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과 '꿈'에 대한 소고
여기에서 저기,
저기에서 여기는
'나'를 '나'로부터 분리시키며
'나'를 '나'에게 매개한다.
나는 나의 영혼이
지금 나를 재우고
시간이 지나면
나를 깨우는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나의 영혼은
여기서 나를 재우면서
저기서 나를 깨우고
여기서 나를 깨울 때는
저기서 나를 재우더라.
나는 동시에 두 공간에서
자면서 깨어 있고
깨면서 자는 것이었다.
두 공간으로
분리된 나는
영혼에 의지해 연결됨으로써
저기로부터 보내온 신호에 여기서는 무의식적으로 반응한다.
때로는 진땀 흘리며 저기로부터 온 '꿈'을 털어내려도 했고
때로는 갓난아이처럼 웃으며 저기로부터 온 '꿈'을 붙잡으려고도 했으며
때로는 저기로부터 아무 것도 오지 않아 기다리기도 했는데
나의 영혼이 요즘 내게 하는 짓은
여기에서도 이 생각
저기에서도 이 생각
계속 같은 생각으로
여긴지 저긴지 분간할 수 없게 나를 뭉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날 깨우며 내게 하는 짓을 저기서는 잠재우며 동시에 하게 하고
여기서 날 재우며 내게 하는 짓을 저기서도 날 깨우며 똑같이 하게 하니
영혼의 호들갑에
내 육체는
여기서도 자다깨다
저기서도 자다깨다
너저분하게
열도 나고 속도 더부룩하고 괜한 기침에 콜록대기도 하지만
자다깨다
자나깨나
여기서도
저기서도
같은 생각, 같은 짓하는,
오묘한 신비로움에
깨서도 놀랍고
자다가도 놀라서 깬다.
자다깨다가 계속 된다는 것은
시간과는 무관하다.
해넘어간 밤시간에도 자다깨다,
달넘어간 해시간에도 여전히 자다깨다인지라
늘 깨어있지도
잠들어있지도 않은 상태.
나의 영혼이
자. 연결한다! 하며
분리된 두 공간에서 동시에 내 육체에게 명령하는 것은
자신의 존재를 알리기 위한 것일까?
아니면,
내가 해내야 할 무언가를 세상에 드러내려 신호를 주는 것일까?
'미쳐서' 하는 짓이 이런 것임을 알게 하기 위함일까?
여기 내가 깨어 하는 짓이
저기 잠자는 내게로 진짜 전해지는걸까?
여기 내가 자며 하는 짓은
저기 내가 깨어 하는 짓을 진짜 전해받는걸까?
자나깨나.
같은 짓을 한다는 건
같은 짓만 머리 속에 가득차 있다는 건
그것 외엔 아무 것도 재미가 없다는 건
여기의 나와
저기의 내가
한쪽이 지치면 다른 한쪽으로 바통을 넘기는,
우스꽝스럽지만 전우주적인 일체(一切)에 대한 신비한 체험이 아닐 수 없다.
난 자면서도 글을 쓴다.
지금 이 글도
저기서 깨어있는 내가
여기서 자는 내게로 정신없이 전해주는 바람에
놀라서 깨어나
육체는 자는데
손가락만 움직이며 그냥 부르는대로 받아적는 것뿐.
이 오묘한 신비로움에
나는 말 그대로, 정신을 못 차리겠다!
이 '신비'를 외면할 수 없는 이유는
'신비는 공리를 초월하면서 어떤 질서를 수렴한다'는 김우창교수의 강력한 메세지와
장자가 경험한 '호접몽'에 대한 만물일체의 기억과
'우리는 잠자며 잠 깨어 있고. 잠 깨어서 잠자고 있으니
어째서 우리가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 다른 방식의 꿈꾸는 일이며,
깨어 있는 것이 어떤 종류의 잠이 아닌가?'라고 의문하지 않는 나를
호되게 꾸짖은 몽테뉴의 가르침이
나도 모르게 나에게 담겨 있었기 때문이겠지.
* 이와 연관된 글을 예전에 쓴 적이 있는데 함께 읽어보신다면 감사하겠습니다.
https://brunch.co.kr/@fd2810bf17474ff/167
https://brunch.co.kr/@fd2810bf17474ff/173
[발췌도서]
김우창, 깊은 마음의 생태학,
몽테뉴, 나는 무엇을 아는가, 1978, 손우성역, 동서출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