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와 '갈등'에 대한 소고
아! 링위에서 드디어 종이 울렸는데
깨버렸다.
새벽 4시 기상이 몸에 베어있는 탓에 싸웠어야 했는데
깨버렸다!
당시 '카니발'이라 불리는 단체미팅에서 처음 만난 그와 나는
19살, 대학입학부터 28살까지 무려 10여년을 사랑했었다.
인터넷이 없었던 그 당시 손편지를 매일 쓰며,
20대 전부를 함께 한 그와 결혼하지 않은 이유는 단 하나였다.
'00김씨 종가집 종손'이라는 사실이 그의 부모와 우리 부모 모두가 반대하는 이유였다.
나는 그 때문에,
그는 나 때문에,
우리는 부모때문에,
부모는 집안때문에,
집안은 관습때문에
여하튼 그 당시 정서는 그런 말도 안되는 이유로 사랑하는 남녀가 함께 할 수 없었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보다
'그 이유때문에'를 선택한, 핑계다.
관계란 정당성의 대립이다.
내가 옳으려면 상대가 글러야 한다.
내가 정당하기 위해 상대는 부당해야 한다.
그래야 핑계가 정의로워진다.
이해관계는 그런 것이다.
'나는 이러한데 네가 그러하니 나는 안되겠다!'는 보편적인 지배논리가 미해결된 갈등의 위안처다.
그래서, 목소리 큰 놈이 이기는 게 아니라
논리적으로 잘 따지는 놈이 이긴다.
논리를 제대로 근거있게 따지는 능력이 출중한 사람이 변호사이고.
남자가 여자앞에서 힘이 약해서가 아니라 언어투척에서 빠져나갈 구멍이 없어 쩔쩔 매는 것이고.
여하튼,
'갈등'은 '문제'로 드러나고
'문제'는 '해결'의 속성을 지니지만
'해결'은 '정당성의 대립'이라고 다시 한 번 정리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갈등의 연속인 삶에서
늘 내가 옳으니 네가 그르다라고 소리치며 살아야 할까?
아니면 외면하고 살아야 할까?
아니면 죽어라 우기며 살아야 할까?
여기서 나는
이해관계를 '전제된 이해관계'와 '잠재된 이해관계'로 구분지어보려 한다.
'전제된 이해관계'는 이미 정해져 있는 관계다.
상사와 부하직원, 부모와 자녀같이 누구도 거부할 수 없는 객관적인 관계.
'잠재된 이해관계'란 추상적이며 다차원적이면서 지극히 개인적인 환경에 의해 정해진 관계다.
가령, 부모자녀관계는 부모가 자녀를 키우는 것(전제된 이해관계)이지만
자녀가 오히려 부모노릇을 하는 경우가 그들 사이 잠재된 관계라는 말이다.
그들만의 환경안에서 개별적이고 주관적으로 형성되어 있는, 그런 관계.
모든 관계는
전제와 잠재, 두 이해관계를 내포하고 있다.
어떤 갈등에 부딪혔을 때, 즉, 정당성의 대립이 시작되었을 때
'전제된 이해관계'는 '타당의 근거'가 된다.
내가 부모니까, 내가 선생이니까, 내가 나이가 많으니까. 등등.
어떤 면에서 이 관계는 탁월하게 긍정적인 권위가 되지만
또 다른 면에서는 탁월한 모순의 윤활유로 부당한 작용에 오히려 힘을 보탠다.
'00김씨 종가집 종손'이라는 '전제된 이해관계',
즉, 저쪽은 종가집며느리로서 나의 현대미를, 이쪽은 딸의 어려움을 내세우는
'양가부모 VS 우리'의 갈등에서 이 관계는
'탁월한 모순의 윤활유'의 기능에 대단히 충실했었던 것이다.
당시 우리가 함께 보낸 10여년, 사랑의 깊이, 미래에 대한 비전 등 '잠재된 이해관계'의 힘이 강했다면
충분히 해피앤딩으로 끝낼 수도 있었겠지만
우리는 정당성에서 패했고 패한 것에 대한 '이것저것 탓'을 찾아가며 뒤돌아보지 않았었다.
우리는 늘 '상대의 입장'을 이해한다고 말하지만 과연 그럴까?
나는 종가집종손 맏며느리로 평생 살아온 그녀의 고정관념을,
그녀는 현대적인 외모와 사고를 가진 나를,
나는 시집살이의 어려움을 겪은 나의 엄마의 경험지식을,
우리 엄마는 아무것도 모른 채 괜찮다는 나를,
과연 우리는 '상대의 입장'에 서서 이해할 수 있을까?
수십년의 세월이 고착시킨 '상대의 입장'에 서서 사고한다는 것은
'실제적 경험'이 배제된 추측이어서 허상과도 같다.
그래서인지 나는
'역지사지'는 불가능하거나 없는 것이지 공감부족이나 선(善)의 결여라 여기지 않는다.
저쪽 나라에서 전쟁을 겪고 있지만
내 손가락에 찔린 가시 하나가 더 나를 곤경에 빠뜨리는 것처럼
상대의 입장을 살핀다고는 하지만 결국 내 입장에 서서 바라보는 정도이지 않을까?
그렇다고,
상대입장무시, 역지사지는 사전에 없는 셈치고 살 수는 없다.
억지로 가랑이를 찢어도 상대가 서 있는 그 '입장'에 설 수 없고
AI도 아닌 내가 상대의 기억속에 들어가
간접적으로라도 상대의 삶을 대리경험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우리는 좀 더 다른 관계를 생각해보면 어떨까?
전제된 이해관계는 바꿀 수 없지만
잠재된 이해관계는 바꿀 수 있다.
어쩌면 말이다.
'나와 너'를 모두 포함하는 '거대한 공간'과 분명 어떤 관계가 맺어져 있다는 사실로 내 시야를 확장시켜!.
객관화된 전제된 이해관계를 너머
잠재된 이해관계에 힘을 보태줄 새로운 관계, '거대한 공간'을 내 편으로 만들어보는 것이다.
목적지가 이끄는 힘은 '나와 너'보다 더 거대하고 강한 관점을 지닌다.
'나 vs 너'를 너머 '나+거대한 공간 vs 너'로
내 시선을 저~어기 멀리로,
내 사고를 저~어기 깊이로,
내 관점을 저~어기 미래로 옮겨보는 것이다.
여기서는 반드시 '느낌'이 출현한다.
"느낌대로 가보자!"
"이끄는대로 가보자!" 라는 형이상학적인, 말같지도 않은 발언을
지나친 자신감으로 뱉어내면서 상대의 손을 잡고 이끄는 힘.
여기서의 정당성 다툼은 그저 표면상 드러나는 것일뿐 이미 결과는 정해져 있다.
'거대한 공간'이 내 편이 되었을 때
우리의 '관계'는 현실이 아닌, 미래의 어떤 지점에 가 있기에
입장 무시, 모두가 승-승으로 화합될 수밖에 없다.
즉, 나도 정당하고 너도 정당하며
우리 둘 다 부당할지라도 거대한 힘이 우리를 이끌기에
지적논리로는 설계할 수 없는 '짓'을 저지르는 힘을 갖게 된다.
말같지도 않은 소리라고 외면한다면 영원히 우리네 관계는 갈등에서 벗어날 길이 없을 것이다.
끝까지 나 잘났네 너 잘났네 꼴을 면하지 못할 것이다.
이도저도 아니라면,
그냥 '지고 살면 그뿐'이라며 겉과 속이 다른 체 착한 커튼 뒤에 숨어살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거대한 공간'을 내 편으로 만들 수 있을까?
예상되는 뻔한 소리겠지만
'내적 수양'밖에 없다.
쉽게 말해,
내면의 깊이를 깊게, 내 시야를 저 멀리 바라보도록 연마하고
연마된 저 우주의 시선으로 '나'와 '너'라는 행성을 움직일 수 있게끔
'거대한 공간'을 모두 활용할 수 있는 힘을 키우라는 것이다.
내적수양의 강도와 깊이의 정도가 함양된 잠재적 이해관계는
전제된 이해관계를 뛰어넘는 힘이다.
이는
형이상학이 형이하학을 넘어서게 하는 힘이며
감각할 수 없는 미래가 감각으로 받아들인 현실을 이겨내게 하는 힘이며
비논리와 비합리가 논리와 합리보다 더 타당하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힘이다.
한마디로,
미래가, 목적이
현실을, 수단을 이끄는 힘이다.
당시 우리는 젊었고 경험지식이 전무했으며 내적수양은 커녕 놀기에 바빴었다.
미래의 비전이, 사랑이, 세상이, 우주가 주는 힘이 뭔지 관심도 없었고 몰랐었다.
잠재된 이해관계에 힘을 줄 아무런 능력도 지식도 없었다.
그래서 그렇게, 전제된 이해관계의 타당한 논리에 무력했었다.
과거를 회상하고자 이 글을 쓰는 것이 아니다.
문제없는 인생은 없고 갈등없는 관계는 없는 것이 삶인데
나에게 닥칠 인생의 수많은 난제들,
그 속의 갈등을 '상호 대립'이 아닌,
승-승으로 이끌기 위해서는
나와 너, 나와 나 아닌 것, 나와 현상, 나와 사물, 나와 세상.
나와 연계되어 있는 모든 관계에 있어
'전제'된 이해관계를 뛰어넘을 수 있는
'나를 키우는 내적수양'이 필요함을 말하고자 함이다.
이를 키움으로써,
이미 '나'는 '거대한 공간'과 한편이 되어 있음을 스스로 인지하고,
이를 인지함으로써,
상대와의 갈등을 너머 상대의 손을 잡아줄 넓고 높은 하나의 세계가 바로 '나'임을 깨닫자고 말하는 것이다.
이를 깨달음으로써,
갈등이 대립에서 화합으로, 화합은 더 큰 조화로, 조화는 또 하나의 창조로 이어지게
내가 더 나를 키워보는 것은 어떨까 제안하는 것이다.
이 제안을 받아들임으로써,
문제와 갈등없는 인생은 불가능하지만,
이들이 화합의 디딤돌이 되게끔 내가 먼저 손을 내밀 수 있지는 않냐고 용기를 내자는 것이다.
인간의 모든 능력은 자기 바깥의 자연에 관계하여, 그가 살고자 하는 세계를 예견하게 한다.(중략)
인간은 한 세계를 갖지 안고서는 살 수 없다.
나폴레옹을 고도(孤島)의 감옥에 넣고서 그의 능력의 영향을 받을 인간을 하나도 없게 해봐라.
올라갈 알프스도, 승부의 목표가 될 상금도 없게 해봐라.
그는 허공을 치는 어리석은 사람이 될 것이다. (중략)
그러나 그를 옮겨서 대국(大國)들과 조밀한 인구, 복잡한 이해관계, 서로 대항하는 열강(列强) 속에 놓아보라. 그대들은 이러한 옆모습과 윤곽으로 한계지어진 인간 나폴레옹이, 진정한 나폴레옹이 아님을 볼 것이다.(중략)
그의 본체(本體)는 여기에는 없다.
그대가 보는 것은 인간이라고 하는 것의 가장 작은 부분, 가장 작은 몫이다.
그러나 만일 그 전신(全身)이 여기에 있게 되면
그것은 이 집에도 넣을 수 없을 정도의 넓고 높은 어떤 것이리라.
- 헨리6세, 제 1부 제 2막 제3장(에머슨 수상록 발췌)
아참! 오해하진 마시라!
잘나가는 아들딸을 둔 지금 첫사랑과의 인연에 결코 미련은 없다.
종손의 맏며느리 역할을 하기에 난 너무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이며
양가부모의 판단이 전적으로 옳았음을 지금은 아니까.
덕분에 첫사랑의 추억을 간직한 타이타닉의 여주인공이 되어 있으니까.
게다가 이러한 추억조차도 사랑으로 감싸주는 주원바보가 옆에 있으니까.
그건 그렇고, 왜 그는 느닷없이 꿈에 나타나서
링 위에서 싸우자고 덤빈거지?
이유가 있겠지 싶지만
그 이유가 살짝 궁금하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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