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지담 Nov 16. 2022

동물에 비교당해 자존심 상하지만, 그래도!

'감각'과 '지각' 대한 소고

* 비꼼, 자존심 주의.

* 인간도 동물이지만 여기서는 말 그대로 인간 VS 동물로 구분.


탁란하는 새들이 모양과 색, 알을 낳을 타이밍을 정확하게 알아내는 감각

똑같이 생긴 수천마리 무리들 속에서 정확히 자기 새끼를 찾아내는 펭귄의 감각

길도 없는데 수만km를 열맞춰 자기가 목표한 그 지점으로 날아가는 기러기의 감각

전봇대와 전봇대 사이를 바람을 타고 줄을 잇는 거미의 감각

저 높은 하늘에서 보이지도 않는 수풀사이 작은 들쥐를 정확하게 낚아채는 매의 감각

접착제도 없이 작고 가는 가지만으로 높은 나무꼭대기에 바람에도 끄덕없는 둥지를 만들어내는 새들의 감각

그 작은 몸집으로 아파트 3층높이까지나 집을 짓고야마는 흰개미의 감각 

파종이 계절보다 늦으면 모든 양분으로 꽃을 얼른 피운 뒤 씨부터 땅에 떨구는 식물의 감각

그리고

우리집 김새나와 김개리가 빛의 속도로 펄쩍 뛰어 날아가는 파리를 순식간에 잡아버리는 고양이의 감각


가히 인간인 나를 주눅들게 하는

이 모든 동식물들의 초감각들.


고등(高等)하다 하등(下等)하다의 기준은 뭔가?

그 기준에서 인간은 고등한가?

기준은 누가 세웠지?


감각을 기준으로 한다면

인간인 나는 결코 저들보다 뛰어날 수 없다!

번개맞아 초능력을 얻지 못하는 한 절대치에서 무조건 밀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인간인지라 

'내가 동물보다 고등하다' 명제화하기 위해 나름의 썰을 풀어볼까 한다.


감각은 인간이 지각하는 것의 시작이다.

이에 대해 에피쿠로스의 논증을 잠깐 언급하자면,

그는 '이성(추론, 로고스)도 감각을 반박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이성은 모두 감각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의 감각이 다른 감각을 반박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면서

감각은 느끼는 주체가 다르기 때문에 동종(同種)끼리의 감각에서도, 

자극하는 대상이 다르기 때문에 이종(異種)끼리의 감각에서도 

유일하고 주체적이고 결코 서로 같을 수 없다고 했다.


모든 사람들이 같은 현상에서도 서로 다른 이성의 작용(사고)을 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이성의 시작이 이렇게 모두가 다 다른 감각으로부터 출발하기 때문인데

어떤 반박도 안되는 이 단순한 논증으로 

'모든 지각의 시작은 감각에서부터'라는 명제에 이견을 내세울 근거는 없다. 

나름 글의 이해를 돕고자 진땀빼고 그린 그림

나는 동물보다 고등하다.

단, 초감각을 지닌 동물보다 고등하려면 이해를 도울 전제가 필요하다.

(나름 말도 안되는 그림을 그렸으니 살짝 보면서 아래의 글을 읽어나가시면 약간 도움이 되실지도..)


느낌! 즉, 감각되어지는 순간 인간은 본능적으로 이성을 출두시키는데 이를 '호기심'이라 한다. 

호기심은 관심으로

관심은 관찰로

관찰은 지식의 탐구, 즉, 앎의 욕구로,

앎의 욕구는 인지(intelligence)로,

인지는 새로운 지식(이론+경험)의 투입과 뒤섞임(융합), 연결을 통해

지각되어진다. 


지각(知覺)은 풀어 말하자면, 

'앎(知)'을 '완전한 인식으로 깨닫는(覺)' 것이기에

지혜롭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하겠다.

단, 여기서 '지혜로운 지각'은 윤리적인 선(善)을 향할 경우에 한해서다.


결과적으로, 

지혜로움의 시작 역시 감각으로부터다.


감각과 이성을 거론했으니 내친 김에 여기에 정신과 마음까지 거론해보자.

우리는 감각되어지기에 알고자 하는 욕구가 시작되고 

욕구의 정체가 궁금해 앎의 세계로 발을 들인 후

그 곳에서 기존의 앎과 새로운 앎이 섞이고 깎이고, 말 그대로 갈고 닦이며

일상의 선(善)한 경험과 접목된 '앎'의 실천이 

나의 정신를 만들면서

자신만의 삶의 길을 걷게 된다.

그 길을 제대로 가기 위해 

초월적 감각인 지혜와 통찰, 직관과 같은 고차원적인 능력(형이상학적 고찰, 초월적 지각)의 배양이 필요한데

이러한 배양의 정돈과 질서를 위해 우리는 마음의 평안함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이러한 정신작용은 나의 '업(業)'을 위해서이며

'업'을 위한 도구가 '일'이다.


또 다시 결론적으로, 

창의적인 발현의 시작, '업'의 현실적 실현 역시 감각에서부터다.


자, 그렇다면,

지혜로움과 창의의 시작이 감각인데

동물보다 한참 하등한 감각의 소유자인 나는 

도대체 어디에 힘을 쏟아야 할까?


첫째, 어쨌든 감각이다.

내가 최대한 느낄 수 있도록 항상 민감해야 한다. 

센스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민감성, 즉 센스!

아무리 곧추세워도 나의 감각은 너무나 미진하니

감각을 느끼지 못하더라도(아니, 감각이 없더라도) 

최대한 민감할 것! 

최대한?

'민감할 필요가 없구나!'를 감각적으로 알아챌 정도로 민감할 것!


둘째, 동물도 이성이 있으니(그림 속 빨간별 3개로 표시해둔 점 정도?) 

인간인 나는 후천적으로 배양되고 습득가능한, 저 빨간 지점에서부터 오른쪽으로 집중해야 한다.  

감각으로 전해진 것을 

일단 머리로 이동시킬 수 있어야 하고!

머리에서 다시 손과 발, 혀를 움직이는 경험을 보태

고차원적인 능력을 배양, 성장, 숙련시킬 수 있어야 하며! 

마음의 평안함을 유지하면서!

나의 삶의 길을 찾아 걷는!

즉, '지각'의 방향으로 힘을 쏟아야 한다.

음.. 애써 배워야할 것들을 찾아나서야 한다는 말이다.

늘 깨어있는 나의 의식이 지각의 숙련과 성숙을 도울 것이다.


모든 것은 그 자체 안에 프로그램으로 시스템되어 있다.

그 작은 좁쌀에도 내재된 프로그램에 의해 정확한 시기에 정확하게 조가 열린다.

내가 너무나 싫어하는 꼴같잖은 모기도 눈에 보이지도 않는 알에 장착된 프로그램으로 

정확한 시기에 정확하게 모기가 된다.

처음에 언급한 저 수많은 동식물 전부! 

세상을 살아가기 위한 기본적인 본능프로그램이 장착되어 있다.


그런데!

인간에게는 선천적, 본능적으로 장착된 프로그램 외에 

'프로그램을 다시 프로그램화'해내는 칩이 하나 더 있는 듯하다. 

후천적으로 선천적 본능에 추가, 삭제, 조율, 승화시킬 수 있는 칩.

이 칩으로 우리는 고등동물임을 확인시켜가며 살아야겠다.

선천적인 본능(의식주해결을 비롯한 생존 및 종족보존)이나 

동물에게도 '어느 정도 지닌 이성'만 가지고 산다면

나는 결코 동물보다 나은 고.등.한.인간이라고 할 수 없을 것 같아 

심히 불쾌해진다.


무의식적으로 '나는 인간이니까 생각하며 살겠지' 싶겠지만

의외로 제대로 생각하며 사는 인간은 불과 5%밖에 안된다고 한다.

(어디서 봤는데 출처가 기억안남, 혹시 아시는 분은 덧글 부탁드립니다!)


그런데 왜 

인간을, 나를 동물과 비교할까?

그 자체가 우습고 자존심 상하지만

자존심 잠깐 뒤로 하고 

자존감부터 찾는 건 어떨까?


왜 지금 우리의 대부분은

생존도 해결되어 있지 않고 : 실업률, 자살률, 빈곤률, 캥거루족, NEET족

종족보존을 위한 노력은 커녕 시도도 않고 또는 어렵고 : 비혼, 노키즈족, 불임과 난임의 증가

생각하기보다 즐기기 위해 사는 : 소확행

이러한 문화가 너무나 팽배한 이 현실이

동물과 비교당해야 하는 이유라면 너무 오버인가?


나는 고등한가, 하등한가?

나에게 다시 물어야하겠다.



#감각 #지각 #인간 #동물 #에피쿠로스 #지담북살롱


* 참고도서 : 그리스철학자열전, 2008, 디오게네스, 전양범 역, 동서문화사, p.672




이전 06화 골통에 설사제를!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