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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담 Nov 03. 2022

모든 영혼의 고귀한 완전성

'일'과 '워라벨'에 대한 소고


얼마 전부터 나를 휘감은 커다란 흐름 가운데 하나는

내가 만든 성공학(學), 더 크게는 교육에 대한 컨텐츠를 세상에 내놓을까... 이다.

쉽게 말해, 이제 정신을, 가치를 '일'이란 것으로 풀어볼까...다.

나에게 '일'이란 단순한 노동 이상의 것이기에 

더 더디게, 더 신중하게, 더 세밀하게, 더 민감하게

나는 흐름을 느끼려 한다.  


일에는 그 일을 이끌고 가는 정신이 있어야 

일이 모순에 빠지지 않는다.

일이 공허해지지 않고 

일이 세상을 위하는

일이 목적하는 자체의 방향으로 가게 된다.


일이 손에 안 잡히고

일이 내 일같지 않고

일에서 주는 쾌감을 느끼지 못한다면

그 일의 중심에 무엇이 있는지,

그 일을 끌고가는 정체가 무엇인지 

그 일의 의미가 옳은지 

그 일의 방향이 세상을 향하는지 나를 향하는지

그 일이 자체의 힘으로 가는지 내 능력으로 가는지 고찰해 볼 일이다.


일은 

삶에 먹을 것을 주면서

쾌락과 그 이상의 가치를 주는 것이라야 한다.


일을 일로만 여긴다면,

'또 전쟁같은 일터'라는 사고로

'일과 삶의 균형'을 논한다면

내 생존의 도구인 '일'의 '꼴'이

고무줄없는 팬티, 앙고없는 진빵꼴을 면하기 어렵다.


내가 나에게 준,

내 삶의 물질과 가치를 가져다주는

그 일이 무엇인가에 대한 숙고는

지금 하는 일의 기능이나 능력에서뿐 아니라 

더 나아가

인간사회 속에서 내 일의 가치를 논하는 것으로 확장되어야만 할 것이다.


그러하지 않으면

'일'은 단순한 '노동'과 물질적 보상이상의 가치를 지니지 못한다.

노동의 가치가 상실되었다는 주장은 

제레미리프킨의 '노동의 종말'이나 유발하리리의 '무용계급의 등장', 토마피게티의 '노동가치의 상실', 니콜라스나심탈레브의 '노동인간에 대한 적대'등의 내노라는 세계적 학자들의 언급으로 대변하고


잠깐 이에 대한 나름의 규정을 해본다면


노동가치의 상실, 인간노동의 종말이 의미하는 바는

노동자체의 추락을 의미한다기보다

그만큼 기술이나 기능적인 측면에서 능한 자들이 많아진 데에서 오는 

상대적인 가치하락이며

AI의 대체로 인해 인간의 숙련이 그에 미치지 못함을 의미하는 것으로 가볍게 간주하고자 한다.


단순한 의미에서 '노동'이 아닌,

'일'로 승격된 '나의 일'을 고찰해보자.


나는 무엇으로 내 생존과 존재의 가치를 얻고 있는가?

지금 내 '일'은 나에게 그러한 존재인가?


여기서 우리는 창의와 창발에 대해 간단하게라도 짚어봐야겠다.

창의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다.

종교나라 티벳에는 '창의(creative)'라는 단어가 없는데 

이 의미를 말하고자 할 때 '자연스러움(nature)'으로 표현한다.

창의는 그런 것이다. 

지극히 나다운 것이 세상에서 유일한 것이며 지극히 나다운 것이기에 창의는 외부에서 배우는 것이 아니라 

나만의 것을 끄집어낸 그 것이다. 

이것이 현실에 발현될 때 '창발(發)'이라고 하는데 


자, 이러한 관점에서 나의 일을 보자.

나의 일이 나의 '자연스러움'과 맞닿아 있는가?

'지금 일이 내 일같지 않고 손에 잡히지 않아요.'라는

고민의 끝에 '다른 일을 해야 하나?'로 대부분 생각이 전이되는데

과연 나에게로 온 그 일과 '지극히 자연스러운 나'와의 연결부분에서

'지극히 자연스러운 나'- 좀 더 형이상학적으로 말하자면 '참자아'- 를 

나 스스로 아느냐라는 의문부터 제기해봐야 한다.

'나에 대한 이해'의 바탕 위에 '지금 일'이 나랑 맞는지 아닌지에 전투를 벌이는 것이 순서인데

대부분 '자기를 알지 못한 상태'에서 '일'을 자신과 끼워맞추려니 

그 일에 가치가 투입되지 못한 채 나랑 맞니 안 맞니부터 거론하는 것이다.


노동으로서의 일, 경제수단으로서의 일에 

나의 가치, 즉, 자아탐구를 통한 진짜 나다운 나의 정신이 투입되어 

그 일에서의 가치가 가슴으로 전해지면 

그 일은 같은 일일지라도 분명 새로운 창발을 일으킨다. 

한마디로, 창의가 창발을 일으키는 것이다.

수단으로서의 '일'은 변하지 않았지만

수단이 목적으로 승격되면 그렇게나 '손에 안 잡히던 일'은 

나의 창발성을 불러오는 너무나 유용한 도구가 된다.


올더스헉슬리가 말한대로 '모든 영혼은 고귀한 완전성에 도달'할 수 있고 

완전성은 개인의 생존과 존재가치 전체가 균형을 이룰 때에야 비로소 얻을 수 있으니

모든 것을 잘해내는 완벽함이 아니라 

하나가 모든 것에 연결되는 일체성, 완전성에 도달하고자 해야 한다.


오로지 내 것으로 세상을 걷는 자에게 시간의 양적 투입이 병행되었을 때, 

즉, 수단으로서의 일에 나의 영혼의 정신과 일정시간(나아가 기간)이 투입되었을 때 

분명히 

똑같은 일도 과거와 다른 일로 승화되고

나의 삶의 가치 역시 창발된다.

마치 이런 것이 아닐까?

케네디 대통령의 '당신은 왜 그렇게 열심히 청소하느냐?'라는 물음에

NASA의 청소부는 

'나는 청소를 하는 게 아니라 사람을 달에 보내는 일을 돕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한 것과 같은 것이다.


몽테뉴 '어떻게 일이 이렇게 되었나?'라는 질문이 아니라 

'그런데 일이 이러한가?'라고 말해야 한다고 했다. 

우리의 사고는 수백가지의 세계로 채워져 있으니 그 원칙과 구조를 발견하는 것은 어려울 수 있다. 

그러나, 모든 것을 다 거둬내고 그저 '일'과 '일이 품은 가치'로만 본다면

그것은 '무(無)'에서 시작된 '일 자체'가 가진 힘으로 일은 갈 길을 가는 것이니 

그냥 냅둬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즉, '가치를 품은 일'이 '일'을 되게 만드는 것이지

형이하학적인 개념으로서의 '일 자체'만으로는 결과가 일시적다.


요즘 자주 회자되는 워라벨(Work-life balance, 일과 삶의 균형)은 

단어자체부터 모순이다.

저울질은 등가(等價)일 때 하는 것이다.

일과 삶이 등가인가? 아니지 않은가?

진정 워라벨을 논하려면

삶 속에 일이, 일속에 삶이 섞여 가는 과정을 통해

5:5가 아니라 어떤 때엔 1:9, 또 어떤 때엔 9:1이 되는 흔들림을 인정해야 한다.

그러니, 일과 삶이 맞닿아라도 있으면 균형이며

섞인 탁도에 따라 균형의 안정성과 완전성을 논할 수 있게 된다.


'힐링'이 문화가 되면서 '아~ 이제 좀 사는 거 같네!'

라고 쉽게 내뱉는 말들이 얼마나 어리석은가?

이 말은 '일에 나의 정신이, 나의 의미가' 안 섞여서

내가 일을 위해 사는건지

살기 위해 일하는건지

도통 구분못함 또는 구분안됨을 토로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나도 모르게 나의 사고안에 자리를 틀어버린 질문 하나.

'내가 지난 십수년을 투자한 가치와 철학, 사상을 물질로 풀어내는 '일'을 해야 하나?' 

이 질문의 답이 어려운 이유는

내가 선택하고자 하는 '일'이 

나의 가치와 사회적 필요에 대한 연결에 기능하는지

나의 현실과 인류의 보편적 선(善)에 대한 연결에 부족함은 없는지

나의 추구와 현실적 이윤의 연결이 타당하고 정당한지

나의 일이 대자연인 우주의 일에 종속되고 부합되는지에 대한

깊은 숙고를 거쳐야 하는 과제인지라


지금 나는 이 질문에 답을 구하기보다

답답과 충동과 한심과 지루와 탐닉과 두려움을 억제하며 

내 마음이 내게 내지르는 소리에 더 귀를 기울여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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