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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담 Apr 20. 2024

수준을 높이려면 기준부터
기준은 기분말고 기본부터

이기론(利己論) - Ch3.  해체, 그리고 脈!

[이기론]의 CH1. 나는 나를 해체하기 / CH2. 나를 해체해보니가 끝나고.

오늘은 CH3. '해체, 그리고 脈!' 3편입니다. 지난 글 '이기가 이타다'에 이어진 글입니다.


아들이 군대가기 전 엄마를 운동시켜야 한다면 상체근력 운동을 가르쳐 줬었는데 내가 얼마나 내 몸을 무시하고 살았는지 처절하게 절감했다. 무릎을 접고 팔굽혀펴기를 하는데도 단 1개도 못하는 것이다. 이렇게 저렇게 해봐도 아들이 허리를 위에서 잡아주지 않으면 바닥에 엎드린 채 배와 땅 사이에 공간을 전혀 만들어내지 못하고 나는 바닥에 엎어져 있었다. 


당시, 나는 아들한테 큰소리쳤었다. ‘엄마가 얼마나 근력이 좋은 줄 알아? 팔 힘은 없어도 금방 배워! 5개는 거뜬히 할걸!’ 내 상체근육이 이 정도밖에 안되는 줄을 전혀 몰랐기 때문에 망언을 한 것이다. 

     

아들이 내게 묻는다.

‘엄마, 그래도 이제 시작했으니까 하루에 몇 개씩이라도 꾸준히 해야지? 몇 개씩 할 수 있겠어?’ 난 답할 수가 없었다. 나는 팔굽혀펴기의 기본이 되어 있지 않다 보니 '몇 개'라는 기준을 잡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기준은 

기본이 자리를 잡은 후에야 자리가 난다. 

기본이 없는 기준은 없다.    

  

구구단을 외우지 못하고서 방정식을 풀 수 없고

100미터도 제대로 뛰지 못하는데 마라톤에 참가할 수가 없으며

된장이 맛이 없는데 된장찌개가 맛있을 리 없고

나를 알지 못하면서 나를 성공시킬 리 만무하다.     


나는 상체근력을 조금 탄탄하게 하기 위해 일단 기준을 1일 5개로 잡았다. 그런데 웬걸! 결코 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5개는 기준이 아니라 내겐 너무 높은 수준이었다. 그래서 집에 있는 A*****라는 기구로 기본부터 다지기로 했다. 15개 정도 하니 조금씩 팔과 어깨와 배에 힘이 붙는다. 기본기를 갖출 때까지, 하기 싫어도 해야 한다. 그래야 팔굽혀펴기를 하루에 몇 개를 해낼 지 기준을 잡을 수 있다.      


수준이 높든 낮든 일단 수준차원으로 가려면 ‘이하로는 타협하지 않을’ 기준이 필요하고 기준은 기본이 갖춰졌을 때 기본보다 조금 더 높게 정하면 된다. 기준이 없거나 너무 낮으면 수준을 높이는 것이 상당히 어렵거나 불가능에 가깝다. 반면, 기준이 높다면 수준이 높지 않아도 ‘기본 이상’이라 말하는 삶을 영위할 수 있다. 게다가 조금만 노력해도 높은 기준으로 인해 상당한 수준에 도달할 수 있다.     


수준을 높이려면 기준이 높아야 하고

기준을 잡으려면 기본이 마련되어야 하며

기본을 갖추려면 기초부터 단계별로 가야 한다.

기초를 세워 기준이 잡힐 때까지는 어떤 타협도 안 된다.

기준은

기분이 아니라

기본에 의해 제대로 자리를 잡아야만 한다.


그래야, 자신이 원하는, 수준있는(높은) 그 곳에 도달할 수 있다.

하고 싶으면 하고 하기 싫으면 안하는 

기분에 좌우되서는 기준을 잡을 수가 없다.     


모든 일이 다 그렇다.      

언제부턴가 나의 사상이 담긴 나만의 글이 쓰고 싶다는 욕구가 내게서 발견되었고 이를 위해 ‘어느 정도 수준의 책을 쓰고 싶은가?’를 스스로에게 물었더니 몽테뉴가 말했듯이 죽기 전에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스스로를 돌아보는 글' 정도는 써야할 것 같다는 메시지가 나의 내면에서 들렸다. 그래서 나는 나의 글쓰기의 기준을 잡아야 했는데 그저 카페에 끄적거리는 정도의 글솜씨와 읽고 싶은 책을 읽은 정도로는 어림도 없는 수준임을 알았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매일 책읽기와 매일 글쓰기다. 기본을 갖추기 위한 첫단계였다. 기초를 다지고 기본까지 도달하기 위한 실천이다. 입력이 있어야 출력이 있듯 읽는 양이 많아야 나의 정신이 사상을 만들 것이고 그것들이 언어화되는 기능적인 부분과 혼을 불어넣는 예술적인 혼합으로 출력된 글이 탄생하는 것이니 나는 매일 읽고 쓰는 습관을 들이는 것이 기본 중의 기본, 즉 기초행위라 판단했다.      


기초를 다져 기본을 만드는 과정에서는 

수준을 논하면 안된다. 

수준은 한참 멀리 있는 일이다. 


난 기준을 잡을 수도 없는, 가령, 어느 정도 퀄리티의, 어떤 문체를, 어떤 대상으로, 어떤 주제로 글을 적어야 한다는 기준조차 잡을 수 없으니까 기초과정에서는 맹목적으로 읽고 쓰고 읽고 쓰고 계속 계속 읽고 쓰고를 반복하여 양을 쌓는 것, 그것이 습관이 될 때까지는 멈추지 않고 계속 하는 것밖에 할 게 없었다.     

 

이러한 기초 시기에는 절대적으로 양이 중요하다. 가령, 1일 1시간 읽고 1시간 쓴다. 와 같이 질보다는 정해진 양을 채우는 것이다. 그러다가 그 축적이 어느 순간 감(感)으로 느껴질 때가 있다. '아, 이 정도는 거뜬한걸?' 기준이 잡히는 것이다. 

이제 됐다. 

기준이 잡혔으면 가늠해볼 수 있다. 기준이 높은지 낮은지,  

    

'나에게 나무를 베는 데 6시간이 주어진다면 도끼날을 가는데 4시간을 쓸 것이다.' 

유명한 링컨의 명언이다.


링컨이 도끼날부터 갈았다는 실천은 

나무를 베어야만 하는 이유에 대한 수용과 

주어진 조건 모두를 이해한 지각과 

그것들을 오로지 받아들인 그의 열린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 하나의 방향을 지목했기 때문이며 

이 모두가 목적하는 바를 위해 시간의 함수 안에서 기본(도끼날을 가는)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 

결과를 위한 효율적인 실천이었던 것이다.     


기준은 아주 중요하다. 

왜냐면 기준이니까 그 아래로는 갈 수 없는 경계다. 

돌아온 길을 되돌아가지 않는 직진신호이며 

우왕좌왕하더라도 어떤 선은 넘지 않겠다는 타협없는 지점이다.

먼 길을 더 효율적으로 갈 수 있으면서도 결코 이 기간을 지나지 않고는 일정 수준 이상에 도달할 수 없도록 단단히 무장시키는 마법의 기간이다.     


선생은 선생다운 기준이 있고

부모는 부모다운 기준이 있고

군인은 군인다운, 공무원은 공무원다운, 정치인은, 종교인은, 기업인은, 학생은, 여성은, 남성은, 모든 역할을 부여받은 이름에는 ’기준‘이 있다. 

그 이하는 상식선에서 허용되지 않는다.     


기준을 잡았다면 그 지점을 최하로 두고 수준을 논해도 된다. 그 때부터가 진짜 시작인 것이다. 진짜 부모다운, 진짜 여성다운, 진짜 군인다운, 진짜 학생다운.. 이런 것이다. 기준 위에서 수준이 갖춰졌을 때 우리는 '~다운'이라는 표현의 권리를 부여받는다. 그런데 기준을 너무 높게 잡으면 위축되어 포기부터 먼저 하게 되고 너무 낮게 잡으면 상식 이하에 자신을 머무르게 하는 것이다.       


사실 안타까운 것은 

대다수의 사람들이 

기본을 갖춰가는 과정에서 

포기에 익숙해지거나

자만에 빠져버린다는 사실이다


새벽독서를 하면서도 기본을 갖추려면 일단 최소 1달 이상은 새벽에 일어나는 것을 정량적으로 반복하는 것이며 그것이 몸에 조금 익을 때 기준을 세우면 된다. 4시에 일어날지 5시에 일어날지, 1시간을 읽을지 2시간을 읽을지 먼저 기준부터 정하고나서 수준을 논해야 한다. 어떤 책을 얼마나 집중해서 어떤 방식으로 읽어나가면 좋을지에 따라 독서의 수준을 향상시킬 수 있다. 글쓰기도 마찬가지, 일단 5분이든 1시간이든 매일 정량적인 시간을 채워야 한다. 1줄을 쓰든 10페이지를 쓰든 시간을 채운 후 조금 익숙해지면 '매일 1시간을 쓴다'는 기준이 잡히고 그리고 나서 습관이 되면 글의 깊이를 줄 수 있는 주제, 소재, 어휘력, 문체 등등을 수정해가면서 수준을 높일 수 있다.      


기준을 잡는 기본과정은 자신의 현주소를 인정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자신이 하고자 하는 무언가의 가장 낮은 하위수준을 결정짓는 자신감이다.

기본적 배움에 순종하여 자기기만에 빠지지 않겠다는 다짐이다.     

기준이 잡혀 수준을 논할 때도 마찬가지다.

기준 밑으로 내려가면 안된다.

이는 나는 기준이하로 해도 높은 수준을 출력해낼 수 있어라는 오만이 무의식에 존재한다는 의미니까.


그렇게 기준이 잡혔다면 자기기만에 빠지지 않게 지속적인 수준향상을 위한 도전해야 한다. 

수준을 논하는 차원에서 도전하지 않는다는 것은 

기준정도만으로도 난 높은 수준으로 점프할 수 있다는 과한 자신감인 것이다.    

 

나는 기준을 아주 조금 높게 잡는 편이다. 새벽독서도 그랬다. 난 4시! 라고 선언하고 4시부터 시작했고 철학을 읽기 시작했을 때도 소크라테스부터 찬찬히 공부하는 보편적인 상식을 너머 닥치는대로 매일 읽겠다 했고 글쓰기에 있어서도 브런치에 매일 새벽 5시 발행을 2022년 9월 시작한 날로부터 지금까지 지키고 있으니 내게 낮은 기준은 결코 아니었다.      


아직 원하는 만큼의 수준에 도달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기준 아래로는 내려가지 않는다. 내려가지 않을 정도로 양을 쌓는 것에 집중하고 있다. 지금은 4시에 일어나고 매일 새벽 5시 발행하는 것이 어렵지 않다. 1일 1시간 이상 책읽고 몇 시간이고 글에 매달리는 것도 익숙해졌다. 자랑하려는 것이 아니라 '양'이 쌓이면, 그러니까, 습관이 될 때까지 무조건 행동을 하면 누구나 할 수 있기에 나도 할 수 있게 된 것은 당연한 것이다.  


따라서, 어느 순간 폭발할 것을 믿고 있다. 

'양'이 쌓이면 '질'의 폭발

이 일어나는 것은 당연하다. 100도씨까지 열의 양을 올려놔야 액체를 기체로 변화시키듯, 번데기가 수개월을 버텨내면 하늘을 나는 나비가 되듯, 매미가 땅 속에서 7년이라는 기간을 보내면 나무 위에서 울 수 있듯, 모죽이 땅 속에서 수 년간 뿌리를 내리면 하루에 수십cm씩 하늘높은 줄 모르고 치솟듯 '양'이 '질'적인 화학변화를 일으키는 것은 당연한 만물의 원리이다. 


그러니 매미가 땅 속에서 내가 매미가 되어 어떻게 잘 울지?를 논하지 않고 모죽이 어느 정도 키를 키울까를 고민하지 않고 물이 기체가 될 것을 염려하지 않고 번데기가 나비가 되어 어떤 꿀을 어디까지 멀리 날아서 먹을 수 있는지를 가늠하지 않듯 기본을 갖추는 동안에는 그저 양을 쌓아 기준을 높이 잡는 것에 집중해야만 한다.     


기본으로 높은 기준을 잡았으니 이제 나는 내가 도달하고자 하는 수준을 계속 높여가며 하루하루 연마 중이다. 아무리 힘들어도 기준 밑으로는 내려가지 않는다. 왜? 기본단계를 그리 거쳤으니 내려갈래야 내려갈 수 없다. 오히려 기준이하로 내려가는 게 더 어려울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읽기나 사유, 글쓰기가 너무나 힘겨울 땐 니체의 말을 되내이며 딱 기준만큼은 한다. 더도 덜도 말고 딱 기준만큼이라도 하는 것이다.

오랜 시간 예술과 형이상학에서 사는 사람은 물론 어느 정도 길을 돌아온 것이다. 다른 현대인과 경주할 때 불리한 전제에서 시작한다. 그는 공간과 시간을 허비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는 열정과 활력이 속박을 벗어나 끊임없는 힘이 마르지 않는 용암처럼 흘러나오는 그런 영역에 머물렀던 것이기 때문에 단지 적당한 시기에 그 영역에서 떨어져나오기만 한다면 훨씬 더 빨리 앞으로 나아가게 될 것이다.


그의 발은 날개를 달고 있고 가슴은 더 조용하고 더 길게 더 참을성있고 끈질기게 호흡하는 법을 배우고 있다. 그는 도약하는데 충분한 공간을 얻기 위해 단지 뒤로 물러섰을 뿐이다. 따라서, 이처럼 뒤로 물러서 있었던 것에는 그 어떤 무섭고 위협적인 것마저 들어있을 수 있다(주1).


매일 글을 쓰는 나는 나 스스로에게 늘 바란다. 

'잘 쓰고 싶다.'

내 글에는 나의 욕구가 담겨 있다.


글 자체에 격이 있는 글이면 좋겠고

읽는 이의 격을 높여주는 글이면 좋겠고

쓰는 나의 격을 진정성있게 담는 글이면 좋겠고

그러기 위해 나의 격을 높일 수 있도록 글쓰기가 날 훈련시켜 주기를 바란다.

이것이 글쓰기에 한한 나의 기준이 되었다.      

    

수준이 높으려면 기준이 높아야 한다.

기준은 기본을 전제로 해야 한다.

기본은 기초위에 세워지되 기분이 좌우되서는 안된다.


기초와 기본이 갖춰진 기준은 자체의 기세로 기지개를 켜는 기상의 힘을 지니기에

자체속도와 자체증폭력으로 높은 수준까지 자신을 끌어 올려줄 수 있는 토대가 된다.     


기준이, 기본이 왜 이리 어려워? 라고 혹여 '이게 기준이야?'라고 반문할 수도 있겠다. 

그런데 어쩌리... 

기준, 기본. 

이것이 상식인 것을. 

결국 우리가 하는 거의 모든 소소한 행동들이 기본을 다지려, 기준을 잡으려 하는 반복과 훈련인 것을... 

이러한 반복이야말로 그 지루하고 고통스럽기도 하고 난관을 헤쳐나가야 하는 시간도 지나야겠지만 '상식을 만들기 위하여 얼마나 지루한 훈련이 매일, 매년 끊임없이 계속되는가. 얼마나 번거로움과 불편과 딜레마가 잇따라서 생겨나는 것인가. 얼마나 소인배들이 우리의 실패를 좋아할까. 얼마나 가격의 분쟁이 있고, 얼마나 이해타산이 있는 것인가. 그러나 모든 것은 마음의 손을 만들기 위하여 "좋은 사상도 이것을 실행하지 않으면 좋은 꿈에 불과하다"는 것을 우리에게 교훈하기 위해서다.(주2)'는 에머슨의 말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을.     


내침 김에 조금씩 세워진 나의 삶의 기준을 언급해볼까 하는데 나는 내 인생을 놀이터라 여긴다. 잘 살기 위한 기본은 ‘잘 사는 게 뭔지’, 잘 사는 주체가 ‘나’여야 하니 나를 알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아는 것이 일단 기본이었다. 기준도 아니고 기본이었다. 이 기본을 익히는 데에만 수년째. 죽을 때까지 모를 수 밖에 없는 진리탐구이기도 하겠지만 아는 만큼 기준은 세워지고 높아지고 삶의 곳곳에서의 현명한 판단, 언행들로 나의 인간적인 수준, 인격이 드러날 것이라 여긴다.     


놀이터로 치자면 바닥공사가 가장 기본이 되어 미끄럼틀, 그네 등 놀거리들이 세팅되듯이 내 삶도 인간, 사회, 삶에 대한 사유의 길이 내 삶의 기저가 되어줘야 그 시간의 위에서 재미나게 놀 수 있는 글, 말, 또 다른 무언가가 세팅될 것이다. 이왕이면 튼튼하고 재미나고 특별한 것으로 말이다.

           

내 인생의 기준으로 나는 놀이터를 예로 들겠다. 

내 인생은 놀이터다.

일단 바닥공사를 잘해야 한다. 마구마구 놀다가 넘어져도 다치지 않고 건설된 놀이기구들이 튼실하게 서 있어야 하니 말이다. 바닥공사는 ‘나’를 먼저 만드는 것이다. ‘나’라는 놀이터의 바닥공사가 잘 되어 있으면 내가 가지고 노는 책, 글, 코칭, 강의 등의 수준을 높일 수 있고 그렇게 차별화시켜 세상에 내놓으면 사람들이 놀러 올 것이다. 


노는 맛이 좋으면 친구도 데려올 것이고 그렇게 그렇게 전파되면서 신나게 놀 수 있는 이 곳에서의 나의 재미는 더욱 커질 것이다. 그러다 어느 시점에 이르면 분명 나에게만 탁월한 재미를 주는 놀이기구를 알게 되거나, 나만의 특별한 놀이 비법도 더 자주, 많이 창조해 낼 것이고 그 탁월함과 비법이 남들과 차원이 다른 어떤 경지까지 날 데려다줄 것이며 그러면 나는 더 리얼하게 설명해줄 수 있을 것이며 내 인생의 놀이터에 오는 이들에게 더욱 신나는 놀이를 선사하게 될 것이다. 당연히 나의 자유와 행복과 평안은 점점 커질테고 나와 함께 하는 이들도 마찬가지겠지.      


그렇다면, 지금 내가 만드는 놀이터는 나를 위해 시작했지만 모두를 위한 것이 된다. 

그 지점에서 비로서 그토록 원하던 나만의 삶, 나만의 인생이 나의 서사로 창조되었음이 증명되며, 

나와 함께 노는 모든 이들에게도 자신만의 놀이터를 만들 수 있도록 보여주는, 

진정한 이타를 내가 행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내 삶은 기준은 

‘이기가 이타다’이다.


나부터 먼저 알아야 하고 나부터 먼저 잘해야 하고 나부터 먼저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하고 나부터 먼저 제대로 된 정신으로 삶을 살아야 하고 나부터 먼저 행동으로 보여주어야 하는 것이 나의 삶의 전반적인 기준이 되었다. 이를 위해 내가 놀던 곳들에게서 당분간 떠나 스스로 고립을 택하고 그렇게 나의 인식의 성장에 할애할 시간을 확보한 것은 내가 한 결정 가운데 참으로 잘한 선택이었다. 


즐겁고 행복한 인생에는 많은 사람이 아니라 뜻이 맞는 몇몇과 신나게, 안전하게, 의미있게 노는 것이 중요하니까. 나 역시 그러한 관계들을 만들고 싶고 그러려면 내 정신이 담긴 내 놀이터가 만들어져야 하고 이 놀이터가 모두에게 개방되었을 때 그들이 스스로 놀이터를 찾아 등장하도록 나는 내 인생의 기준을 잡아본 것이다.  

 

이제 기준을 세웠으니 수준을 높이는 걸음을 걸으면 된다.

인간으로서의 수준, 

인격. 

한참 멀리 가야겠지만 되돌아가거나 서있지만 않으면 된다.

그렇게 묵묵히 걸으면 된다.    


나를 해체하고 다시 중심으로 세운 맥(脈) 두 번째, ‘기준을 높여야 수준이 높아진다’는 어쩌면 성경의 ‘가진 자가 더 많이 갖게 할 것이다(주3)’의 실천이라 감히 말하려 한다. 소로우(주4)작문을 하는 데 있어 이 성경의 의미를 거론하며 더 많이 생각하고 더 많이 쓸수록 더 잘 쓰게 된다는 의미를 전했다. 


일정한 양이 쌓여 그것이 습관이 되면, 그러니까 그 이하는 하지 않는 것으로 나의 기준이 정해지면 속도는 속도의 속성대로 가속도가 붙게 되고 수준은 그 때부터 질적팽창을 이룬다.     


기준은 양, 수준은 질적 속성을 지닌다고 할 수 있겠다. 

질서잡힌 이성을 위한 사고는 손과 가까이 있으며 

어떤 현상에도 굴복하지 않는 정신의 강인함은 멀쩡한 신체에게 정신이 항복하지 않는 의지에 있다. 

수준높은 삶의 격을 원하고 삶의 과정에서 수많은 성취를 이루려 한다면 우선 기준부터 높여야 한다.           


주1>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프리드리히 니체, 김미기 역, 2001, 책세상 

주2> 에머슨수상록, 랄프왈도에머슨, 이창배 역, 1996, 서문당

주3> 마태복음 25장 29절

주4> 소로우의 일기, 헨리데이빗소로우, 2003, 도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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