때문일까?
주1> 깊은 마음의 생태학, 김우창, 2014, 김영사
주2> 호접몽(胡蝶夢) : 중국의 장자(莊子)가 꾼 '나비에 관한 꿈'으로 꿈에 호랑나비가 되어 날아다니다가 깨서는 자기가 꿈에 호랑나비가 되었던 것인자 호랑나미의 꿈에 장자가 되었던 것인지 모르겠다는 말에서 유래.
주3>몽테뉴 나는 무엇을 아는가, 몽테뉴, 손우성역, 2005, 동서문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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