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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담 Feb 09. 2024

이상하게 여기서 나는 인기가 좋다!

시칠리아로 향하는 크루즈 안에서

2023. 10. 28

이상하게 이 곳에서 나는 인기가 좋다. 분명 혼자 왔는데 아는 이들이 점점 많아진다. 한껏 멋낸 서양인들이 다수인데 이들 틈으로 가방매고 새벽이나 낮이나 저녁이나 기항때를 제외한 시간은 면티에 민낯으로 오로지 노트북과 책에 코박고 있는 동양인인 내가 그들에겐 특별해 보였나보다.


새벽마다, 기항지에 나갔다 들어와서마다, 저녁마다 카페의 한 테이블을 차지하고 있어서인지 카페종업원들이 나를 알아보게 되고 자기들끼리 내 얘기를 했다고 한다. 뷰티풀하다고. 나도 여자라서 이런 말을 들으면 무조건 기분은 좋다! 그러면서 내 직업을 서로 알아맞히려 했단다. 흑인여종업원은 내가 자리에 앉자마자 이런 얘기들을 내게 다가와 해주며 하얀 치아를 활짝 드러내 웃는다. 덩달아 나도 모든 치아를 드러내며 함께 웃다. 자기도 글을 쓴다며, 비공식적이지만 두 번째 글을 쓰고 있다며, 나랑 얘기하고 싶었다며... 자신의 sns를 보여주기도 한다.


잠시 뒤 남미 쪽 남자종업원이 커피를 가져다 준다. coffee? 하며 살짝 눈과 손으로 제스츄어를 하면서 자기가 가져다주고 싶었다고... 취향을 몰라 설탕만 가져 왔다고...


여기서 내가 이리 인기가 좋을 줄이야.

크루즈내에서는 식당에서나 걸어다닐 때나 선상에서나 언제나 책가방을 메고 다녀 오히려 눈에 띄나보다..


우리는 모두 일을 한다. 그런데 일을 하면서도 자신의 개성을 드러내어 자신의 삶을 채워나가는 이들이 있다. 먼저 말을 걸고 활짝 웃어주는 그녀와 먼저 설탕까지 챙겨 커피를 가져다주는 그도 그러한 듯하다. 무표정하게 형식적인 인사를 건네는 ‘일만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이들은 반짝인다. 일속에서 자신만의 인생시간을 반짝이게 만들어 가고 있는 것이다.


나는 이런 이들이 참 좋다. 

뭔가 삶의 틈새를 채워가는 이들의 드러난 하얀 이가 참 격있게 느껴진다.

스스럼없이 상대에게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머뭇거림이 없어 좋다.

자신이 어떻게 보일지 염두에 두지 않는 표정들이 참 좋다.

배려도, 친절도, 아첨도 아닌 그저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상대에게 궁금한 것을 묻고 듣는 이들이 참 좋다.

나도 덩달아 그리 되니 더 좋다.

그냥 찍히거나 찍어준다고 하여 건진 몇 장 안되는 전신사진


기항지에 내려 여기저기 돌아다닐 때도 혼자인 나는 늘 핸드폰으로 셀카밖에 못 찍으니 모든 사진이 내 얼굴만 대문짝하게 나오거나 배경을 찍는 것이 전부라 전신을 찍거나 멀리서 나를 찍을 수 없다. 그런데 눈인사를 하며 사진을 찍어주겠다는 분들을 만나 전신사진도 몇 컷 건졌고 또 그냥 가방메고 다니는 내 모습을 찍은 사람들은 크루즈에서 식사중인 날 찾아와 내게 사진을 건네주기도 한다. 


사진찍는 내 모습, 잠깐 퍼져 앉아 낯선 이와 대화하는 모습, 혼자 있는 날 찍어준(아니, 찍힌) 사진들


'같은 크루즈지? 얼굴이 낯익어!' 라며 혼자 배낭메고 노트북으로 글쓰고 아무데나 퍼져앉아 책읽는 내 모습이 좋아보였단다. 신기하다. 나는 사진을 찍히는 사람이 된 것이다. 놀랍다.


이들이 나도 몰랐던 나를 끄집어내 주었다. 

나도 낯선 이와 이렇게 활짝 웃으며 대화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낯선 이가 찍어주겠다는 말에 선뜻 카메라앞에 설 수 있는 사람이었고

낯선 이가 날 찍은 것에도 불쾌하기보다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이들은 의도하지 않았지만 분명 나를 변화시켰다.

화려하고 특별해 보이는 다수 속에서

지극히 평범한 내가 이들 덕에 특별해진 것 같다.     


진정성, 진심의 근원지는 외양이 아닌 것이 확실하다.

어디서든 일속에서 자신의 삶을 사는, 아니, 자신의 삶의 그릇에 일을 제대로 담아내는 사람들이 있다.

또한, 자신의 삶속에 타인을 담아내어 뜻밖의 기쁨을 선사하는 이들이 있다.

그리고 이런 이들은 자신을 감추거나 감춘지도 모르는 무장된 인간의 내면에 틈을 벌리고 숨을 넣어준다.

그렇게 상대를 변화시켜준다. 

내 삶에 짧은 시간, 이들은 진정성이라는 깊은 바람을 내게 넣어주었다.   


내가 살아온 사회에서 나를 포함한 대다수의 사람들은 '급(級)'으로 관계를 맺는다.

서열사회, 계급사회에서 누구를 아느냐가 마치 나의 훈장처럼 여겨지고 심지어 결혼도 급에 맞춰서 해야 하고 사는 모양도 급에 따라 모여야 하고 .. 어떤 사회가 그렇지 않겠냐마는 유독 남들이 자신을 어떻게 보는지를 더 중시하는, 실제 나의 가치관보다 '남들처럼'의 가치관에 자신의 가치를 맞춰가는, 그렇게 관계를 지녀야 하는 사회에서 자라온 나 역시 이러한 범주에서 자유롭지는 않았었는데 무장해제된 이들과의 시간과 공간이 참으로 자유롭고 내가 나다운 옷을 입은 느낌... 너무 편하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카페종업원의 하얗게 드러난 웃음에서 나는 진짜 진정성을, 즐겁게 일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살짝 엿본 듯하여 비밀스럽게 간직되어 있는 나의 과거속 가치관이 조금은 창피했다   

벌써 새벽 3시, 또 나는 5층카페에서 밤을 샌다. 어제 저녁 밤의 화려함을 뒤로 하고 잠깐 눈을 붙인 덕에 이렇게 조용히, 아주 생기있는 새벽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 방금 전 올랐던 컴컴한 밤의 선상에는 늘 그렇듯 아무도 없고 내 눈앞은 온통 검은 바다, 나는 그 속 어딘가에 있을 고래와 여유있게 대화를 나눌 수도 있었다. 


고래와의 대화는 나의 일방적인 부탁뿐이다. 등이라도 보여달라는... 부탁을 들어줄 지는 고래의 선택이다. 거절당해도 할 수 없다. 원래 부탁이란 거절을 전제하니까. 들어줄때까지 부탁하는 수밖에. 


그러다 살짝 여행에 오르기 직전 응급실에 다녀온 생각이 들었다. 돌아가면 병원에 가야하나 말아야하나.. 또 그러다 살짝, 여기서 핸드폰을 떨어뜨리면 찾지 못하겠지?, 잡생각으로도 모자라 온갖 걱정과 고민이 갑자기 쓰나미처럼....

아.. 잠시만 여유가 생겨도 내 정신은 이리도 부산하다.   


하지만 끝없이 펼쳐진 검은 바다 위에 서 있는 지금

나는 내 속의 무한한 바다로 나의 정신을 잠수시킬 수 있겠다.

나의 시야와 피부가 온몸으로 지중해의 검은바다를 흡수시키는 중이니

이 기운을 그대로 내 속으로 끌어들여 내면의 바다에 내 정신을 묶어둘 수 있겠다.


내 안에도 고래가 살까? 

살 것 같다. 

아니, 산다.


내 안에 엄청나게 큰 고래가 살면서 나의 고독을, 외로움을, 그리고 감당하기 버거웠던 심정들을 모두 삼켜버렸나보다. 그러니 지금 내가 이렇게 고독과 친구가 되어 있고 날 괴롭혔던 심정들은 모두 어디로 사라져버리고 이리 나를 그대로 온전히 드러내며 잘 살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랬구나. 내 안에 고래가 있었구나. 그렇게 고래가 하품하고 먹다가 트름하는 것들이 버블로 마구마구 품어져 나온 것이었구나.


고래덕이다. 방금 날 덮친 잡스런 생각을 금새 떨쳐버릴 수 있었던 것은. 순간 덮친 쓸데없는 잡념과 흐트러지려는 정신을 고래가 꿀꺽 삼켜버렸기 때문일 것이다. 와! 신기하다! 내 안에 고래가 살다니!!! 여태 몰라줘서 얼마나 섭섭했을까 싶기도 하고!!! 내친김에 안의 고래가 지중해의 고래를 호출해줬으면 좋겠다. 눈으로 직접 보게. 


걱정이 오면 관심두지 말아야 한다. 

내가 걱정에 관심을 주면 걱정은 자기를 좋아하는 줄 착각하며 나에게 들러붙어 떠나지 않으려 한다.

미안하지만 나는 이제 걱정과 놀아줄 내가 아니다. 

그러니 걱정은 나에게 오더라도 혼자 놀다 가야 할 것이다.     


나는 나의 삶과 사람과 사유와 놀 것이니 말이다.

나의 사유를 나의 정신으로 정리해 나의 손끝으로 쏟아내는 나만의 놀이,

나의 하루를 채우는 이 신나는 놀이에 나는 푹 빠져 있으니 말이다.


끌려가든 따라가든 어떻게든 삶은 앞으로 나아간다.

당겨지는 조바심에 나를 허락해도 좋고

이끄는 자신감에 나를 노출해도 좋다.

어떻게든 과거는 뒤로, 미래는 지금으로 위치를 바꾼다.

삶은 언제나 앞으로 간다.          

당겨지는 조바심이라면 불안과 걱정이 함께 걸을 것이며

이끄는 자신감이라면 기대와 희망의 모험정신이 얼른 따라붙을 것이다.    


여행의 반이 지났고 크루즈내도 꽤 익숙해졌다.

언제나 그대로인 것들이 나를 안정감있게 한다.

지중해를 달리는 크루즈.

검은 하늘, 검은 바다. 

나에게 언제 등을 내밀지 모를 이 배의 언저리에서 유영하는 고래들.

사과든 쿠키든 커피든 뭐든 원하는 대로 가져다주는 카페종업원들까지.    


그대로인 것들에 가슴에서 우러나는 감사를 전하고

결코 그대로일 수 없는, 그래서도 안되는,

찰나라도 진화에 가담해야만 하는 나에게 기대와 희망을 명한다.

시칠리의 일출

다시 선상에 오르니 태양이 내게 왔다.

태양마중.

매일 새벽에 거행하는 나만의 의식은 여기서도 어김없다.


오늘도 어디를 가든 상관없다.

나에게로 온 모든 현상, 또 그 현상 뒤의 이면까지. 세상은 나에게 새로운 모습을 모두 드러낼 것이다. 나도 덩달아 나를 노출하여 이 모두를 감사히, 그리고 온전히 받아내면 그만이다.


삶의 등에서 내려

삶의 앞에 서겠다는 

날 위해

오늘, 

대자연은 무엇들을 줄세워 

나를 자극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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